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 메커니즘의 뇌과학적 해부
C8H11NO2.
이 복잡해 보이는 화학식은 우리 뇌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드라마의 주인공, 바로 '도파민'의 분자식이다. 아마 당신도 이 이름을 수없이 들어봤을 것이다. 흔히 '행복 호르몬'이나 '쾌락의 물질'로 불리는 녀석이다.
하지만 여기서 당신이 알고 있던 상식을 조금 수정해야 할 것 같다.
뇌과학자들의 엄밀한 연구에 따르면, 도파민은 단순히 우리가 행복을 느낄 때 나오는 결과물이 아니다. 도파민의 진짜 정체는 욕망의 전령이자, 우리를 끊임없이 무언가를 향해 달리게 만드는 결핍의 채찍에 가깝다.
우리가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의미 없는 피드를 끝없이 새로 고침 하는 이유는 당신의 의지가 나약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뇌가 수백만 년 동안 생존을 위해 진화시켜 온, 더없이 정교하고 강력한 시스템이 해킹당했기 때문이다.
이 장에서는 뇌과학이라는 현미경을 통해 우리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이 기이한 화학 작용을 들여다보려 한다. 왜 우리는 멈추고 싶어도 멈추지 못하는가? 그 답은 우리 뇌 속에 숨겨진 저울과 슬롯머신에 있다.
스탠퍼드 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이자 중독 의학의 권위자인 애나 렘키(Anna Lembke)는 그녀의 저서 『도파민 네이션』(Dopamine Nation)에서 뇌의 보상 처리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아주 직관적인 비유를 들었다. 그것은 바로 '쾌락-고통 저울'이다.
상상해 보자. 당신의 뇌 중심부, 쾌락을 담당하는 영역에는 평형을 유지하려는 저울이 하나 놓여 있다. 이 저울에는 기본적인 규칙이 하나 있다. 바로 '항상성(Homeostasis)'이다. 뇌는 언제나 저울이 수평을 유지하는 상태, 즉 평온한 상태를 원한다.
당신이 스마트폰을 켜고 재미있는 영상을 보거나, 인스타그램에서 '좋아요' 알림을 확인했다고 치자. 그 순간 뇌에서는 도파민이 분비된다. 이것은 저울의 쾌락 쪽(왼쪽)에 무게 추를 올려놓는 것과 같다. 저울은 쾌락 쪽으로 '쿵' 하고 기운다. 우리는 이때 짜릿함, 즐거움, 안도감을 느낀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뇌는 이 기울어진 상태를 '비정상'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수평을 되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뇌는 쾌락 쪽으로 기울어진 저울을 다시 평형으로 돌려놓기 위해, 반대편인 고통 쪽(오른쪽)에 무게 추를 싣기 시작한다.
애나 렘키는 이 반작용을 설명하기 위해 '그렘린(Gremlins)'이라는 상상 속의 존재를 비유로 들었다. 쾌락 쪽에 무게가 실리면, 뇌는 균형을 맞추기 위해 고통 쪽에 이 작은 괴물들인 그렘린을 뛰어내리게 한다. 처음에는 그렘린 한두 마리가 고통 쪽에 올라탄다. 그러면 저울은 다시 수평으로 돌아오고, 쾌락은 사라진다. 하지만 그렘린들은 수평이 되었다고 해서 바로 내려가지 않는다. 그들은 잠시 더 머물러 있는다. 이때 저울은 쾌락 쪽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 쪽으로 살짝 기울어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즐거운 경험 뒤에 겪는 묘한 허무함, 혹은 '현자 (켄자(賢者, Kenja) 타임'- 무언가에 깊이 몰입하거나 열광했다가 급격하게 허무함, 무기력함, 혹은 현실 자각을 느끼는 상태 -이라 불리는 현상의 정체다. 쾌락은 공짜가 아니다. 뇌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고통(반작용)을 통해 값을 치르게 한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이 미세한 불쾌감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스마트폰을 집어 든다면 어떻게 될까?
"아, 뭔가 심심해. 기분이 좀 다운되네. 다시 인스타그램을 켜볼까?"
당신이 연속해서 강한 자극(숏폼 영상, 게임, 쇼핑)을 뇌에 주입하면, 뇌는 비상사태를 선포한다. "이 주인이 계속해서 쾌락 쪽에 엄청난 무게를 싣고 있어! 균형이 깨지겠어! 그렘린들을 더 투입해!"
이제 뇌는 거대한 그렘린 군단을 고통 쪽에 투입한다. 더 많고, 더 무겁고, 더 강력한 그렘린들이 고통 쪽에 올라탄다. 이제 당신은 예전과 똑같은 10분짜리 영상을 봐도 예전만큼 즐겁지 않다. 이미 고통 쪽에 너무 많은 그렘린들이 버티고 있어서, 웬만한 쾌락의 무게로는 저울을 쾌락 쪽으로 기울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내성(Tolerance)이다.
이제 당신은 쾌락을 느끼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 쪽으로 무섭게 기울어진 저울을 그나마 수평으로 되돌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스마트폰을 붙들게 된다. 처음에는 즐거움을 위해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고통스럽지 않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뇌는 아예 도파민을 생성하는 능력을 줄이거나 도파민 수용체의 수를 줄여버린다. 과도한 자극으로부터 뇌세포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 기제다. 결과적으로 당신의 뇌 내 저울은 만성적으로 고통 쪽으로 기울어진 상태로 고착화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우울하고, 이유 없이 불안하며, 사소한 일에도 짜증이 솟구친다. 스마트폰을 하지 않을 때 느껴지는 그 끔찍한 지루함과 불안감은 단순히 심심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뇌가 "제발 저울 좀 맞춰줘!"라고 비명을 지르는, 금단 증상이자 물리적인 고통이다.
우리는 이처럼 '쾌락-고통 저울'이라는 생물학적 족쇄에 묶여 있다. 이것이 의지만으로 스마트폰을 끊기 어려운 첫 번째 이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를 붙잡아 두는 또 하나의 강력한 장치가 기다리고 있다.
뇌의 저울이 '왜' 우리가 계속 자극을 찾는지 설명한다면, 이 두 번째 메커니즘은 '어떻게' 디지털 기기가 우리를 그토록 강력하게 붙들어 매는지 설명한다. 그것은 바로 카지노의 슬롯머신과 똑같은 원리인 '변동 비율 강화 스케줄(Variable Ratio Reinforcement Schedule)'이다.
20세기 행동주의 심리학자 B.F. 스키너(B.F. Skinner)는 비둘기와 쥐를 이용해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그는 상자 안에 레버를 설치하고, 동물이 레버를 누를 때마다 먹이가 나오게 했다. 동물들은 배가 고플 때만 레버를 눌렀고, 배가 부르면 더 이상 누르지 않았다.
그런데 스키너가 규칙을 바꿨다. 레버를 누를 때마다 먹이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랜덤'하게 나오도록 한 것이다. 어떤 때는 한 번만 눌러도 나오고, 어떤 때는 열 번을 눌러야 나오고, 때로는 아무리 눌러도 나오지 않았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동물들은 배가 불러도 미친 듯이 레버를 누르기 시작했다. 먹이라는 보상이 '불확실'해지자, 행동에 대한 집착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여기서 도파민의 진짜 정체가 드러난다. 도파민은 보상을 받았을 때보다, 보상을 '기대'할 때 훨씬 더 많이 분비된다. 특히 그 보상이 나올지 안 나올지 모르는 예측 불가능한 상황일 때, 도파민 시스템은 폭주한다. "혹시 이번엔 나올까?"라는 기대감. 바로 이 '혹시나' 하는 마음이 도파민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연료다.
이제 이 원리를 당신의 스마트폰에 대입해 보자.
우리는 왜 습관적으로 화면을 아래로 당겼다 놓는 '새로 고침' 동작을 할까? 이 제스처는 슬롯머신의 레버를 당기는 행위와 뇌과학적으로 완벽하게 일치한다. 화면을 당기는 그 1초 남짓한 로딩 시간 동안, 우리의 뇌는 엄청난 긴장과 기대를 한다. "이번엔 새로운 뉴스가 떴을까?" "좋아요가 늘었을까?" "누가 댓글을 달았을까?"
결과는 예측 불가능하다. 어떨 때는 아무런 알림도 없다(꽝). 어떨 때는 광고 메일만 와 있다(꽝). 하지만 어쩌다 한 번, 내가 짝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거나, 내 게시물이 인기 글에 올라가 있다(잭팟!).
이 간헐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디지털 잭팟'을 경험한 뇌는 그 쾌락을 잊지 못한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그 한 번의 보상을 위해, 우리는 무의미한 '꽝'들을 견디며 수백 번, 수천 번 레버를 당긴다.
개발자들은 이 원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인스타그램의 빨간색 알림 배지, 유튜브의 '다음에 볼 영상' 추천 알고리즘, 카카오톡의 '1'이 사라지는 확인 기능... 이 모든 것은 철저하게 계산된 '변동 보상 설계'다. 당신이 앱을 끄지 못하게, 아니 끄더라도 5분 뒤에 다시 켜게 만들기 위해 당신의 도파민 회로를 정밀 타격하도록 설계된 것이다.
진화론적으로 볼 때, 이러한 '예측 불가능한 보상에 대한 집착'은 인류의 생존에 필수적이었다. 원시 시대 인류는 식량을 구하기 위해 숲을 헤매야 했다. 나무 뒤에 사과가 있을지, 맹수가 있을지 모르는 불확실성 속에서도 계속해서 탐색해야만 먹이를 찾고 생존할 수 있었다. 도파민은 우리 조상들이 지치지 않고 숲을 뒤지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이를 '탐색 회로(Seeking Circuit)'라고 한다.
문제는 이 고대의 생존 본능이 21세기 디지털 환경에서 오작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제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한 정보 조각과 타인의 관심이라는 '디지털 먹이'를 찾아 끝없이 인터넷이라는 숲을 헤맨다.
우리의 뇌는 구석기시대와 달라지지 않았는데, 환경은 너무나 교묘하게 변했다. 우리는 손안에 카지노를, 아니 전 세계가 합심하여 만든 가장 강력한 슬롯머신을 들고 다닌다. 그리고 그 기계는 24시간 내내 우리에게 속삭인다.
"한 번만 더 당겨봐. 이번에는 진짜 대단한 게 나올지도 몰라."
여기까지 뇌과학적 메커니즘을 살펴보고 나면, 한 가지 서늘한 질문이 등 뒤를 스친다.
"과연 나에게 자유의지라는 게 남아 있는가?"
우리가 스마트폰을 켜는 행위가 나의 이성적인 판단에 의한 선택이 아니라, 기울어진 쾌락-고통 저울을 맞추기 위한 생물학적 몸부림이자, 불확실한 보상에 중독된 원시적 탐색 회로의 발작이라면 말이다.
우리는 자신을 '디지털 기기의 사용자(User)'라고 부른다. 하지만 마약 산업에서 약을 사용하는 사람을 부르는 용어 또한 '사용자(User)'라는 점은 섬뜩한 우연이 아니다. 거대 기술 기업들이 설계한 알고리즘과 우리의 원시적인 뇌가 결탁했을 때, 개인의 의지력은 마치 태풍 앞의 촛불처럼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절망하기엔 이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다. 이제 우리는 내 머릿속에서 왜 이런 충동이 일어나는지, 그 톱니바퀴의 구조를 알게 되었다. 이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빼앗긴 뇌의 주도권을 되찾는 첫 번째 단추다.
우리의 뇌는 가소성(Plasticity)을 가지고 있다. 즉, 변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나쁜 쪽으로 길들여졌다면, 다시 좋은 쪽으로 훈련시킬 수도 있다. 물론 그 과정에는 고통이 따를 것이다. 저울 위에 올라탄 그렘린들이 비명을 지르며 저항할 테니까. 하지만 그 고통의 과정을 겪지 않고서는, 우리는 영원히 도파민이라는 주인이 던져주는 디지털 먹이를 찾아 헤매는 비둘기 신세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어지는 장에서는 이 디지털 도구가 어떻게 우리 일상 깊숙이 파고들어, 합법적이고도 치명적인 '주사기'가 되었는지 그 구체적인 양상을 살펴보려 한다. 스마트폰은 단순한 기계가 아니다. 그것은 24시간 혈관에 꽂혀 있는 링거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