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본질적 변질

우리는 서로를 '소비'하고 있는가?

by 디본

'좋아요'.


엄지손가락으로 차가운 액정 화면을 두 번 톡톡 두드리는 그 짧은 순간. 0.5초도 걸리지 않는 이 단순한 행위가 우리 인간관계의 풍경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면, 당신은 믿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습관적으로 친구의 생일 파티 사진에 붉은 하트를 누르고, 직장 동료의 승진 소식에 '최고예요' 이모티콘을 날린다. 그러고는 묘한 안도감과 함께 이렇게 생각한다. "아, 오늘치 관계 관리는 이걸로 끝." 마치 밀린 숙제를 마친 듯한 개운함이다.


하지만 이 늦은 밤, 솔직히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그 하트를 누르는 찰나의 순간, 당신은 정말로 친구의 기쁨에 진심으로 공명했는가? 혹시 그저 "나 여기 있어, 나 너 보고 있어, 그러니까 너도 나 잊지 마"라는 일종의 '디지털 생존 신호'를 보낸 것에 불과한 건 아닐까?


windycloud21_Macro_close-up_shot_of_a_thumb_pressing_a_glowin_cc0ba368-fb90-4967-813c-70e7bbab5f57_2 (1).png "부서지는 하트" AI Genrated


2.1. '좋아요'라는 버튼이 만든 0.5초의 환상과 불안


과거의 관계는 시간과 정서의 묵직한 '축적'이었다. 누군가와 '친하다'고 말하려면 밥을 먹고, 눈을 맞추고, 때로는 어색한 침묵을 견디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다. 서로의 냄새와 목소리의 톤, 미묘한 표정 변화를 기억하는 일. 그건 꽤나 번거롭고,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드는 비효율적인 투자였다.


하지만 효율성을 숭배하는 디지털 시대는 우리에게 '가성비 좋은 관계'를 선물했다. '좋아요' 버튼은 복잡한 감정 교류나 시간 투자 없이도 우리가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마법의 도구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긍정적 강화(Positive Reinforcement)'라고 부르는데, 쉽게 말해 뇌에게 주는 달콤한 간식 같은 거다.


문제는 이 간식이 너무 달콤한 나머지, 우리는 정작 밥(본질적인 교류)을 먹는 법을 잊어버렸다는 데 있다. 우리는 상대방의 게시물 내용에 깊이 공감하고 위로하기보다는, 일종의 '교환 거래'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내가 쟤 사진에 좋아요 눌러줬는데, 왜 쟤는 내 글에 반응이 없지?"


이 미묘한 불안감, 한 번쯤 느껴봤을 것이다. 관계가 마음을 나누는 깊이 있는 '대화'가 아니라, 탁구공처럼 반응을 주고받아야만 유지되는 '핑퐁 게임'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내가 공을 쳤는데 상대가 받아치지 않으면, 그 관계는 곧장 '실패'나 '무시'로 간주된다.


이 과정에서 관계의 무게는 깃털처럼 가벼워진다. 밀란 쿤데라가 말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21세기에는 '참을 수 없는 관계의 가벼움'으로 진화했다고나 할까. 우리는 수백 명과 연결되어 있지만, 그 연결은 손가락 한 번 까닥하면 끊어질 얇은 실처럼 위태롭기만 하다.


2.2. '내 사람'에서 '잠깐 스치는 콘텐츠'로


여기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자. 사회학의 거장, 폴란드의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현대 사회를 '액체 근대(Liquid Modernity)'라고 정의했다. 과거의 사회가 단단한 고체처럼 직업, 거주지, 배우자, 이웃이 고정되어 있었다면, 현대는 모든 것이 액체처럼 흐르고, 모양이 바뀌고, 흩어진다는 뜻이다.

이 소름 돋는 유동성은 우리의 가장 사적인 영역인 인간관계에도 그대로 스며들었다.



windycloud21_Artistic_interpretation_of_Liquid_Modernity._Two_41aeb788-f9b3-447b-8b0f-70716b7caa11_2.png 액체 근대(Liquid Modernity), AI Generated


예전의 관계가 '실존하는 관계(Being Relationship)'였다면, 지금은 철저히 '경험하는 관계(Experiencing Relationship)'다. 쉽게 말해, 예전에는 친구나 연인이 내 정체성의 일부이자 쉽게 바꿀 수 없는 '반려'의 개념이었다면, 지금은 넷플릭스 콘텐츠처럼 취향에 맞으면 잠시 '구독'하고, 재미없거나 귀찮아지면 언제든 '구독 취소'나 '차단'을 할 수 있는 '소비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인간관계를 쇼핑하듯 관리한다. "어라, 얘 요즘 좀 우울한 이야기만 올리네? 보기 피곤한데 숨김 처리해야지." "이 사람하고는 의견이 좀 안 맞네? 언팔로우."


우리는 너무나 쉽고 매끄럽게 관계를 편집한다. 불편함, 갈등, 지루함, 오해... 사실 진짜 관계가 깊어지기 위해 반드시 겪어야 할 이 껄끄러운 굴곡들을, 우리는 스마트폰의 '삭제' 기능 하나로 깨끗하게 소거해 버린다. 우리는 '갈등 없는 관계'를 원하지만, 사실 갈등이 없다는 건 '깊이도 없다'는 말과 동의어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우리는 수많은 사람과 24시간 '접속'해 있지만, 정작 내 삶이 흔들릴 때 나를 단단하게 붙잡아 줄 기반은 잃어버렸다. 마치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알림)에 관계는 흩어지고, 우리는 언제든 내가 대체될 수 있다는, 혹은 나도 누군가에게 '스킵' 당할 수 있다는 근원적인 불안감에 시달린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있으면서도 뼈저린 외로움을 느끼는 진짜 이유다. 우리는 서로를 진정으로 '만나는(Meeting)' 것이 아니라, 그저 타임라인 위에서 잠시 '스쳐 지나가고(Browsing)' 있을 뿐이니까.


windycloud21_A_surreal_vending_machine_glowing_in_neon_blue_a_f9d4ffc0-0bd2-4115-acb2-13002b7d33a5_0.png "친구를 구매하시겠습니까?" AI Generated.



우리는 안전하고 가벼운, 상처받지 않는 연결을 택한 대가로, 진정한 친밀감이 주는 묵직한 위로를 희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텅 빈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또다시 스마트폰을 켠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건 따뜻한 위로가 아니라, 우리 뇌를 속이는 강력하고 차가운 화학 물질뿐이다.


다음 장에서는 바로 그놈, 우리의 뇌를 지배하고 조종하는 '도파민'이라는 녀석의 실체를 낱낱이, 그리고 아주 과학적으로 파헤쳐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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