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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렇구나 Aug 20. 2020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

하늘도 울고 땅도 같이 울어줄 줄 알았는데

1학년 2학기 기말시험을 보는 중이었다. 과목이 영문학 개론이었는지 교양영어였는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거칠게 문이 열렸을 때, 그 소리만은 오직 나와 상관이 있겠다는 걸 나는 대번에 알아차렸다. 조교가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내 귀에 대고 당장 고향 집에 전화를 해 보라고 그가 소곤거렸다. 답지를 작성하고 있던 펜이 내 손가락 사이에서 빠져나갔다.

 

인문관에서 학생회관으로 가는 길은 내리막이었는데 바위산을 오른 듯 숨이 찼다. 지하 1층 학생식당에서 입맛을 다시고 나오던, 향우회에서 겨우 얼굴을 익힌 심리학과 남자애가 그 날 따라 알은척을 했다.

 “야, ○○○! 점심 먹었어? 오늘 하이라이스 되게 맛있던데. 어 …, 너 안색이 왜 그래?”

 

우체국은 한산했다. 전공 공부와는 담쌓고 막막한 서울살이에 대한 불안과 머잖아 닥칠 불운이 두려워 여기저기 편지질만 해댔던 내가 가장 애용했던 장소. 창구 직원에게 시외 전화 신청서를 적어냈다. 부스로 들어가 연결이 되길 기다리는데 창 너머로 스산하게 떨고 있는 겨울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오빠, … 엄마는?”

 수화기 저쪽에서 큰오빠가 숨을 고르는 기척이 느껴졌다.

 “오늘 새벽에… 편히… 가셨다.”

  

자취방엔 무슨 정신으로 갔고 무슨 정신으로 짐을 꾸려 고속터미널로 갔던지. 내 인생에서 그 부분은 아직도 암전暗轉이다. 언제라도 부르면 어디서라도 ‘오야, 내 새끼’ 하고 뛰어나오던 엄마의 음성을 더는 듣지 못할 집은 한눈에도 표가 났다. 대문은 훤히 열려 있고 등이란 등은 다 켜져 있었다. 유독 후각에 민감한 나에게 십 년 전 아버지 때와 똑같은 냄새가 먼저 달려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향 피우는 냄새.

 

개다리소반이 이리저리 건네지고 술을 더 갖다 달란 주문이 소란스러웠다. 마당에 멍석을 펴고 앉아 화투패를 돌리는 사람들이 악머구리 떼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낯가림이 심하고 성질이 불 같은 작은오빠가 ‘당장 저 사람들 쫓아내’라고 울부짖었다.

 

“그러는 거 아니다. 저들은 어디, 이 추운 날 좋아서 저러고 있는 줄 아나?”

 집안 어른 한 분이 오빠를 달랬다. 말은 안 했지만 내 마음도 오빠와 같았다. 관객들 모두 내보낸 뒤 엄마하고 둘이 조용히 작별할 수 있다면…. 더 이상 아프지 않은 곳으로 엄마를 데리고 가 달라고 빌었던 우리들이 서운하지 않았냐고, 이젠… 안 아파서 좋냐고 꼭 묻고 싶었다. 곱고 평온한 영정 사진 속 엄마 얼굴을 물끄러미 보며 상복을 꿰입고 있을 때, 나를 발견한 숙모님이 곡을 하면서 달려왔다.

 “아이고 형님,  ○○ 왔소~~, 형님 막둥이가 서울서 지금 내려왔소~~.”

 

부모 사랑을 오래 못 받는 막내들이 가장 불쌍한 법이라고 누군가 수군댔다. 상주들이 왜 곡을 크게 안 하냐고 쑥덕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할 말이 많을 때는 되레 입을 다무는 이치를 모르냐고 아무나 붙잡고 패악을 부리고 싶었다. 두 번째 겪는 일이라고 익숙해질 일이 따로 있지, 같은 상실喪失이라도 아버지 때엔 엄마가 옆에 있었다. 열 살의 나는 엄마가 우니까 따라 울었을 뿐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사라졌단 얘기. 하늘과 땅의 차이였다.

  

수줍음이 많은 안방마님처럼 천성이 내향적인 엄마였다. 마흔에 혼자된 후부터는 스스로를 더욱 유폐시켰다. 남편 없이 모든 걸 혼자 결정해야 했을 때의 독한 외로움을 올망졸망한 6남매는 짐작도 못했다. 허구한 날 살림만 하는 대신 꽃놀이라도 다녔더라면 어땠을까. 관광버스에서 걸쭉하게 니나노 타령을 할 수 있는 털털한 양반이었다면. 김부각 만들고 놋그릇 반짝반짝 윤낼 시간에 엄마 인생을 살았더라면. 하지만 엄마는 아버지 회사 부부 동반 모임 때 입었던 화사한 옷들을 더 이상 입지 않았고, 남들이 흉볼까 봐 진한 립스틱도 멀리했다.

 

틈틈이 울고, 때 되면 먹고, 지치면 누웠다. 시간의 운행은 정확해서 발인날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선산 햇볕 좋은 곳으로 엄마의 새 집이 정해졌다. 그 옆에는 당신보다 십 년 일찍 터를 잡은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장지까지 가려면 외가 동네 앞을 지나는 게 빨랐다. 눈이 짓무른 외삼촌은 운구 행렬의 우회를 요구했다. 쉰밖에 안 된 고명딸의 마지막을 외할머니가 보는 일은 막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자식을 앞세우는 외할머니의 심정에 그제야 생각이 미쳤다. 선산 아래로  빼꼼히 보이는 외가 지붕 쪽을 향해 하관식 때 나는 처음으로 섧게 울었다.

 

“스트레스가 암의 원인이라더라. 혼자서 우리를 키우느라 어머니는 세상이 몹시 무서웠을 게다. 적지 않은 아버지 퇴직금을 아낀다고 아껴도 곶감 빼먹듯 돈이 없어지니 공포스러우셨겠지. 우린 너나없이 어머니처럼 몰래 삭이는 소심한 성격 아니냐? 제발 맘에 담지 말고 그때그때 풀도록 하자. 그리고 막내, 내일 당장 서울 올라 가. 가서 기말 시험마저 보고 내려와라.”

 

우리 가족만 덩그러니 남겨졌을 때 큰오빠가 내 처지를 일깨웠다. 오빠다운 결정이었겠지만 따르고 싶지 않았다. 삼우제까지 참석하겠다고 버텼다. 졸지에 스물여덟에 가장이 된 오빠가 정색하며 나를 타일렀다.

“어머니가 뭘 원하실지 잘 생각해 봐. 뒷일은 언니 오빠들한테 맡기면 된다.”

 

다음 날 터미널로 가며 생각했다. 지지리 안 들었던 엄마 말을 이제야 순종하는 체해봤자 아니냐고. 오랫동안 나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리란 예감이 들었다. 암으로 투병 중인 줄도 모르고 표독스러운 말로 대못을 박으며 벼슬하듯 보낸 사춘기. 전이가 돼서 얼마 못 사신단 사실을 알았을 땐,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 안타까워 또 포악을 부렸다. 입학의 기쁨은 잠시였고, 1년 내내 등교하자마자 학생회관 3층 기도실로 직행했다. 신앙의 힘을 빌지 않고는 버티기 힘든 시간이었다.


차가 출발했다. 성에 낀 유리창에 나는 무심코 ‘The Show Must Go On’이라고 썼다. 하늘도 울고 땅도 같이 울어줄 줄 알았는데 퉁퉁 부은 눈으로 아침을 맞으면 새는 지저귀고 꽃은 피고 있었다. 속내를 드러낼 친구 하나를 못 사귄 채 휴학계를 들고 학적과 주변을 서성였던 시린 스무 살. 교양 영어 수업 첫날 나에게 계시처럼 다가와 위로가 돼 준 문구가 있었다. Harry Golden의 에세이 제목 ‘The Show Must Go On’이 그것이었다.

 

지은이 해리는 말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슬픔을 짊어진 채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 오른다고. 누가 죽든, 아프든, 자신의 배역을 끝마칠 때까지 ‘쇼는 계속되어야만 한다’고, 그게 인생이라고.

 

버스가 고향 도시를 벗어나기 바쁘게 수마가 밀려왔다. 더 버티지 못해 미안하다고, 혹 꿈에서 엄마가 내게 말을 걸어올 때를 대비해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4년 전의 수술이 위암 때문이었다는 걸 언니들이 비밀에 부치지 않았더라면 좀 더 고분고분한 막내딸이 됐을지 아냐고…. 왜 과외 안 시켜주냐, 예쁜 옷 안 사주냐는 철없는 소리도 안 했을지 혹시 아냐고…. 그보다는 이 모든 게 꿈이길 바란다고.

 

잠결에 어렴풋이, 앞으로 내가 맡을 새 역할을 알려주는 누군가를 본 것 같았다. 표정이 서늘한 게 엄마는 아닌 듯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울지 않고 혼자 일어서야 하는 오뚝이’ 역이 앞으로 네가 맡을 역할이라고 꿈속의 그가 다그쳤다. 싫어, 지금껏 해 온 배역대로 철부지 엄마 딸로 무대에 서게 해 달란 말이야,라고 악을 쓰려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쇼가 계속되고 있었다.



* 2016년 4월에 쓴 글입니다. 요즘처럼 뭐 하나 속 시원한 일이 없을 때 읽기엔 좀 무겁지요? 생략할 수만 있다면 훌쩍 건너뛰고 싶은 저의 한 시절 얘기인데요, 그즈음을 노코멘트 하고 싶은 유혹을 이겨낸 건, 앞으로 제가 쓸 글에 숭숭 구멍이 뚫린 느낌을 드리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픽션이 아닌 글을 쓰는 일은 이래서 힘이 드네요. 좀 더 다듬어 올릴 욕심에  뜸을 들이다간 중도 포기할지 몰라 눈 질끈 감고 발행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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