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미노 데 산티아고의 추억에(17)

:고통스러웠지만 행복했던 순례의 기록

by 디본

17. 이곳 메세타 들녘에도 가을이 내리고 ...

:까미노 제16일 차(Castrojeriz to Fromista, 15.2 km; Oct. 6, 2017)



1) 모스텔라레스 언덕을 넘어


어제 '고향의 맛' 비빔밥으로 영혼까지 채운 덕분인지 아침 공기가 상쾌하다. 하지만 카스트로헤리스를 벗어나자마자 순례자들을 시험에 들게 하는 가파른 오르막, 메세타의 악명 높은 깔딱 고개 '모스텔라레스 언덕(Alto de Mostelares)'이 앞을 가로막았다.


20171006_085008.jpg Alto de Mostelasres


20171006_085450.jpg 언덕 정상에서 잠시 숨 고르기 하는 순례자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고통을 참으며 정상에 오르니, 지나온 길과 앞으로 가야 할 광활한 평원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래, 이 맛에 걷는 거지." 거친 숨을 고르며 다시 평원을 향해 내려갔다.


걷는 도중에 프랑스에서 온 할머니 한 분과 잠시 동행하게 되었다. 그분은 지금까지 10년이 넘게 매년 이 순례길을 걷는다고 했다. 조심스레 연세를 여쭈니, 올해 82세라고 하셨다. 오마나 ~! 한 해 한 해 나이 들어감에 대해 초조해하고 이제 가면 언제 다시 여기 와볼 수 있을까 조바심에 머물던 내 마음이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아직도 정신과 육체가 청년처럼 젊으신 그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나도 새로운 용기와 각오가 생겨나는 것 같았다.


20171006_090646.jpg 프랑스에서 온 82세 할머니 순례자 - 뒷모습의 위풍이 당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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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메마른 대지를 흐르는 카스티야 수로


한참을 흙먼지와 씨름했을까. 저 멀리 황토색 대지와는 이질적인 푸른 띠가 보이기 시작했다. 스페인 근대 토목공학의 걸작, 카스티야 수로(Canal de Castilla)'였다.

20171006_144922520.jpg Canal de Castilla



메마른 메세타 땅을 적셔주는 생명의 물줄기, 까스띠야 수로. 하기야 높은 산이 없는데 어디 큰 물길이 있겠는가? 18세기 중반에 토목작업이 시작되어 거의 100년 만에 완공되었다. 애초에는 광활한 까스띠야 들녘에서 나는 곡물들을 바다로 실어 나르는 운하를 목적으로 건설되었지만 지금은 관개수로 혹은 여행과 휴식의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까스띠야-레온 자치구 안에 부르고스, 빨렌시아, 발라도리드 세 지방을 거치며 흐르는 207km에 이르는 장대한 물길이다.


수로를 따라 빽빽하게 들어선 방풍림이 만들어낸 그늘 터널. 그곳으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은 땀에 젖은 등줄기를 식혀주며 "이것이 천국의 맛"임을 실감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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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메세타 들녘에 내리는 가을


2017년 10월 6일, 한국은 이미 추석이 지난 시점. 부르고스(Burgos)를 떠나 올 때쯤부터 여기 메세타 광야에도 가을의 숨결이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아침 알베르게를 나설 때의 차가운 공기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해서 빨래하고 씻고 나면 얼마 안 있어 곧 마당에 드리우는 늦은 오후의 서늘한 그늘.


아 - 서울을 떠나 올 때는 아직 더운 여름이었던 거 같은데 불과 반달 만에 계절이 바뀌고 있었다. 나의 여정은 이제 어디쯤 가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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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의 ‘가을날’>

지금이 그 계절의 그 시점이다.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이제 뜨거운 여름은 지나가게 하소서.

해시계 위에 당신의 긴 그림자를 드리우시고,

추수가 끝난 들녘에는 바람을 놓아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이 영글도록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빛을 주시어

그것들이 더욱 농익게 하시고,

풍성해진 포도송이 속에도 마지막 단맛이 스며들게 하소서.

....“


4) 벽에 적힌 진리: "고통은 필연이나, 괴로움은 선택이다"


평화로운 운하를 따라 걷다 보면 거대한 수문(Lock)을 마주하게 된다. 물의 높낮이를 조절하여 배가 지나가게 하는 이 구조물은, 마치 순례자의 감정을 조절해 주는 장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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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낡은 콘크리트 벽면은 앞서간 수많은 순례자가 남긴 흔적들로 빼곡했다. "당신은 요정을 믿나요?" 같은 엉뚱하고 귀여운 낙서들이 피식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이 장소를 거쳐 간 수많은 이들의 가슴에 가장 깊게 박힌 문장은 아마도 벽면 뒤에 숨겨진 바로 이 글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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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 DOLOR ES INEVITABLE, EL SUFRIMIENTO ES OPCIONAL" (고통은 필연이지만, 괴로움은 선택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달리기에 대해 말할 때 인용해서 유명해진 말이기도 하지만, 2주 넘게 걷고 있는 지금 이 순간만큼 이 말이 절실하게 다가온 적은 없었다. 하루 종일 걷다 보면 물집이 잡히고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육체적 고통(Pain)'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필연적인 손님이다.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것 때문에 마음까지 괴로워할지(Suffering) 말지는 오롯이 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


나는 고통 속에 있지만, 괴로워하지 않기로 했다. 벽에 적힌 저 한 문장이 오늘 하루, 아니 남은 여정 전체를 관통하는 깨달음을 주었다.


5) 프로미스타의 완벽한 휴식


천국의 바람과 삶의 교훈을 품고 도착한 오늘의 목적지 '프로미스타(Frómista)'.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로마네스크 양식의 정수라 불리는 '산 마르틴 교회(Iglesia de San Martín de Tours)'가 단단하고 균형 잡힌 모습으로 나를 반겼다.


화려하지 않지만 완벽한 대칭을 이룬 교회의 모습은 오늘 내가 배운 교훈과 닮아 있었다. 고통과 기쁨, 삶과 죽음의 균형.


알베르게에 짐을 풀고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들이켰다. 그러고 나서 오늘 걷는 길의 행복감을 더 연장하기 위해 이른 밤에 몇몇 동행들과 같이 마을 레스토랑에 가서 뻬레그레노에게는 사치에 가까운 아주 근사한 저녁을 함께 먹으며 담소를 나누었다.


내 발의 물집은 여전히 아프다(Pain). 하지만 나는 지금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괴로움 대신 맥주와 와인 그리고 달콤한 휴식을 선택했으니까. 메세타의 한복판, 몸은 고단해도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볍고 충만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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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내 생애 어느 때보다 가장 행복한 하루


어림컨데 이제 까미노 일정의 반쯤(17일째)을 지나온 것 같다. 불이 꺼지고 무거운 몸을 누이자 서늘한 밤바람이 살짝 열어놓은 마음의 문틈으로 헤집고 들어와 나른한 여수가 살며시 스며들었다.


오늘, 카스트로헤리즈에서 프로미스타 (Fromista)까지 짧지 않은 약 25km의 길을 걸었지만 지금까지 걸은 날들 중에 육체와 마음이 가장 안온한 하루였다. 출발 일주일쯤 지나서부터 끈질기게 나를 괴롭히던 양발 뒤축의 물집과 통증이 거의 1주일 만에 나아져 아침에 출발하는 발걸음이 한 결 가벼웠기 때문이다. ‘O Lord, no more blisters, only blessings~!


보아디야 델 까미노(Boadilla del Camino)에서 프로미스타로 오는 길, 까스띠야 운하의 유유히 흐르는 물길과 키 높은 방풍림 그늘아래 내리는 신선한 바람은 땀 배인 옻 속을 스며들면서 영혼까지 청결하게 씻어주고 있었다.


메세타 들판 위에도 정겨운 가을이 내리고 나는 내 생애 어느 때보다 가장 행복한 하루를 걸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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