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기 어려운 여러 새엄마들 중 아마도 두 번째 아니면 세 번째 새엄마가 유독 생각난다. 어렴풋하게 더듬어 보자면 모난데 없이 단아한 보통의 여인.
아줌마는 등교하기 전 국에 밥을 말아 줬었는데
아버지에게는 새로운 국을, 나에게는 늘 시래깃국을 끓여 줬다.
상한 시래깃국을 끓이고 또 끓여 시큼한 국물에 밥을 말아주고는 왜 안 먹냐며 딱한 눈빛을 보내곤 했다. 그 눈빛이 진심인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하교 후에는 약수터에 물을 떠 오라며 가방을 하나 건네주었다.
네모나고 큰 물통 하나에 페트병 두 개가 가방의 양쪽에 꼽혀있었다.
태풍에 하천이 불어 슬리퍼가 떠내려간 날에도 약수를 뜨러 다녔다. 떠오라니 떠왔을 뿐이다. 8살이 무얼 알겠는가.
방이 하나뿐인 2층집, 공동 화장실이 바깥에 있었고 다락방이 딸려있었다. 어느 날 이제부터는 다락방에서 잠을 자란다.
바깥에서 잠겨버린 문틈으로 들어본 적이 없는 여성의 신음소리가 잔잔하고 길게도 들려왔다.
그해 겨울이 오기 전 가출을 시작했다.
대구에 있다는 첫 번째 엄마, 나를 낳아줬다는 전설의 진짜 엄마를 찾아
버스터미널로 가면 대구를 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아마 그 집에 있었다면 살해당할 것이란 가정을 세우기라도 한 듯 한 마리 연어가 되어 장어가 되어 용기를 짊어지고 집을 나섰다.
대책 따위가 있을 리가. 돈도 방법도 전무한 채 무작정 길을 걸어 묻고 물어 대구를 간다며 터미널로 향했다. 걷다 보면 오락실이 나오고 태화강이 나오고 백화점이 나오고 울산 터미널이 나왔다. 그렇게 내 세상은 직선으로 길어졌다. 전혀 넓혀진다는 기색이 보이질 않았다.
잡혀오고 맞고 또 잡혀가고 맞았다.
귓바퀴가 터져 피로 물들고 미간이 부어 사자 대가리만 해졌다.
한 번만 더 붙잡히면 다리를 부러뜨린다며 크게 공언한 아버지였지만
참으로 다행히도 아들의 뼈를 부러뜨릴 만큼 비정하진 못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