프롤로그: '살로몬', 너는 다시 걷고 싶은가?

: 고통스러웠지만 행복했던 순례의 기록

by 디본




살로몬, 너는 다시 걷고 싶은가?


내 신발장 맨 위 칸, 흙먼지 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진 낡은 트레킹화 한 켤레가 있다. 사람들은 왜 다 낡은 신발을 버리지 않느냐 묻지만, 나는 차마 그럴 수 없다. 이 녀석의 이름은 '살로몬'. 800km의 대장정을 나와 함께 완주한, 나의 가장 듬직한 전우(戰友)이자 증인이기 때문이다.


살로몬을 볼 때마다 나는 2017년 9월 어느 날 저녁, 파리 드골 공항의 서늘한 공기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날 저녁, 미리 예약해 둔 파리 시내 민박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나서, 나는 다음 날 아침 프랑스 국경마을 생장(Saint-Jean Pied-Pod)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수많은 이들이 그러했듯, 나 역시 그곳에서 40여 일에 걸친 산티아고 순례길(Camino de Santiago)의 첫발을 내디뎠다. 난생처음 떠나는 나 홀로 순례길. 흥분과 기대감 속에서도,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생장 마을로부터 시작되는 프랑스 까미노는 첫날부터 험하고 힘이 드는 순례길이다. 프랑스와 스페인을 남북으로 가르고 있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장기간의 트레킹이니 만큼 인터넷 사이트에서 관련 정보들을 꼼꼼히 수색해서 제2의 ‘내발’이 되어 줄 트레킹화도 신중하게 골라 한 달 이상 미리 신어보고 가지고 갔다. 하지만 그 믿음은 일주일도 채 가지 못했다.


까미노 첫 1주일이 성공과 실패의 관건이라고 했다. 매일 약 25km 이상을 걸어야 하는 카미노 길에 몸과 마음이 적응을 해야 하는 첫 기간이다. 무엇보다 ‘죄 없는’ 내 발은 힘들다는 말도 못 하고 72kg의 내 육신과 길 위에서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12kg 배낭의 무게를 매일 견디어 내야 했다. 그 하중을 견딜 수 있게 해 주는 소중한 완충장치가 트레킹화이다.


중간에 로그로뇨(Logrono) 마을에서 구입한 두 번째 신발과의 만남은 잠시나마 희망을 주었지만, 그 평화는 신기루처럼 짧았다. 발바닥과 뒤축에 잡힌 크고 작은 물집들이 터지고 짓무르며 내 의지를 갉아먹었다. 마침내 레온(Leon)이라는 도시에 이르렀을 때, 내 발은 더 이상 주인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순례길의 끝이 아니라, 내 여정의 끝이 보였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던 그날 저녁, 절망적인 마음으로 마을을 헤매다 우연히 들른 스포츠용품점. 그곳의 수많은 신발들 사이에서, 유독 내 지친 발을 따뜻하게 감싸 안아줄 것만 같은 녀석을 발견했다. 그것이 바로 내 800km 여정의 마침표를 찍게 해 준 '살로몬'과의 운명적인 첫 만남이었다.


그 후로 거짓말처럼 발에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살로몬은 묵묵히 나의 모든 걸음을 지탱해 주었고, 우리는 생장을 떠난 지 35일 만에 최종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했다. 내 인생의 전환점에서 떠난 길. 그 길은 나 자신을 돌아보고, 다가올 날들을 마음 다지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몸과 발이 버텨주지 않으면 결코 완주할 수 없는 육체적인 고행이었다.


살로몬은 그 고된 순례길을 끝까지 함께해 준 고마운 친구다. 나는 지금도 집을 나설 때마다 신발장 맨 위 칸의 살로몬에게 조용히 말을 건넨다.


"살로몬, 너는 다시 걷고 싶은가?"


그 질문은 어쩌면, 제2의 인생길을 걸어가야 할 나 자신에게 던지는 다짐일지도 모른다. 그 길 위에서 다시 흔들리고 지칠 때면, 나는 산티아고의 추억을 꺼내 들 것이다.


<산티아고의 추억에>


오늘과 내일 사이

하늘이 열리고, 바람이 불고

멀리서부터 이국의 낯선 바다가 밀려오고,

모국어로 풀 수 없는 슬픈 이야기, 기억, 그리고 또 다른 순례


어둠 속 버리고 온 내 낡은 신발로

나는 오늘도 기억 속 그 길을 걸으며,

언제 또다시 그 오래된 마을을 찾을 수 있을는지

언제 또다시 그 무심한 샘물에 갈한 목을 축일 수 있을는지


.... 산티아고처럼, 추억처럼 시간이 흐르는 밤

아직 내리지 않은 먼 곳에 그대가,

소리 없는 그리움을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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