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스러웠지만 행복했던 순례의 기록
:까미노 제20일 차(Bercianos del Real Camino to Reliegos), 20.4km; Oct. 10, 2017)
10월 10일 화요일.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베르시아노스의 알베르게를 나선다. 동트기 전의 푸르스름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온다.
어제 걸었던 '왕의 길'은 오늘도 계속된다. 끝없이 펼쳐진 평야 위로, 마치 자로 잰 듯 반듯하게 뻗은 가로수길. 그 길 끝에서 서서히 떠오르는 태양이 메세타의 대지를 붉게 물들인다. 거대한 스프링클러가 실루엣처럼 서 있는 풍경은 왠지 모를 비장미마저 자아낸다.
아침 식사를 위해 들른 길가의 작은 식당 겸 알베르게. 바깥 벽에 칠판글씨로 "얼큰한 신라면 먹구가영!" 한국어로 적힌 애교섞인 문가가 눈에 들어와 반가운 마음에 피식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압도적인 풍경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벽면을 가득 메운 형형색색의 포스트잇들.
한국어, 영어, 스페인어... 전 세계에서 온 수많은 순례자가 남긴 각양각색의 사연들이 빼곡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어." "꼭 완주하자!" "사랑하는 가족에게..." "라면 먹고 가요!"
자세히 보니 그 중에 Rumi 라는 순례자가 쓴 메모, 'What you are seeking is seeking You'라는 선문답같은 글귀도 있었다.
작은 종이 한 장 한 장에 담긴 간절함과 응원들이 모여 거대한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었다. 나도 그들 틈에 섞여 잠시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따뜻한 커피 한 잔으로 위로를 받는다.
다시 길을 나섰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길 위에서 먼저 떠난 순례자의 흔적을 마주했다.
길가 풀섶에 세워진 작은 십자가와 그 아래 놓인 사진 한 장. 아마도 생전의 모습이리라. 배낭을 메고 환하게 웃고 있는 그의 사진 앞에서 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는 비록 산티아고 대성당에는 닿지 못했지만, 이 길 위에서 영원한 안식을 찾았을 것이다. 십자가 앞에 놓인 장미 한 송이가 메마른 흙길 위에서 유난히 붉게 빛났다.
끝없는 직선의 길을 걷고 또 걷다, 드디어 마을 입구에 다다랐다. 그런데 아차, 긴장이 풀렸는지 길을 잃고 말았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지나가던 현지인에게 길을 물었다. 말은 잘 통하지 않았지만, 손짓과 눈빛으로 건네는 따뜻한 친절 덕분에 무사히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길을 잃는다는 것, 그것은 때로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감사함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오후 3시 반, 오늘의 목적지인 렐리에고스(Reliegos)의 Albergue Municipal에 도착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배낭을 풀고, 씻고, 빨래를 널고,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들이켜는 것. (사진 6)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하고 의자에 축 늘어진다. 이 단순한 반복이 주는 평온함이야말로 까미노가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저녁 6시, 근처 마트에서 사 온 간단한 음식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배가 부르니 나른함이 밀려올 즈음, 숙소 안뜰에서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어느 순례자가 잡은 기타 선율이 밤공기를 타고 흐른다. 화려한 기교는 없지만, 진심을 담은 연주가 지친 순례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낯선 이들이 하나 둘 모여 앉아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밤.
노곤한 몸 위로 별빛과 음악이 쏟아져 내리고, 나는 그 포근함 속에서 스르르 잠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