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스러웠지만 행복했던 순례의 기록
:까미노 제19일 차(Terradillos de los Templarios to Bercianos del Real Camino), 23.8km; Oct. 9, 2017)
10월 9일 월요일. 템플 기사단의 영지를 떠나 다시 길을 나선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길가에 거대한 붉은색 표지판이 나타났다.
"Provincia de León" (레온 주)
드디어 메세타의 전반부였던 팔렌시아(Palencia)를 뒤로하고, 까미노의 후반부를 책임질 거대한 땅, '레온'에 입성했다.
곧이어 사하군(Sahagún) 근처에서 돌에 새겨진 지도와 마주했다. 오른쪽은 로마 시대의 옛길(Calzada Romana), 왼쪽은 '프랑스 길(Camino Frances)'인 베르시아노스 방향. 나는 지도가 가리키는 왼쪽,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카미노'로 향하는 길을 택했다. '왕의 길(Real Camino)'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이 발걸음을 이끌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황톳빛 길을 걷던 중, 길가에 세워진 하얀 십자가 비석 하나가 발길을 멈추게 했다.
"PEREGRINO A SANTIAGO... MANFRED KRESS FRIEDRICH (1998년 6월 9일)"
1998년 초여름, 산티아고를 향해 걷다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 순례자 만프레드를 기리는 비석이었다. 누군가의 아들이자 친구였을 그는, 자신의 목적지에 닿지 못하고 이곳에서 영원한 순례자가 되었다. 사람들이 말하길 유럽의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 가운데는 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다가 운명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비석 앞에 잠시 서서 묵념을 올렸다. 걷다가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 어쩌면 그는 가장 행복한 순간에 별이 된 것은 아닐까. 길 위에서 먼저 떠난 선배 순례자의 영혼이, 남은 우리의 길을 지켜주는 듯했다.
베르시아노스로 향하는 길은 그야말로 '가로수길의 향연'이었다. 차도 옆으로 난 순례길(Sendero)을 따라 아직 어린 플라타너스 묘목들이 끝도 없이 도열해 있었다.
아직은 키가 작아 넉넉한 그늘을 만들어주진 못하지만, 규칙적으로 뻗어 나가는 나무들의 행렬은 묘한 리듬감을 만들어주었다. 그 나무들 사이로 비치는 오후의 햇살과 그림자를 밟으며, 나는 오로지 '걷는 행위' 그 자체에만 집중하는 몰입의 시간을 가졌다.
오후 1시 20분경, 드디어 마을 입구를 알리는 투박한 석조 간판이 보였다.
"BERCIANOS DEL REAL CAMINO"
표지판 아래에는 누군가 검은 스프레이로 "ITOIZ STOP"이라는 낙서를 남겨 놓았다.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댐 건설을 반대하는 유명한 구호다. 이 조용한 시골 마을 입구에서도 누군가는 자신의 목소리를 외치고 있었다.)
이곳은 진흙과 짚을 섞어 만든 전통 가옥(어도비)들이 인상적인 곳이다. 나는 미리 알아봐 둔 '알베르게 산타 클라라(Albergue Santa Clara)'에 짐을 풀었다.
소박하지만 작은 앞마당이 있는 이 알베르게는 지친 순례자들을 따뜻하게 품어주었다. 샤워를 마치고 마당에 나와 따사로운 햇살 아래서 하루를 정리한다. 스페인의 국민 맥주, 갈증을 한 방에 풀어주는 시원한 San Miguel 한잔과 함께.
레온 주에 들어섰다는 설렘과 길 위에서 마주한 만프레드의 비석이 주는 삶에 대한 성찰.
오늘 걸어온 23.8km는 단순한 거리가 아니라, 삶과 죽음, 그리고 역사가 공존하는 깊은 울림의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