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일에 1달러만 내시면 재봉틀을 가질 수 있습니다.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꽃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 사계 中
혼수품 목록 1호가 재봉틀이고, 여공들이 미싱을 돌리고 돌리던 시대가 있었다. 기성복 시장이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재봉틀은 자취를 감추었고, 이제는 집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유물이 되었다. 바로 이 재봉틀이 연예인 마케팅과 할부 판매 방식의 원조이며, 우리 삶의 방식을 어마어마하게 바꿔 놓았다는 사실! 재봉틀의 마케팅 방식을 알아보자.
집집마다 재봉틀이 들어온 것은 바로 '싱어사(Singer Company)' 덕이다. 1851년, 뉴욕 주 피츠타운 출신의 기계공인 아이작 싱어는 작은 사이즈의 재봉틀로 특허를 받고, 동업자들의 출자를 바탕으로 싱어 앤 컴퍼니를 설립했다.
한 집에 한 대의 싱어 재봉틀을!
싱어 사는 위와 같은 슬로건을 걸고 전시회와 재봉틀 빨리 돌리기 시합을 개최하는 등 대대적인 홍보에 나섰다. 싱어 사는 설립된 지 20년 만에 전 세계 재봉틀 25%을 점유했고, 이후 1912년에는 미국의 60%, 전 세계 시장의 90%가 싱어사의 제품이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정수기 렌탈, 휴대폰 할부 구매 등 지금은 너무나도 익숙한 할부 시스템. 지금이야 금융 보안시스템, 카드 결제로 누구나 할부 구매를 할 수 있다. 이런 시스템이 부재했던 1800년대 후반 할부 판매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당시 재봉틀 한 대 가격은 재봉사 연봉의 1/5, 혹은 1/2에 육박하는 엄청나게 고가의 제품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거의 차 한 대 가격) 이를 '일시불'로 구매하는 것은 재봉사 입장에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싱어사가 내 건 방식은 바로 '1달러 계약'
1주일에 1달러만 내세요.
그럼 당신은 재봉틀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싱어 사는 판매원과 수금원의 역할을 분리했다. 판매원은 재봉틀이 얼마나 좋은지 설파하고 계약서를 작성하는 일을 했다. 수금원은 매주 돈을 걷으러 다녔는데, 단순히 돈만 받는 것이 아니라 엔지니어로서 방문할 때마다 AS를 해주었다. 이 방식으로 소위 말하는 '먹튀', 재봉틀을 가지고 도망가는 사태를 방지했다. 또한 싱어 사는 할부 판매를 잘 도입하기 위해 직원에게 판매 교육도 시켰는데, 이것이 할부 판매 교육 최초의 사례였다. 나중에는 엔지니어에게 직접 판매 교육을 시키고 판매원과 수금원의 역할을 일원화하여 인건비를 줄였다.
여성의 경제 활동이 제한적이었던 1800년대, 당연히 남편의 허락이 있어야 재봉틀을 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여자는 기계를 다룰 수 없다'는 사고방식 때문에 남성들의 반박이 컸다.
여성이 복잡한 기계를 사용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른다
특히 의사들은 본인의 전문 지식을 포장해서 재봉틀을 가정에 두는 것을 철저히 막았다. 1869년 아델프 에스파뇰이라는 의사는 여성이 재봉틀 쓸 때 여성의 팔과 복부 등에 쇼크를 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자신의 능력 밖의 복잡한 기계를 사용하면 흥분, 긴장, 월경 불순과 같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많은 의사들이 국제 심포지엄에서 여자가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가지런히 하고 모은 채 페달을 밟는 행동은 성적 흥분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가정의 화목함을 파괴할 수 있다는 발표도 했다. (여자는 차 끌지 말고 집안일이나 하라는 오늘날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싱어 사는 이런 선입견을 없애기 위해 프리미엄 고객을 타겟으로 마케팅을 진행했다. 장관 사모님을 대상으로 재봉틀을 반값으로 판매하는 프로모션을 한 것이다. 이로 인해 사회 유력층 여성들이 재봉틀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재봉틀 덕에 가사노동 스트레스가 줄었다는 브랜드 이미지를 재고했다. 삽시간에 상류층 여성 사이에서 재봉틀 하나쯤은 들이자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재봉틀이 불티나게 판매되기 시작했다. 오늘로 따지자면 연예인 마케팅의 시초인 것이다.
18세기 이후, 섬유 산업이 급속한 발달로 방적기와 방직기의 혁신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바느질은 엄청나게 비효율적으로 수작업에 의존하고 있어 원단은 쌓이는데 옷은 만들어지지 않는 병목 현상이 발생했다.
바느질을 자동으로 빨리 할 수 있다면 큰돈을 벌겠구나.
그래서 바느질하는 기계를 개발하는 것이 이게 공공연한 숙원 사업이었고, 내로라하는 과학자와 엔지니어가 이를 위해 노력했다. 최초의 재봉틀은 1790년 영국의 가구상인 토마스 세인트가 개발했다. 그는 특허출원을 했지만, 제품을 판매했다는 기록은 없다.
최초의 실용적인 재봉틀은 프랑스의 재단사인 시모니가 1829년에 개발했다. 하지만, 자동화로 인해 생계가 위태로워진 재봉사들의 반발로 널리 퍼지진 못했다. (마치 카풀 서비스 때문에 택시 노조가 파업하듯) 재봉사들은 공장에 불을 지르고, 심지어 시모니에게 집단 폭력을 가했다.
오늘날과 같이 두 가닥의 실로 바느질하는 재봉틀은 1846년에 일라이어스 하우에 의해 발명되었다. 그는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리는 아내의 고생을 덜기 위해 바느질 기계를 만들었다. 정작 그가 개발한 것은 가정용이 아니라 공업용 재봉틀이었고, 엄청나게 큰 기계를 남자 재봉사들이 이용했다. 그는 프랑스 군복 생산 공장에 재봉틀을 납부하기도 했지만, 재봉사들이 공장에 와서 불을 지르는 등 엄청나게 반발해서 경영난에 허덕이다 폐업했다. 하우가 보스턴의 양복점 주인들에게 자신의 재봉틀을 보여주자 “이 기계가 양복 값을 떨어뜨리고 결국 양복점을 망하게 할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깡패를 고용해서 하우의 목숨을 위협하고 모든 재봉틀을 부수기도 했다.
꽃님이 시집갈 때 부라더 미싱
우리나라는 1877년에 재봉틀이 처음 도입된 것으로 전해진다. 강원도 금화에 살던 김용원(독립운동가 김규식의 부친)이 일본에 갔다가 재봉틀을 구입했다. (마치 코끼리 밥솥을 사 오듯) 처음 재봉틀을 접한 당시 사람들은 마치 요술쟁이인 양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이어 1896년에는 이화학당의 교과목 가운데에 재봉과 자수가 등장했고, 1905년에는 싱어 제조사의 한국 지점을 설치한다는 광고가 실렸다. 한국에서도 미국과 동일한 수순 초기에는 남성들의 반발로 재봉틀이 보편화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빨래는 손으로 해야지 무슨 세탁기야.. 이런 느낌)
재봉틀은 오랫동안 집안의 가보처럼 사용되다가 1960년대 중반부터 부라더 미싱 덕에 대중화되었다. 부라더 미싱은 부산정기 주식회사가 일본의 부라더 공업과 합작하여 생산한 재봉틀이었다. 여성들은 집에서 소소한 벌이 수단으로 재봉틀을 활용하기도 했지만, 결국 기성복의 확산으로 지금은 더 이상 집에서 재봉틀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이효준, 『유레카! 발명의 인간』 (김영사, 1996년).
이종호, 『과학자들의 돈 버는 아이디어』 (사과나무, 2012년).
한스 요아힘 브라운(김현정 옮김), 『세계를 바꾼 가장 위대한 101가지 발명품』 (플래닛미디어, 2006년).
데이비드 에저턴(정동욱, 박민아 옮김), 『낡고 오래된 것들의 세계사: 석탄, 자전거, 콘돔으로 보는 20세기 기술사』 (휴먼사이언스, 2015).
참고 : 이진우의 손에 잡히는 경제 2019.3.31자, 한국경제산업연구소 박정호 산업연구 정책 실장 세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