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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렇구나 Sep 16. 2020

나의 재테크 선생님

"올키(올케)야, 늙어 돈 없으모 똥카마(똥보다) 더럽데이!"

내 인생에 그분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 그분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과연 지금의 나는 있을까, 상상만 해도 아찔하게 만드는 그런 소중한 분 가슴에 묻어두고 계신가요? 저에겐 예닐곱 분쯤 있는 것 같아요. 썩 내세울 건 없지만 그래도 이만큼 살게 돼 감사하다, 다 그분들 덕분이다, 이런 마음을 갖게 하는 분 말이에요.


진심으로 제가 재테크 선생님으로 인정하는 사촌 형님도 그중 한 분입니다. 올해 일흔 넷인가 그러는데요. 남편의 고종 사촌 누님이세요. 30 년 전쯤 그분이 살고 계신 김해로 남편이 발령을 받은 게 인연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스물일곱이었고 형님은 마흔다섯이었으니 지금 제 나이보다 열세 살이나 젊었을 때였네요.


김해에 살림집을 구할 겸 형님 댁에 인사를 드리러 간 날이었습니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뜨신 밥 냄새가 진동을 하는 겁니다. 바로 그 순간 저는 알아버렸어요. 언제까지고 형님을 존경하고 좋아할 거라는 것을. 낯가림이 심하고 여간해선 곁을 잘 안 주는 저였는데도 그랬어요. 대학 4년에 직장 생활 3년. 서울서 자취하는 내내 집밥이나 엄마 밥이란 소리를 듣기만 해도 목이 멨기 때문이었을까요.


지금 제 나이를 기준으로 당시 사십 중반의 형님은 완전 새댁이나 마찬가진데, 스물일곱인 제 눈엔 어찌 그리 듬직하고 큰 어른처럼 보이던지요.「토지」의 주인공 서희 할머니 윤 씨 부인 같더라고요. 위엄이 있으면서도 속정이 있는 형님을 줄래 줄래 따라다니며 전셋집을 둘러봤지만 제 마음은 이미 형님네 옆 집에 가 있었어요. 3층짜리 상가 주택에 1층 2층은 세 주고 3층에 두 세대가 살게 된 꽤 큰 건물이었는데요, 주인집인 형님댁 말고 전세를 내놓으려는 방 두 칸이 있었거든요.


아무리 뜨신 밥에 감동을 했기로서니 명색이 시누이인데? 두 집 출입문이 기역자 모양으로 딱 붙어 있는 집인데? 하지만 그런 생각 저는 눈곱만큼도 안했 …, 아니 못했어요. 결혼한 여자들 '시'금치도 안 먹는다고 하는 게 무슨 말인지도 모를 만큼 천지 분간도 못했을 때였으니까요.


저보다는 오히려 형님이 얼마나 대략난감이었을지. 나이 들고 철이 나니 깨달아지는 이치를 그때는 정말 몰랐답니다. 입장 바꿔 저 같았으면 사촌 올케에게 전세 줄 리가 없었을 테니까요. 어른 노릇이 얼마나 힘든데 물정 모르는 어린것이랑 한 건물 한 층에서 얼굴 맞대고 살겠어요. 잘해봤자 본전이고 여차하면 얼굴 깎이기 십상이겠잖아요.


결혼 후 1년쯤 살았던 서울 전세방 짐을 싣고 김해로 내려간 날이었습니다. 빠꼼히 들여다볼 뿐 집 안으로 들어올 생각은 않던 형님이 말씀하셨어요.

"올키(올케)야, 니는 니 살림, 내는 내 살림. 니캉내캉 앞으로 우리 쭉 그라고 살자."

넌 너만의 방식이 있을 테니 이삿짐 정리 안 도와주겠다, 우리 서로 간섭하지 말고 살자, 그런 뜻이었던 것 같아요.


냉정하게 밀친 뒤 선을 긋는 느낌이었달까요. 일순 기분이 묘해졌지만 오케이 땡큐. 저야말로 바라던 바 아니었겠습니까? 설령 자리를 깔아준대도 선 넘기 싫어하는 것, 저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타입이다 보니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할밖에요.


열여섯 살 차이 나는 시누이와 올케에겐 공통점이 많았습니다. 비빔밥 양푼을 들고 시도 때도 없이 불쑥 들이닥치지 않는 점. 냉랭한 듯해도 뜨듯한 구석이 많은 점. 베풀 땐 후하게 베풀지만 정나미 떨어질 만큼 셈이 정확한 점. 아, 셈이란 것에 대해 굳이 언급하자면 서울 물을 7년 먹은 저보다 지방 소도시에서 평생 사신 형님이 한 술 더 뜨셨어요.


장마 직전이었을 겁니다. 홍수 지면 채소값 오른다고 형님이 장에 갈 채비를 하시더라고요. 미리 김치 담가 놓고 야채도 사 쟁여야 한다면서요. 백일도 안 된 딸애를 업고 저도 얼른 형님을 따라붙었네요. 그날따라 김밥이 먹고 싶어 당근을 사야 했거든요.


소쿠리에 쌓아둔 500원어치 당근이 어찌나 수북하던지 저는 형님 시장바구니에 몰래 몇 개 넣어드렸어요. 그러고는 잊어버렸는데 다음 날 아침 벨소리가 나더라고요. 형님네 막내아들 손에 250원이 들려 있는 겁니다. 꼭 써야 할 땐 백만 원도 아까워 않고 내줄 수 있는 반면 셈을 가릴 땐 십원도 정확한 걸 좋아하는 저였는데도 무슨 생각을 했게요? "아, 졌다!"였답니다.  


그걸 저는 오래 동행하고 싶을수록 예의를 차려야 한다는 사인으로 받아들였어요. 더더욱 눈치껏 깔끔하게 행동했습니다. 보일러 모터를 거금 들여 바꿔야 했을 때도 형님 몰래 처리했고요. 제가 수더분하게 사람을 사귀는 성격이 못 되다 보니 남편 말고는 일 분도 딸애를 맡길 사람이 없었는데도 단 한 번 형님 손 빌린 적 없었어요. 


남편은 안 도와줬냐고요? 없기야 했겠어요만 모처럼 집에 있 날 우는 애 좀 업고 얼러주라 했다가 이혼할 뻔했는걸요. 때목욕 하러 대중목욕탕 가는 걸 포기할 바에야 형님께 부탁이라도 해보지 그랬냐고요? 아뇨, 애초 그런 도움받을 꿍꿍이로 옆 집으로 이사한 게 아니었는데요, 뭘 ….


특별한 반찬이 있는 날은 형님이랑 제가 함께 밥 먹고 차 마시는 날이었어요. 형님의 재테크 강의를 들을 기회는 주로 그런 때였죠. 숟가락 두 개만 달랑 갖고 신혼살림을 시작하셨다는데, 그 건물 말고도 3층짜리 상가가 하나 더 있는 알부자셨더라고요. 김해평야 너른 벌판 구석구석에 땅도 제법 사둔 형님을 벤치마킹하려고 저는 귀를 쫑긋했습니다.


출판사 월급 얼마 된다고, 재형저축만 겨우 넣고 남은 돈으로 선배 밥 사주고 후배 술 사주기 바빴던 제가 임자를 만난 거죠. 아, 하필 회사가 세종문화회관에서 열 발짝도 안 되는 광화문 뒷골목에 있었거든요. 쪼잔한 것 싫어하는 성격이라 양껏 먹여주니까 선배고 후배고 할 것 없이 종로에 나왔다 하면 연락을 하는 거예요. 참새방앗간 들르듯 세종문화회관 옆 공중전화로요. 심지어 남편 친구들까지도 말입니다.


"신혼 때부터 시누이 시동생 포함해서 식구가 일곱이었다카이. 근데 꼼쟁이(구두쇠) 남편이 날마다 천 원밖에 안 주는 거라. 하루도 안 빼먹고 백 원씩 항아리에 모았다 아이가."


"남들은 빚내서 부산 구포 장날마다 옷 사러 가는데 나는 통장만 늘어놓으면 배가 부른기라."


"십 원짜리 우습게 여기는 인간 치고 부자 되는 거 못 봤데이."


"어차피 나갈 돈은 다 정해져 있어 빼도 박도 못 하는데, 반찬값 아니면 아낄 데가 어딨드노. 쓰고 남은 돈 저축할라치면 저축 몬하고 산데이. 저축부터 한 다음에 남은 돈으로 우짜든동 살아야지."


"올키야, 처음 백만 원만 만들어 봐 보래이. 금방 천만 원 되고 이천 만원 되는 거를 알게 될끼다."


자유로운 영혼 타령이나 해대며 술에 절은 채 광화문 뒷골목을 휘젓고 다녔던 저는 차츰 형님의 애제자가 되어 갔습니다. 그다지 저항이 없었던 건 제가 어느 정도 바탕이 돼 있었 때문 같아요. 친정 엄마도 살림을 아주 규모 있게 사셨거든요.


그렇더라도 형님 보시기엔 제가 한참 멀었다 싶었나 봅니다. 삼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귀에 쟁쟁한 형님의 어록 중 가장 압권이었던 말 어느 날 천둥 치듯 제 귀에 쏟아 부으시더군요.


올키야, 늙어 돈 없으모 똥카마(똥보다) 더럽데이!


그날 이후 저는 재테크 선생님인 사촌 형님 따라쟁이가 되기로 결심했네요. '똥카마 더럽'지 않은 노후를 보내려고 고추장 된장 담그는 법을 배웠고요. 공무원 남편 월급 날이 오면 저축부터 할 만큼 한 다음 남은 돈에 맞춰 살기 시작했습니다. 언제라도 큰돈이 필요할 때 흔쾌히 쓸 수 있으려면 1원도 허투루 여기면 안 된다는 것도 배웠지요.


형님네 전셋집과 결별하고 시에서 분양한 소형 아파트로 입주할 날을 앞둔 즈음이었습니다. 평소엔 그리 돈에 철저하시던 형님이 저희 딸애 입을 코트를 사 주시더라고요. 겨울이었고 아기 옷 중에서 가장 비싼 브랜드였으니 가격이 만만찮았을 텐데요. 역시나 저를 실망시키지 않은 저의 재테크 선생님의 한 말씀.


"올키야, 더러븐(시시한) 거 여러 개 사지 말고 옳은 거 한 개 제대로 사는기 돈 버는기다!"




1년 넘게 집주인과 세입자, 시누이와 올케로 살았다지만 단 한 번 얼굴 찌푸린 적도 서운한 적도 없었던 형님이 요새 부쩍 생각납니다. 입이 쩍 벌어지는 서울 집값 앞에서 윤씨 부인처럼 담력이 큰 형님을 철저히 벤치마킹 못한 회한 때문일까요. 몇 번이나 땅을 사라고 했는데 제가 그것만은 따르지 않았거든요. 욕심 없고 게으른 제 기질 탓인지 원금보장파인 남편 성향 탓인지 저희는 그저 예적금이나 하고 밥이나 먹을 정도면 족하다 여겼던 것 같습니다.


분명한 건요, 좋은 일을 할래도 돈이 있어야겠더라고요. 부자가 되려면 부자 옆에 있어야겠고요. 요새는 무슨 '10년 안에 10억 만들기 까페'도 있던데 일찌감치 경제적 자유를 획득한 사람이라야 주변에 경험과 지혜를 나눠주는 선행도 베풀 수 있겠더라고요.


속절없이 늙은 걸까요, 잠 안 오는 밤이면 자주 그 때가 떠오르니 말입니다. 다시 돌아가게 해준대도 절대 눈 돌리고 싶지 않은 신산했던 시절. 형님이 등불처럼 가까이 계셔서 덜 추웠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겠습니다. 냉랭한 듯해도 속정이 뜨듯했던 저의 재테크 선생님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나, 버는 족족 쓰느라 '똥카마 더'러운 노후를 앞두고 있지나 않았을지 새삼 아찔해 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저녁입니다.


2,30대만 생각하면 맥락도 없이 꼭 떠오르는 시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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