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스러웠지만 행복했던 순례의 기록
:까미노 제15일 차(Hornillos del Camino to Castrojeriz, 19.5 km; Oct. 5, 2017)
순례 15일 차. 이제는 눈을 뜨면 걷는 것이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오르니요스를 떠나 카스트로헤리스로 향하는 19.5km의 길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메세타(Meseta)의 품 속이다.
그늘 한 점 허락하지 않는 광활한 평원. 태양은 머리 위에서 이글거리고, 흙먼지 날리는 길은 지평선 끝까지 뻗어있다. 이 적막한 길을 걷다 보면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에 빠진다. 오직 들리는 것은 자박거리는 내 발소리와 거친 숨소리뿐.
그때, 황량한 대지 위에 거짓말처럼 작은 쉼터들이 나타난다. '산 볼(San Bol)'과 '온타나스(Hontanas)'. 특히 움푹 파인 지형에 숨겨진 듯 자리 잡은 온타나스는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 같다. 메마른 목을 축이고 잠시 땀을 식혀주는 이 작은 마을들이 없었다면, 메세타의 태양 아래 순례자들은 말라버린 잎사귀처럼 바스러졌을지도 모른다.
오후 2시쯤, 오늘의 목적지인 '카스트로헤리스(Castrojeriz)'에 도착했다. 저 멀리 언덕 위 고성(古城)의 폐허가 내려다보는 이 마을은 중세의 시간을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내 발걸음을 재촉한 것은 유적지가 아닌, 한국인 순례자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소문 때문이었다.
"카스트로헤리스에 가면 비빔밥을 주는 알베르게가 있다."
노란 담벼락이 인상적인 알베르게. 이곳의 안주인은 까미노를 걷으러 왔다가 스페인 남자와 사랑에 빠져 이곳에 정착했다는, 영화 같은 사연을 가진 한국 분이었다. 체크인을 하며 미리 저녁 식사를 예약했다. 메뉴는 비빔밥. 가격은 단돈 5유로. 기대감에 침이 입안에 저절로 고였다.
짐을 풀고 매일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빨래. 알베르게 마당의 빨랫줄에 옷들을 널었다. 스페인의 강렬한 햇살은 젖은 옷뿐만 아니라 눅눅해진 마음까지 바싹 말려줄 만큼 뜨겁다. 바람에 나부끼는 빨래들을 바라보며 시원한 맥주(Cerveza) 한 잔을 들이켰다.
샤워를 마치고 나른한 오후의 햇살 아래 맥주 한 모금을 넘기는 순간. 이보다 더 완벽한 행복이 있을까. 2주간의 고생을 보상받는 듯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소확행)이 밀려왔다.
드디어 기다리던 저녁 시간. 식당 테이블 위로 커다란 보울(Bowl)에 담긴 비빔밥이 등장했다. 그것도 미소된장국과 계란후라이까지 구색을 맞추어.
하얀 쌀밥 위에 정갈하게 올려진 당근, 호박, 계란 프라이, 그리고 붉은 고추장. 스페인 시골 마을에서 마주한 완벽한 한국의 색(色)이었다.
한 숟가락 크게 비벼 입안에 넣는 순간, 탄성이 절로 나왔다. 단순히 배를 채우는 음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난 2주간 빵과 파스타로 버텨온 내 위장에 대한 위로이자, 멀리 떨어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주는 '소울 푸드'였다. 너무나 맛있어서, 그리고 행복해서 울컥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날 동석한 한국인 젊은 목사분은 이 알베르게에서 이 비빔밥 한 그릇을 먹기 위해 오늘 40km 이상의 거리를 걸어왔다고 했다.
어느덧 일정의 절반을 소화했다. 이제 내 몸과 마음은 이 길 위의 생활에 완벽히 적응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배낭을 꾸리고, 걷고, 먹고, 자는 단순한 삶이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진다. 후반부 여정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사라지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기대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단 하나, 나의 트레킹화와 발은 아직도 불협화음을 내고 있다. 걷는 내내 크고 작은 트러블이 생기고, 물집은 아물다 다시 잡히기를 반복한다.
"장거리 트레킹의 성패는 결국 신발에 달려있다."
이 단순한 진리를 뼈저리게 체험 중이다. 아무리 체력이 좋아도, 발이 편하지 않으면 매 순간이 고통이다. 다음 생에 다시 까미노를 온다면, 그때는 세상에서 내 발과 가장 친한 신발을 신고 오리라 다짐하며 잠자리에 든다.
내일은 또 어떤 길이, 어떤 인연이 기다리고 있을까. 배부르고 등 따스한 오늘 밤, 메세타의 별들도 유난히 밝게 빛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