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미노 데 산티아고의 추억에(14)

:고통스러웠지만 행복했던 순례의 기록

by 디본

14. 메세타, 메세타! - 그 황홀한 고독(3)

: 까미노 제13일 차(Agés to Burgos, 22.0 km; Oct. 3, 2017)



1) 원시의 기억, 아타푸에르카를 걷다


10월 3일 화요일, 순례 2주째가 마무리되는 아침이다. 아헤스를 떠나 붉은 흙길을 걷다 보니 거대한 입간판 하나가 순례자의 발길을 멈춰 세운다. '아타푸에르카(Atapuerca) - 인류의 유산'.


20171003_081317.jpg Age's를 떠나 다시 대평원으로


20171003_081950.jpg Atapuerca: 인유의 유산


이곳은 약 100만 년 전, 유럽 최초의 인류 조상인 '호모 안테세소르(Homo antecessor)'의 화석이 발견된 곳이다. 그러니 나는 지금 단순한 스페인의 시골길이 아니라, 인류 역사의 가장 깊은 시원(始原) 위를 걷고 있는 셈이다. 수백만 년 전, 이 거친 돌밭길을 맨발로 뛰어다녔을 원시 인류의 숨결이 발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듯하다.


20171003_090903.jpg 돌밭길이 걷는 발에 가장 무리가 된다.


20171003_091035.jpg 언덕 정상에 서 있는 또 누군가의 십자가 무덤


아타푸에르카 마을을 지나자 길은 거친 돌밭으로 변했다. 울퉁불퉁한 돌들이 발목을 위협하지만, 묵묵히 한 걸음씩 내디딘다. 언덕 정상에 우뚝 선 거대한 나무 십자가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순례자들을 맞이한다. 이곳에 돌 하나를 얹으며, 나는 내 안의 원시적인 생명력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2) 엘 시드의 도시, 부르고스 입성


거친 돌밭과 고요한 평원을 지나자, 저 멀리 문명의 냄새가 풍겨오기 시작했다. 카스티야 이 레온(Castilla y León) 지방의 역사적 수도이자, 영웅 '엘 시드(El Cid)'의 고향인 부르고스(Burgos)다.


20171003_142805.jpg 드디어 대도시 Burgos!


20171003_191842.jpg Burgos 광장


20171003_192705.jpg 흙길만 걷던 발이 대도시로 진입하면서 지나야 하는 아스팔트길이 꽤 고통스럽다.



도시 입구는 생각보다 길고 지루했다. 공장 지대와 현대적인 건물들을 한참 지나서야 비로소 부르고스의 심장부에 닿을 수 있었다. 도시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웅장했다. 아르란손(Arlanzón) 강을 따라 늘어선 고풍스러운 가로수길, 그리고 그 끝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엘 시드 기마상'. 칼을 높이 쳐들고 망토를 휘날리는 그의 모습에서, 잃어버린 국토를 되찾으려 했던 중세 기사의 뜨거운 기백이 느껴졌다.




bronze-monument.jpg?w=700&h=400&s=1 Monumento_al_Cid_Campeador: www.tripadvisor.co.kr/Attraction_Review-g187443-d13480754-Review



3) 고딕의 걸작, 부르고스 대성당


그리고 마침내 마주한 '부르고스 대성당(Catedral de Burgos)'.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첨탑과 정교한 조각들. 인간이 돌로 빚어낼 수 있는 예술의 극치를 보는 듯했다. 아침에 보았던 아타푸에르카의 거친 돌무더기와, 오후에 마주한 대성당의 정교한 돌조각. 같은 '돌'이지만, 그 사이에 흐르는 100만 년의 시간과 인류의 진보가 경이롭게 다가왔다. 오늘 하루, 나는 원시 인류의 동굴에서 시작해 고딕 문명의 정점까지, 타임머신을 타고 인류사를 관통하는 여행을 한 기분이다.


burgos-cathedral-15.jpg 부르고스 대성당(Catedral de Burgos): https://www.thecrowdedplanet.com/things-to-do-burgos/



4) 2주간의 피로를 씻어준 상하이의 맛


화려한 도시의 밤거리, 순례자의 허기를 달래줄 곳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한 '상하이(Shanghai) 중식당'. 2주 내내 빵과 하몽, 치즈에 지쳐있던 내 위장에 따뜻한 국물과 밥알이 들어가는 순간, 온몸의 세포가 깨어나는 듯했다.


20171003_194329.jpg Restaurante Chino Shanghai



익숙한 젓가락질과 입안 가득 퍼지는 볶음밥의 풍미. 비록 스페인 한복판이지만, 이 한 끼 식사가 주는 위로는 고향의 그것 못지않았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나오니 부르고스의 밤공기가 한결 부드럽게 느껴진다.


내일부터는 다시 문명을 뒤로하고 광활한 메세타 평원의 깊은 속살로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이 화려한 도시가 주는 안락함과 문명의 이기에 기꺼이 취해보고 싶다. 인류의 시작과 끝을 모두 품은 도시, 부르고스의 밤이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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