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스러웠지만 행복했던 순례의 기록
:까미노 제21일 차(Reliegos to Leon), 219.7 km; Oct. 11, 2017)
10월 11일 수요일. 렐리에고스의 아침은 여전히 메세타의 광활함 속에 잠겨 있었다. 레온까지 남은 거리는 약 20km. 이제 이 지긋지긋하면서도 정들어버린 황무지와도 작별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붉은 흙길 위로 아침 햇살이 쏟아졌다.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오늘이면 끝이다'라는 안도감과 '벌써 여기까지 왔나' 하는 대견함이 교차했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지평선 너머로 거대한 도시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까미노 여정 중 세 번째로 만나는 대도시, 레온(León)이다.
도시 입구의 "Provincia de León" 표지판이 마치 개선문처럼 나를 맞이했다. 흙먼지 가득했던 신발이 아스팔트를 밟는 순간, 나는 비로소 문명 세계로 복귀했음을 실감했다.
오후 12시경, 레온 시내에 도착했다. 수많은 순례자와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거리, 고풍스러운 건물들 사이를 걷는 기분은 마치 시간 여행자가 되어 미래 도시에 불시착한 듯 낯설면서도 설렜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그동안 쌓인 피로를 풀고, 남은 여정을 위한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해 하루를 온전히 쉬어가기로 했다. 북적이는 공용 알베르게 대신 시내에 있는 'Leon Hostel'을 예약했다.
낯선 이들의 코골이와 뒤척임 없이, 오직 나만의 공간에서 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거대한 사치를 누리는 기분이었다. 짐을 풀고 뜨거운 물로 오랫동안 샤워를 했다. 씻겨 내려가는 땀방울과 함께 메세타의 고단함도 하수구로 흘러들어갔다.
개운해진 몸으로 도시 탐방에 나섰다. 레온은 화려했다. 스페인의 전설적 건축가 가우디(Gaudi)가 설계한 '카사 데 로스 보티네스(Casa de los Botines)'와 웅장한 '레온 대성당(Catedral de León)'의 스테인드글라스 빛이 눈을 사로잡았다.
개운해진 몸으로 도시 탐방에 나섰다. 레온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천재들의 숨결이 공존하는 도시였다.
가장 먼저 발길이 닿은 곳은 '카사 데 로스 보티네스(Casa de los Botines)'. 바르셀로나가 아닌 곳에 지어진 가우디의 희귀한 초기 걸작이다. 마치 중세의 요새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곳은 직물 상인들을 위한 창고 겸 아파트였다고 한다.
건축 당시, 레온 사람들은 "기초가 부실해 금방 무너질 것"이라며 가우디를 비웃었다고 한다. 하지만 가우디는 보란 듯이 혁신적인 설계로 이 견고한 성을 완성해 냈다. 정문 위, 용을 무찌르는 성 게오르기우스(상트 조르디)의 조각상처럼, 세상의 편견과 싸워 이겨낸 가우디의 용기가 건물 곳곳에서 느껴졌다.
그다음 향한 곳은 '레온 대성당(Catedral de León)'. 일명 '풀크라 레오니나(Pulchra Leonina, 아름다운 레온의 여인)'라 불리는 고딕 건축의 정수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돌로 지은 건물이 아니라, 마치 빛으로 지은 집 같았다. 벽면을 최소화하고 무려 1,800제곱미터에 달하는 스테인드글라스로 채운 이곳은 말 그대로 **'빛의 집(House of Light)'**이었다. 13세기 중세의 장인들이 빚어낸 붉고 푸른 빛들이 쏟아져 내리며, 20일간 메세타의 땡볕에 그을린 내 영혼을 신비로운 색채로 씻어주는 듯했다.
가우디의 혁신과 대성당의 빛으로 영혼을 채웠으니, 이제는 현실의 고통을 해결할 차례였다. 나에게 가장 절실했던 또 하나의 성지, 스포츠 용품점으로 향했다.
그동안 내 발과 끊임없이 불협화음을 냈던 낡은 트레킹화. 가우디가 세상의 편견을 깨고 새로운 건축을 시도했듯, 나 역시 과감한 변화가 필요했다. 가게에 들어가 진열된 신발들을 꼼꼼히 살폈다. 그리고 운명처럼 내 눈에 들어온 녀석, '살로몬(Salomon)' 트레킹화.
100유로가 넘는 거금이었지만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이것은 단순한 신발이 아니라, 나를 산티아고까지 데려다줄 '새로운 날개'*였다.
새 신발 끈을 단단히 매고 레온 시내를 시승하듯 걸어보았다. 발을 감싸는 탄탄한 쿠션감, 바닥에 착 감기는 접지력.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옳다, 이거다!"
발바닥에서 전해오는 짜릿한 전율. 이 신발과 함께라면 남은 300km도, 아니 그 이상도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레온 대성당의 찬란한 빛처럼, 막막했던 후반부 여정에 대한 두려움이 '할 수 있다'는 강한 확신과 희망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해가 지고 거리에 하나둘 가로등이 켜졌다. 노천카페에 앉아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오늘 나는 단순히 도시를 구경하고 쇼핑을 한 것이 아니다. 지친 몸을 재정비하고, 낡은 것을 버리고 새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순례의 2막을 열 준비를 마친 것이다.
새로운 신발, 그리고 새로운 마음가짐. 내일 다시 길 위에 설 나는 어제의 나와는 분명 다를 것이다. 레온의 밤이 깊어갈수록, 앞으로의 여정이 다시 기다려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