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렇구나 Sep 02. 2020

일러바치고 싶은 한 가지

"음식 갖고 그러는 거 절대 아니다."


“선생님도 이리 나오세요, 한 가족이라 생각하시고.”


다감하고 푸근한 목소리였다. 입주 한 달째. 나는 처음으로 그 댁 주인인 사장님을 뵈었다. 그 옆에 바짝 붙어 앉아 있던 사모님이 턱을 까딱거리며 내가 앉을 곳을 가리켰다. 살집이라곤 없는 그녀의 얼굴은 가면처럼 차고 딱딱하게 느껴졌다.

 

“지난겨울에 어머니를 여의고, 올해 2학년 된다고요?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내 편 하나가 사라진 그 심정 나도 알지요. 그나저나 사업차 지방에 거주하는 나 때문에 아내가 한 달에 반 이상 집을 비운답니다. 얘들아! 엄마 아빠 없을 땐 선생님이 보호자인 거 알지? 말씀 잘 들어야 돼! 그럼, 우리 애들 잘 부탁합니다, 선생님.”


사장님은 세심하고 인자한 외삼촌 같은 이미지였다. 입주 첫날부터 취조하듯 이것저것 따져 묻던 사모님과는 딴판이었다.


소파에 앉은 부부 주위에서 전교 1등이라는 고2 딸과 중3, 초6의 사내애들이 얼키설키 몸을 비비대며 장난을 쳤다. 셋째에게는 2남 4녀 중 막내인 나와 비슷한 구석이 많이 보였다. 울컥해지려는 기분을 외면하기 위해 베란다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성긴 눈이 날리듯 점점이 벚꽃이 흩어지고 있었다.


1983년. 방 다섯 개에 화장실이 둘 딸린 아파트라는 곳을 그때 나는 처음 들어가 봤다.

 

“너, 엄마 돌아가시고 많이 힘들지? 우리 이모 동창이 반포 사는데 믿을 만한 입주 가정교사를 구한대. 네가 딱이다 싶더라. 차라리 좀 바빠버리면 슬픈 마음도 덜할 것 같은데, 어때?”


동문회에서 몇 번 봤을 뿐 어렵기만 했던 여고 두 해 선배, 치의예과 Y언니였다. 붙임성이 없고 활달하지 못한 나에게는 막막한 제안이었다. 고민은 금방 끝냈다. 아직 신혼인 큰오빠와 새언니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살아 계시나 안 계시나 그들은 나를 ‘자랑스러운 우리 막둥이, 우리 아가씨’로 불렀다. 그럴수록 눈치 있고 의젓한 동생이고 싶었다. 여름 방학에 고향에 내려가지 않아도 될 좋은 핑계이면서 경제적으로 독립할 기회로 그만한 일도 없었다.


깍쟁이 같아 보이는 그 집 딸은 따로 과목별 고액 과외를 받는다고 했다. 나는 사내 녀석 둘만 신경 쓰면 된다는 뜻이었다. 다행히 중3, 초6 까까머리 두 아이는 나를 따랐다. 이따금 내가 다닌 대학교 캠퍼스 구경을 시켜주거나 셋이 함께 영화를 보기도 했다. ‘창경원 밤 벚꽃놀이 미팅’이 한창 유행인 때에도 나는 수업만 마치면 달음박질을 쳤다. 깐깐한 사모님이 통행금지를 딱히 정해준 건 아니었지만 토요일, 일요일에도 파수꾼처럼 아이들 옆을 지켰다.


여느 때보다 일찍 눈이 떠진 어느 날이었다. 회가 동할 듯한 갑오징어 고추장 양념구이 냄새가 온 집안에 넘실대고 있었다. 솔방울 무늬가 도드라지도록 칼집을 낸 뒤 직화로 구워 실고추와 통깨를 얹어 내놓던, 딱 어머니 방식이었다. 그 댁 먼 친척뻘인 주방 할머니 솜씨는 아닌 듯했고, 아무래도 전날 밤 상경한 사모님 실력인 듯싶었다.


그날 아침. 3남매와 내가 밥을 먹는 동안 가스레인지 앞에서 도시락 반찬을 담는 사모님 손길이 경쾌했다. 차갑고 샐쭉한 인상은 온데간데없었다. 제 새끼들에게 맛난 점심을 먹이고 싶을 뿐인, 푸짐하고 넉넉한 엄마들 분위기와 똑같았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저도 도시락 좀 싸가도 될까요?”

순간 뜨악하게 나를 쳐다보던 그분 눈길. 뭔가 큰 잘못을 했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표정이었다. 서늘한 기운을 당할 재간이 없어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숙수熟手 대접을 하며 잔치집마다 모셔가기 바빴던 어머니 음식 맛을 닮은 냄새에 취해 내 집, 내 엄마인 듯한 착각을 했던 걸까.


“넌 저기 남은 반찬 아무거나 싸가라.”

사모님이 식탁에 차려진, 먹다 남은 음식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서러움은 둘째치고 무안함 때문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어서 수습을 한 뒤 그 자리를 뜨고 싶었다.

“아, 오늘 Y언니랑 점심 약속 있는 걸 깜박했네요.”


명치가 아프도록 소리 죽여 울다 새우처럼 구부리고 잠든 그날 밤, 어머니가 나타났다. 월남치마 위에 앞치마를 두르고 머리에도 스카프를 단정하게 묶은 게 생시랑 똑같은 모습이었다.


‘막둥아, 울지 마. 괜찮아. 식탁에 있는 반찬도 똑같았을 텐데 뭘 속상해하고 그래?’

‘엄마라면, 엄마라면 절대 안 그랬을 거잖아! 자취하는 내 짝꿍 안쓰럽다고 만날 도시락 반찬 챙겨 보냈던 엄마 같으면!’

 

편안하고 깊은 잠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까. 뭔가 창문을 두드리는 기척에 흠칫 눈이 떠졌다. 빗방울이 유리창을 세차게 때리고 있었다. 첫 버스가 다니기엔 아직 먼 시각인 듯했다. 불도 켜지 않고 벽에 기대앉아 맥락 없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냥저냥 웬만큼 잘 살았던 우리 집도 어쩌다 점심 한 끼는 삶은 고구마나 김치국밥을 먹던 시절. 그때만 해도 나는 쾌활하고 사교적인 편이었다. 친구네 집에 놀러 갈 때마다 어머니는 간곡히 타일렀다.


“밥때 되면 얼른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그 말. 입 하나가 무서운 시절이었으니 나 때문에 친구 어머니가 난감해하실 걸 염려해서 한 말이었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하지만 내가 밖에서 놀다 친구들을 달고 왔을 때 어머니가 곤란한 표정을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거지나 동냥아치들이 대문을 두드릴 때만 해도 그랬다. 어머니는 꼭 밥상에 차려 대청마루에 올라앉아 먹게 했다. 우리 형제들이 질색을 해봤자 한결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음식 갖고 그러는 거 절대 아니다."

대문 앞에 세워둔 채로 동냥 바가지에 식은 보리밥 한 덩이만 떨궈줘도 감지덕지해 할, 그땐 그런 시절이었는데….


서른몇 해 전 새벽 비 오던 아침. 스물한 살의 계집애는 눈가가 부숭부숭한 채로 맘 놓고 울 곳을 찾아 나선다. 마침 마땅한 친구가 흑석동에 살고 있었다. 어머니가 챙겨준 도시락 반찬을 못 잊어 장지까지 따라와 함께 울어준 짝꿍.


"야,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입이 찢어지게 하품을 해대며 태평하게 나를 맞이하는 친구의 얼굴과 마주한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사모님에게서 받은 모멸감을 나와 똑같은 무게로 느낄 사람은 세상에 없을 거라고. 혹여 친구가 ‘뭘 그 일로 그러냐’ 할 경우 영영 등을 돌릴지도 모르겠다고. 그러니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나 혼자만의 슬픔에 대해선 조용히 입을 다무는 게 상책이겠다고.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엄마가/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아니, 아니, 아니, 아니,/반나절, 반 시간도 안 된다면/단 5분/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원이 없겠다//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엄마와 눈맞춤을 하고/젖가슴을 만지고/그리고 한 번만이라도/엄마!/하고 소리내어 불러보고/숨겨놓은 세상사 중/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엉엉 울겠다 // <정채봉,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언제였던가. 정채봉 님의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이란 시를 처음 읽고 소름이 돋았던 때가. 몇 줄 읽기도 전에 전광석화처럼 반포에서의 일을 나는 떠올리고 말았다.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단 5분만’이라도 오면 ‘엉엉 울’며 털어놓을 ‘숨겨 놓은 세상사’로 딱 정해놓았던 그 얘기. 하지만 일러바치고 싶은 단 한 사람인 어머니는 끝내 휴가를 나오지 않으셨다.


그러다…, 장맛비 내리던 몇년 전 어느 날이었다. 끝내 입 다물고 싶은, 감쪽같이 잊으려 했지만 꽁꽁 감춰 두었을 뿐인 그  그제야 나는 글로 풀어낼 수 있게 되다. 반포 아파트, 단란했던 그 가정에서 국외자局外者로 겉돌던 스물 한 살의 계집애가 비로소 입을 열 수 있게 된 거였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저자 카렌 블릭센을 인용한다.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에 관해 이야기 할 수 있다면 견딜 만하다’고. 카렌이 맞았다.


작가의 이전글 노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