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미노 데 산티아고의 추억에(21)

:고통스러웠지만 행복했던 순례의 기록

by 디본

21. Post-It, 수만 가지 사연, 그리고 밤을 채우는 기타 선율

:까미노 제20일 차(Bercianos del Real Camino to Reliegos), 20.4km; Oct. 10, 2017)



1) 여명 속을 걷는 아침


10월 10일 화요일.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베르시아노스의 알베르게를 나선다. 동트기 전의 푸르스름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온다.


어제 걸었던 '왕의 길'은 오늘도 계속된다. 끝없이 펼쳐진 평야 위로, 마치 자로 잰 듯 반듯하게 뻗은 가로수길. 그 길 끝에서 서서히 떠오르는 태양이 메세타의 대지를 붉게 물들인다. 거대한 스프링클러가 실루엣처럼 서 있는 풍경은 왠지 모를 비장미마저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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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0_085637807.jpg Santiago de Compostella 까지 이제 340.5 km ! 남은 거리 이제 340.5 km!



2) '얼큰한 신라면' 그리고 수만 가지 사연이 머무는 곳


아침 식사를 위해 들른 길가의 작은 식당 겸 알베르게. 바깥 벽에 칠판글씨로 "얼큰한 신라면 먹구가영!" 한국어로 적힌 애교섞인 문가가 눈에 들어와 반가운 마음에 피식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압도적인 풍경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벽면을 가득 메운 형형색색의 포스트잇들.


20171010_085749820.jpg 주인장이 한국분인가? 하고 들어갔더니 그건 아니었다.


한국어, 영어, 스페인어... 전 세계에서 온 수많은 순례자가 남긴 각양각색의 사연들이 빼곡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어." "꼭 완주하자!" "사랑하는 가족에게..." "라면 먹고 가요!"

자세히 보니 그 중에 Rumi 라는 순례자가 쓴 메모, 'What you are seeking is seeking You'라는 선문답같은 글귀도 있었다.


작은 종이 한 장 한 장에 담긴 간절함과 응원들이 모여 거대한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었다. 나도 그들 틈에 섞여 잠시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따뜻한 커피 한 잔으로 위로를 받는다.


20171010_085948174.jpg 수 많은 나라에서 온 각양각색 순례자들의 사연을 담은 Post-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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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오늘도 길 위의 별을 만나다


다시 길을 나섰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길 위에서 먼저 떠난 순례자의 흔적을 마주했다.


길가 풀섶에 세워진 작은 십자가와 그 아래 놓인 사진 한 장. 아마도 생전의 모습이리라. 배낭을 메고 환하게 웃고 있는 그의 사진 앞에서 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20171010_111813346.jpg 다시 어느 길위의 망자를 기리는 십자가 돌무덤


그는 비록 산티아고 대성당에는 닿지 못했지만, 이 길 위에서 영원한 안식을 찾았을 것이다. 십자가 앞에 놓인 장미 한 송이가 메마른 흙길 위에서 유난히 붉게 빛났다.


4) 길을 잃어도 괜찮아


끝없는 직선의 길을 걷고 또 걷다, 드디어 마을 입구에 다다랐다. 그런데 아차, 긴장이 풀렸는지 길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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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스러운 마음에 지나가던 현지인에게 길을 물었다. 말은 잘 통하지 않았지만, 손짓과 눈빛으로 건네는 따뜻한 친절 덕분에 무사히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길을 잃는다는 것, 그것은 때로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감사함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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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렐리에고스의 오후, 그리고 마음을 위로해 준 작은 음악회


오후 3시 반, 오늘의 목적지인 렐리에고스(Reliegos)의 Albergue Municipal에 도착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배낭을 풀고, 씻고, 빨래를 널고,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들이켜는 것. (사진 6)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하고 의자에 축 늘어진다. 이 단순한 반복이 주는 평온함이야말로 까미노가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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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6시, 근처 마트에서 사 온 간단한 음식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배가 부르니 나른함이 밀려올 즈음, 숙소 안뜰에서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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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례자가 잡은 기타 선율이 밤공기를 타고 흐른다. 화려한 기교는 없지만, 진심을 담은 연주가 지친 순례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낯선 이들이 하나 둘 모여 앉아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밤.

노곤한 몸 위로 별빛과 음악이 쏟아져 내리고, 나는 그 포근함 속에서 스르르 잠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