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미노 데 산티아고의 추억에(18)

:고통스러웠지만 행복했던 순례의 기록

by 디본

18. 메세타의 태양 아래, 쉼표를 찍다

:까미노 제17일 차(Fromista to Carrion de los Condes, 18.4 km; Oct. 7, 2017)



1) 가벼운 발걸음, 텅 빈 직선 길


프로미스타를 떠나 카리온으로 향하는 18.4km. 어제의 운하 길과는 사뭇 다르다. 프로미스타를 벗어나자마자 그늘 한 점 없는, 끝이 보이지 않는 직선도로가 펼쳐졌다. 순례자들이 흔히 '정신 수양의 길'이라 부르는 메세타(Meseta) 고원 지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황토색 흙길과 파란 하늘, 그리고 지평선. 시야를 가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이 길은 단조롭지만, 역설적으로 마음을 단순하게 만들어준다.


[아름다운 고독]

광활한 메세타 평원을 지날 때 끝까지 나와 동행하던 그 뜨거운 태양, 추수가 끝난 광활한 밀밭의 그 황홀한 황색, 그리고 끝없이 흐르는 땀과 가끔씩 서늘한 그늘에 지친 몸을 누일 때 소리 없이 스물스물 파고드는 아린 고독 ㅡ 본질을 알 수 없는 공허함 ㅡ 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철저히 혼자이어서만 맛볼 수 있었던 그 공허함의 넉넉한 공간, 시간의 정지감, 가는 바람이 흐르는 소리까지 감지되던 그 적막함 속에 나 자신의 육체와 영혼은 이제 갓 난 아이처럼 벌거벗고 있었다. 우리 동네 오페라빈 에스프레소처럼 씁쓸하지만 달콤한 맛의 아름다운 고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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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쉼표 같았던 중간 마을들


오늘은 18km 남짓의 짧은 여정이라 마음의 짐도, 배낭의 무게도 한결 가볍게 느껴진다. 아침 일찍 서둘러 나선 덕분에 태양이 뜨거워지기 전에 꽤 많은 거리를 걸을 수 있었다. 프로미스타를 뒤로 하고 그 단조로운 묵언수양하듯 길을 계속 걸으면 포블라시온 데 캄포스(Población de Campos) 시작으로 레벵가(Revenga), 비야르멘테로(Villarmentero) 같은 소박한 마을들이 황톳빛 대지 위에 드문드문 나타났다 사라졌다. 마치 끝없는 악보 위에서 잠시 숨을 고르게 해주는 '쉼표' 같은 존재들이었다. 특히 카리온에 닿기 직전 만난 비야알카사르 데 시르가(Villalcázar de Sirga)는 웅장한 템플 기사단의 성당이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며 순례자들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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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작은 마을들이 건네는 무언의 응원을 받으며 한 걸음씩 내딛다 보니, 어느새 오늘의 목적지인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의 입구에 닿을 수 있었다.


3) 고요의 공간, 산타 마리아 알베르게


오후 1시쯤,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에 도착해 예약해 둔 '산타 마리아(Santa Maria) 알베르게'의 문을 열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깥세상의 소음이 툭 끊어졌다.


20171007_132901186.jpg Albergue Santa Ma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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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크인을 하고 배정받은 2층으로 올라갔다. 눈앞에 펼쳐진 긴 복도는 압도적인 고요함을 품고 있었다. 반질반질하게 닦인 바닥과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문들. 그 엄숙하고 정갈한 풍경은 이곳이 단순한 숙소가 아니라 기도가 스며있는 수도 공간임을 말해주는 듯했다. 복도를 걸을 때마다 나는 내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들뜬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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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을 풀고 건물 안뜰(Patio)로 내려왔다. 그곳에는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서 계신 성모상(聖母像)이 있었다. 화려하지 않지만 온화한 표정의 성모님은 지친 순례자들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계셨다. 초록 잎들이 감싸고 있는 그 작은 정원은 마치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했다. 나는 성모상 앞 벤치에 앉아 한참 동안 멍하니 햇살을 쬐었다. 17일 동안 쉼 없이 달려온 내 다리와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듯한 평화로운 오후였다.


4) 카리온의 느긋한 오후, 그리고 Bar Carmen에서의 만찬


알베르게에서의 휴식 후, 가벼운 옷차림으로 시내 구경에 나섰다. 중세의 흔적이 남아있는 돌길을 샌들을 신고 느긋하게 걸었다. 바쁠 것 하나 없는 이 시간이 참으로 달콤하다.

광장 근처 노천카페에 자리를 잡고 따뜻한 차 한 잔을 주문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차를 마시는 이 소소한 행위가 순례길 위에서는 사치스러운 행복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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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저녁 식사를 위해 마을 맛집 'Bar Carmen'을 찾았다. 오늘은 몸도 마음도 푹 쉬었으니, 배도 든든히 채워야 했다.


시끌벅적하고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스페인 가정식 요리를 즐겼다. 정성스럽게 차려진 음식과 와인 한 잔에 하루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졌다. 좋은 공간에서 쉬고, 좋은 음식을 먹는 것. 단순하지만 가장 확실한 행복을 누린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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