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미노 데 산티아고의 추억에(15)

:고통스러웠지만 행복했던 순례의 기록

by 디본

15. 메세타, 메세타! - 그 황홀한 고독(4)

: 까미노 제14일 차(Burgos to Hornillos del Camino, 20.9 km; Oct. 4, 2017)



1) 동키 서비스, 자존심을 내려놓다


10월 4일 수요일 아침 7시. 부르고스의 아침 공기는 상쾌했지만, 내 몸은 그렇지 못했다. 어제 엘 시드의 기백을 느끼며 걸었던 대가는 혹독했다. 누적된 피로가 어깨를 짓누르고, 발바닥의 통증은 이미 한계치를 넘어선 듯했다.


결국 나는 순례자의 마지막 자존심이라 불리는 배낭을 내려놓기로 했다. '동키 서비스(Donkey Service)'. 배낭을 차로 미리 목적지까지 보내주는 서비스다. "JacoTrans" 태그가 붙은 내 배낭이 차에 실려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묘한 죄책감과 해방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20171004_072705.jpg 알베르게 마다 체크인 카운터에 있는 Donkey Service Tag : 몸이 말을 안들을 때 이용


"그래, 짐을 지고 걷는 것만이 순례는 아니다. 때로는 짐을 내려놓을 줄 아는 용기도 필요한 법이다."


가벼워진 어깨로 다시 길 위에 섰다. 오늘은 오직 내 몸뚱어리 하나만 책임지면 된다.


2) 지성의 숲, 부르고스 대학을 지나


부르고스를 빠져나가는 길은 뜻밖의 선물 같았다. 도심의 소음 대신, '부르고스 대학(Universidad de Burgos)'의 울창한 숲길이 나를 맞이했다. 낙엽이 깔린 고요한 캠퍼스 길을 걸으며, 나는 잠시 순례자가 아닌 산책자가 된 기분을 만끽했다.


대학 담벼락에 걸린 'Verano UBU(부르고스 대학 여름 강좌)'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젊음과 지성이 숨 쉬는 이곳을 지나며, 나는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야말로 인생을 배우는 가장 거대한 학교가 아닐까 생각했다.


20171004_082952.jpg Universidad de Burgos: 오랜 역사를 가진 명문대학이다


3) 다시 메세타, 뜨거운 태양과의 독대


대학 캠퍼스를 벗어나자마자, 길은 기다렸다는 듯 본색을 드러냈다. 어제의 화려한 문명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다시 끝도 없는 메세타(Meseta) 대평원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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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 한 점 없는 황량한 벌판. 태양은 정수리를 향해 작열했고, 하얀 자갈길은 눈이 시릴 정도로 반짝였다. 짐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걸음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지평선과 나 사이에 놓인 것은 오직 타들어 가는 태양과 거친 숨소리뿐이었다.


20171004_120228.jpg 10월인데도 바로 머리위로 따라 오는 태양은 여름처럼 뜨겁다


중간에 만난 작은 마을 '타르다호스(Tardajos)'와 '라베 데 라스 칼사다스(Rabé de las Calzadas)'. 길가에 천막을 친 'Mini Market'에서 바게트 샌드위치와 시원한 음료수로 타는 목을 축였다. 꿀맛 같은 휴식이었지만, 다시 일어나 걷는 것은 더욱 큰 고역이었다.


20171004_101311.jpg Bar Mini Market에서 오손도손 식사도 하고 담소도 나누고: 재충전의 시간


4) 돌무덤 위의 낡은 트레킹화


끝이 없을 것 같은 고행길 중간, 길가에 쌓인 작은 돌무덤 하나가 발길을 잡았다. 그 위에는 누군가 신고 걸었을 낡은 트레킹화 한 켤레와 양말, 그리고 헤진 스카프가 버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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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가슴이 뭉클해졌다. 누군가 여기까지 오기 위해 흘렸을 땀과 눈물, 그리고 고통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신발. 더 이상 신을 수 없을 만큼 닳아버린 저 신발을 벗어두고 떠나면서, 그 순례자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아마도 그는 신발과 함께 자신의 고통과 집착, 그리고 과거의 무거운 짐들을 이곳에 내려놓았으리라. 오늘 아침 배낭을 차에 실어 보낸 나처럼, 그 또한 인생의 무게를 덜어내고 더욱 가벼워진 영혼으로 다시 길을 떠났을 것이다.


돌무덤 위에 작은 돌 하나를 얹으며 기도했다. 저 낡은 신발의 주인에게,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고통과 싸우며 걷고 있는 모든 순례자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5) 고행의 끝, 오르니요스


오후가 되어서야 목적지인 '오르니요스 델 카미노(Hornillos del Camino)'에 도착했다. 메세타 평원 한가운데 푹 꺼진 분지처럼 자리 잡은, 작고 고요한 마을.


20171004_131202.jpg Hornillos del Camino


미리 도착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배낭을 생각하니 반가움이 앞섰다. 오늘은 비록 짐을 지지 않았지만, 마음속에 짊어지고 있던 보이지 않는 짐들을 저 뜨거운 메세타의 태양 아래 조금은 태워버린 것 같다.


몸은 힘들었지만, 영혼은 어제보다 조금 더 단단해진 느낌이다. 고통 없이는 영광도 없고(No Pain, No Glory), 비워내지 않으면 채울 수도 없다는 것을, 오늘 메세타의 바람이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20171004_211224.jpg Albergue 담벼락에서 바라 본 둥근 달, 밝은 달, 쓸쓸한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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