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스러웠지만 행복했던 순례의 기록
: 까미노 제32일 차 (Palas de Rei to Ribadiso, 26.0 km; Oct 22, 2017)
10월 22일 일요일. 팔라스 데 레이를 나서는 아침은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비가 올 듯 말 듯 한 흐린 날씨였지만, 오히려 공기는 차갑고 상쾌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걷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씨.
갈리시아의 숲은 아침 안개를 머금어 더욱 신비로웠다. 유칼립투스 나무들이 뿜어내는 알싸한 향기가 콧속을 파고들었고, 촉촉한 흙길을 밟는 발소리만이 고요한 숲을 울렸다.
중간 기착지인 멜리데(Melide)는 활기가 넘쳤다. 갈리시아 문어 요리(뽈보)로 유명한 이곳에서 고소한 냄새가 진동했지만, 오늘의 목적지는 조금 더 특별한 곳이기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멜리데를 지나면서 숲은 더욱 울창해졌고, 오르락내리락하는 구릉지대를 넘을 때마다 작은 시내(Arroyo) 들을 건넜다. 수많은 물줄기가 모여 강이 되고, 그 강이 바다로 흐르듯, 수많은 순례자가 산티아고라는 하나의 바다를 향해 흐르고 있었다.
오후가 되자 하늘이 심상치 않게 어두워지더니, 목적지를 얼마 남겨두지 않고 후드득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후 4시경, 빗줄기를 뚫고 내리막길을 내려오자 숲 속에 숨겨진 보석 같은 마을 리바디소(Ribadiso)가 나타났다.
마을 입구에는 중세 시대부터 순례자들을 맞이했던 오래된 돌다리가 이소(Iso) 강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맑은 강물 소리와 빗소리가 어우러진 리바디소는 마치 동화 속 요정이 살 것 같은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이곳의 알베르게는 15세기 순례자 병원을 개조한 곳으로, 고풍스러운 돌건물이 주는 아늑함이 비에 젖은 몸을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짐을 풀고 샤워를 마치자,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그리고 창밖으로 믿을 수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먹구름이 물러간 서쪽 하늘이 붉게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급히 밖으로 나갔다. 방금 내린 비로 촉촉하게 젖은 돌다리와 풀잎들이 석양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였다. 하늘의 붉은 노을이 이소 강물 위에 그대로 투영되어, 강물마저 황금빛으로 흐르고 있었다.
낮 동안의 회색 구름과 오후의 빗줄기는 아마도 이 찬란한 저녁을 보여주기 위한 자연의 '빌드업'이었나 보다.
리바디소(Ribadiso da Baixo)는 아르수아(Arzúa)라는 큰 마을 직전에 있는 아주 작은 마을이다. 많은 순례자가 편의시설이 많은 아르수아까지 더 가지만, 순례길을 잘 아는 사람들은 운치 있고 평화로운 리바디소에서 일부러 머문다는데 나도 오늘 선택을 잘한 것 같다.
강가에 앉아 발을 담그고 멍하니 노을을 바라보았다. 산티아고까지는 이제 불과 40여 km. 도시의 소음도, 북적이는 인파도 없는 이 작은 강변 마을에서 나는 순례의 마지막을 차분히 준비한다.
구름 낀 아침도, 비 내리는 오후도, 결국엔 이렇게 아름다운 노을로 마무리된다는 것. 우리네 인생도, 이 길고 긴 순례길도 결국은 아름다운 끝을 향해 가고 있음을 리바디소의 강물은 말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