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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렇구나 Aug 02. 2020

게으른 완벽주의자를 위한 변명

"요새 왜 안 써? 글 놓으면 절대 안 돼!"


사람들은 내가 억수로 똑똑한 줄 안다. 나긋나긋, 편안한 인상이 아니고 말수가 적어서 깐깐해 보인다고도 한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알고 보면 나는 어리바리에 늘 가슴이 둥둥 뛰는 겁쟁이인데.


앞의 세 문장만 읽고, "네가? 네가 말수가 적다고?" 하고 기막혀할 친구가 나에겐 몇 명 있다. 그들 앞에서만 나는 수다쟁이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맘 놓고 편히 누우라고, 자리를 푹신하게 깔아주는 친구들 면전일 때만.


취미 삼아 심리에세이를 읽기 전까진 고민이 많았다. 나는 왜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는가 하고. 왜 어느 땐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어떨 땐 봇물 터지듯 말이 쏟아져 나오는가 싶어서. 일관성이 없고 이중적인 것 같아 죄의식이 들기도 했다.


내향형도 내향형 나름이란 걸 알고 그제야 안도했다. 선천적으로 사람 만나길 싫어하는 진성 내향형과 달리 낯선 사람 앞에선 입도 떼지 않지만 내 편이란 확신이 들면 말이 많아지는 유사 내향형, 그게 딱 나였기 때문이다.


남 눈에 똑똑하고 깐깐해 보였던 적이 과연 있었는지 싶게, 더 이상 내향형만은 아닌 듯싶게, 요새 나는 '대충', '얼렁뚱땅' 또는 '슬렁슬렁'으로 변신 중이다. 철저하게 대비하고 시동을 걸어 봤자 거기서 거기. '장고 끝에 악수 둔다'는 이치를 깨달은 나이가 된 덕분인 것도 같다.


얼렁뚱땅 시작하는 바람에 문제가 생긴대도, 예전처럼 머리칼을 쥐어뜯지 않고 피식 웃을 수 있다. 실수하지 않으려고 이를 응등물수록 나는 물론 주변 사람에게도 너그러울 수 없었던 폐해를 알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손바닥'이 뜨고 클릭이 되기만 하면 아무거나 꾹꾹 눌러서 비대면 통장도 뚝딱뚝딱 잘 만든다. 파슬리, 아스파라거스 같은 재료가 없으면 시작할 엄두를 못 낸 요리도 아무 문제없다. 걔네가 꼭 들어가야만 맛이야? 이런 배짱으로 대충 만들어 먹는다.


주식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미국 주식도 얼렁뚱땅 주문하고 잠자리에 든다. 내리면 내리는가 보다, 오르면 오르는가 보다, 이다. 어차피 십 년은 들고 갈 초우량주만 모아서 그런진 모르겠지만 다음 날 아침이면 몇 달러 몇 센트짜리 주식인지도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슬렁슬렁….


딱 하나 안 바뀐 게 있으니 글쓰기를 대하는 나의 태도이다. 잘 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수록 나는 최근 2년 동안 절대, 결코, 한 줄도 쓰지 않았다. 모 아니면 도. 심리학에선 이런 사람을 게으른 완벽주의자라고 부른다. 애초 완벽이란 없는데 방을 완벽하게 치우지 못할 바에야 돼지우리로 방치하겠다는 식. 어차피 잘 쓰지 못할 글이니까 아예 안 쓰고 말겠다는 식.


제발, 내가 관심 가질 만한 블로그를 누군가 열심히 물어다 주지 않았으면 했다. '브런치' 글이 매주 카톡으로 도착해도 일별만 했다. 내가 글을 못 쓰고 있는 건 그런 정보를 몰라서도 읽을거리가 없어서도 아니었다.


더 난감했던 건 5년쯤 전에 글쓰기 강좌에서 알게 된 선생님을 응대하는 일이었다. 아끼는 후배를 독려하듯 그분은 매번 다짐을 두었다. "요새 왜 안 써? 글 놓으면 절대 안 돼, ○○ 씨."라고.



체중이 급속히 느는 사람에게 "너, 요새 운동 왜 안 하니? 살찌면 안 돼."라고 한다고 해 보라. 비만인 사람은 자기가 더 잘 안다. 살을 빼려면 운동을 하고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는 걸. 몰라서 못 하는 게 아니다. 나도 그랬다.


생각해 주는 마음은 알겠는데 걱정해 주는 당신들보다 내가 더 간절히, 잘 쓰길 원한다고! 외치고 싶었다. 다 아는데 맘이 좀체 안 먹어지는 걸 어쩌라고. 목청껏 소리를 지르고 싶지만 발음이 안 되는 꿈 속에서처럼 답답하고 안타까운 날들이었다.




콩나물 시루라고밖엔 말이 필요 없는 시내버스였다. 자취방으로 학교로 나를 실어 날라 줄 버스가 꾸물대고 다가오면 심호흡을 크게 하며 각오를 단단히 했다. 와인색 유니폼에 빵모자를 썼던가. 버스 안내양은 승객들을 뒤에서 탕탕 치듯 밀어 넣기 일쑤였다. 앞문이 제대로 닫히지도 않은 채 버스를 출발시키면서 백미러가 안 보인다고 기사 아저씨가 짜증을 부리던 그때 그 시절.


그래도 나는 만원버스를 타는 편이 나았다. 다들 앉아서 가고 나 혼자만 서서 가는 텅 빈 버스보다는. 하차한 뒤에야 블라우스 단추 하나가 떨어지고 없어진 걸 발견하더라도. 재수 없는 날은 엉덩이를 더듬거리는 못된 손모가지에 대한 기억 때문에 종일 기분을 잡칠지라도. 나 혼자만 서서 가는 널널한 버스에선 뒤통수가 화끈거려 금방이라도 내리고 싶었다.


어느 날은 큰 맘먹고 살짝 고개를 돌려 봤다. 눈을 감고 있거나, 창 밖으로 시선을 두거나, 신문을 보거나. 나를 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도 늘 남을 의식하고 저 사람이 나를 어찌 볼까, 누가 나를 오해하면 어쩌나 하는 겁쟁이 기질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 정도쯤이야, 싶으면 이건 어떤가. 감기로 병원엘 갔더니 의사가 며칠 후 또 오세요, 한다. 정말 피치 못해 못 가게 될 일이 생겼을 때, 나는 병원에 전화를 해야만 맘이 편하다. 저 누구누구인데요, 의사 선생님이 한 번 더 오라고 하셨는데 제가 도저히 갈 수 없는 사정이 생겨서요. 약속 못 지켜 죄송하다고, 내일 오전 일찍 간다고 꼭 전해주세요.


아는 의사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나는 약속을 천금처럼 여긴다, 행여라도 의사가 약속을 안 지키는 거짓말쟁이로 나를 오해하는 건 싫다는 자의식이란 병증. 범인은 그것이었다.


매사에 생각이 비슷해서 "우리 둘, 데칼코마니처럼 딱 포개지지 않니?"라는 명언을 남긴 동창이 어느 날 처방을 내려줬다.

"자, 들어 봐. 책에서 읽은 내용인지, 목사님이 설교 때 하신 말씀인지 오락가락한데 말이야. 누가 무슨 짓을 하잖아? 음, 뭘 예로 들면 좋을까? 너 참, 시어머니 김장 김치까지 해서 날랐다고 했지? 그럼 다들 너 잘한다고 칭찬할 것 같니? 아니. 너랑 인생관이 같은 한두 명이나 잘했다 하지 한둘쯤은 싫어한다더라. 그 사람들은 너처럼 살기 싫거든."

"그럼 열 명 중 나머지는?"

"나머지? 남은 여섯 사람은 누가 무슨 짓을 하든 말든, 선행을 하든 악행을 저지르든 아무 관심 없대. 그니까 남 눈 의식하지 말고 그냥 꼴리는 대로 살면 돼, 너나 나나."




친구 말이 구구절절 옳다 해도, 내가 기어이 글을 쓸 용기를 까진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게으른 완벽주의자 기질을 벗어던지고 체중을 줄이는 데 성공했을 누군가가 있겠듯, 글을 놔버린 지 2년만에야 나도 닻을 올기 시작했다. 시내버스 내부 공간쯤, 새발의 피보다 더 적게 느껴질 망망한 SNS라는 바다 위에.


막상 던져져 보니 견딜 만하더라고, 나는 이제야 모기만 한 목소리라도 내고 싶어진다.  자신을 표현하고 싶지만 도저히 용기가 안 나 주저하는 분이 있다면, 괜찮으니 안심하고 어서 오라고. 아무도 우리를 향해 눈알을 부라리고 있진 않은 것 같다고.


자리에 앉은 승객 중에 나더러 왜 그리 하체가 굵고 머리 모양은 촌스럽냐 할까 봐 안절부절못했던 옛날처럼 두려울 때도 있긴 하다. 내 글에 대고 뭐라 뭐라 수군거릴까 봐. 의사에게 왜 내가 약속을 어기고 병원에 갈 수 없었는지 설명하고 싶었던 예전처럼, 의도와 달리 읽힐지 모르는 내 글을 변호하고 싶어지는 때도 가끔 있다.


그럴 때면 나는 <허삼관 매혈기>를 쓴 중국 소설가 위화만 믿고 버틸 참이다. 글이 내 손을 떠나면 글은 더 이상 작가의 것이 아니고 독자에게 속한다는, 따라서 천 명의 독자가 읽으면 그 작품은 곧 천 개의 버전으로 되는 거라는 위화 선생님에 기댄 채.


그런데도 여전히 내 글을 선뜻 날려 보낼 자신이 없어 만지작거리는 나를 향해 속삭여본다.

"시작은 어려웠지만 잘했다 싶지? 어떤 일보다 너를 너답게 하는 선택이었지? 그렇다면 네가 그토록 글을 쓰기를 바랐던 선생님이며 지인들께 이제라도 브런치 주소 알려드리는 건 어때?"라고.


타인의 시선이 두려워 주저하는, 나와 동류인 소심한 겁쟁이들. 제대로 못 할 것 같으면 아예 안하겠다는 게으른 완벽주의자에게도 속삭여야겠다. 익명의 세계라 무서운 듯해도 익명이어서 더 안심일 수도 있는 인터넷이란 바다에 한 번 빠져 보자고. 그런 당신들이 많아야 내가 덜 외로울 것 같아서 그런다. 그렇다고 물 귀신 작전은 아니다. 함께 힘 모아 자의식의 굴레를 벗겨주자는 따뜻한 제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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