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스러웠지만 행복했던 순례의 기록
:까미노 제18일 차(Carrión de los Condes to Terradillos de los Templarios), 26.2km; Oct. 8, 2017)
아침 7시, 아직 어두운 길을 조심스레 따라가며 카리온의 문을 나서자마자 우리를 맞이한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직선의 도로였다. 오늘 여정의 전반부, 다음 마을인 칼사디야 데 라 쿠에사(Calzadilla de la Cueza)까지 이어지는 약 17km의 구간은 까미노 전체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코스 중 하나다.
물 한 모금, 그늘 한 점 찾을 수 없는 이 황량한 직선도로는 사실 2천 년 전 로마인들이 건설한 '비아 아키타니아(Via Aquitania)'의 일부다. 프랑스 보르도에서 스페인 아스토르가까지, 로마 군단과 물자를 실어 나르던 제국의 대동맥이었다.
부드러운 흙길이 아닌, 자갈과 흙이 다져진 단단한 길. 2천 년 전, 철갑을 두른 로마 군인들이 샌들 끈을 조여 매고 걸었을 바로 그 길 위에 내 트레킹화와 자국을 포갠다. 풍경의 변화 없이 오로지 지평선만 바라보며 걷는 이 시간은 '걷기'라기보다는 '수양'에 가까웠다. 고요하다 못해 적막한 이 길에서 들리는 것은 오직 나의 거친 숨소리와 자박거리는 발자국 소리뿐. 타임머신이 있다면 아마 지금 이 순간이 아닐까.
끝날 것 같지 않던 직선의 감옥, 혹은 명상의 회랑을 통과해 드디어 중간 휴식지, 칼사디야 데 라 쿠에사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안도감에 다리가 풀릴 뻔했다.
이 작은 마을은 이 구간을 걷는 순례자들에게 생명수와도 같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고, 바싹 마른 목을 축이며 생각했다. 옛 순례자들에게도, 로마의 병사들에게도 이곳은 똑같이 간절한 휴식처였으리라. 17km의 고독을 견뎌낸 자만이 맛볼 수 있는 콜라 한 잔의 짜릿함은 그 어떤 성스러운 축복보다 강렬했다.
다시 힘을 내어 오늘의 목적지인 테라디요스 데 로스 템플라리오스로 향했다. 이름에서부터 묵직한 울림이 느껴지는 곳. '템플라리오스(Templarios)'는 바로 중세 시대, 성지를 수호하고 순례자들을 보호했던 전설적인 '템플 기사단(Knights Templar)'을 의미한다.
이곳은 12세기경 템플 기사단의 영지였으며, 그들이 직접 운영하던 순례자 병원이 있던 곳이다.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하얀 망토를 휘날리며, 도적 떼로부터 순례자를 지키기 위해 칼을 들었던 수도사들. 비록 지금 거대한 성채는 사라지고 소박한 벽돌 건물들만 남았지만, 마을 곳곳에는 여전히 순례자를 환대하고 보호하려는 그들의 정신이 서려 있는 듯했다. 나는 오늘, 보이지 않는 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무사히 이곳에 당도한 셈이다.
까미노 여정의 초반, 고통스러웠던 적응기도 살아남고 이제 중반을 지나 후반으로 접어드는 시점, 휘영청 달 밝은 이국의 밤에 지그시 눈을 감자 이제까지 걸어온 길과 앞으로 더 걸어야 할 길들에 대한 상념이 살며시 차올랐다.
나를 이 길로 이끈 것 그리고 여기까지 이끌어 온 그 힘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냥 하루하루 고된 걷기와 다음 날의 걷기를 준비하고, 다시 자고 새벽에 일어나는 것으로 이어지는 이 단순한 반복이 감추고 있는 비밀스러운 선물은 무엇인가? 나는 진정 나의 진정한 자아에로 회귀하고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