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달리, 피카소, 그리고 무똥 로칠드

천재들, 그리고 그들의 그림을 담은 무똥 로칠드

by 와인파는총각

와인을 즐기는 분들의 대부분의 분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와인 중 하나인 ‘샤또 무똥 로칠드’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정확히는 무똥 로칠드의 라벨을 그린 화가들의 이야기이다.


설립자인 나다니엘부터 필립, 필리핀느를 거쳐 지금까지, 샤또 무똥 로칠드는 명 화가들을 초청하여 그들의 라벨을 의뢰해왔다. 후안 미로, 마르크 샤갈, 바실리 칸딘스키, 앤디 워홀, 키스 헤링, 프란시스 베이컨 등 기라성 같은 화가들이 샤또 무똥 로칠드의 병을 장식하였다.


오늘의 이야기의 주인공들 역시 무똥 로칠드의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을 그려냈다. 그리고 이들 중 한 명은 무똥 로칠드의 역사적 해의 라벨을 그리기도 하였다. 20세기 스페인의 역사를 관통하는 두 화가. 파블로 피카소와 살바도르 달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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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와 달리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명확한 거장이다. 둘 다 20세기 동 시대를 공유한 스페인의 거장이였으며, 전통적 사실주의를 과감히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한 화가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시대의 상징이 된 예술가이기도 하다.


파블로 피카소.jpg 파블로 피카소,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출처 : Plakativo)



또한 그들은 하나의 화파에 머무르지 않았다. 피카소는 청색주의, 장미주의, 입체주의, 신고전주의 등 끊임없이 화풍을 변신시켰다. 달리는 회화뿐 아니라 조각, 디자인, 영화, 퍼포먼스 등 다양한 실험을 실행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사람의 내면에 대한 다양한 표현이였다. 피카소는 고통, 슬픔, 폭력을, 달리는 불안, 공포, 무의식, 집착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해냈다.


이 둘의 가장 큰 차이는 접근 방식에서 갈리게 된다. 피카소는 현실을 입체적으로 다양한 방향에서 보고 뜯어내는 방식을 사용했다. 그렇기에 같은 피사체를 보더라도 여러 각도에서 보이는 모습을 평면에 그려냈다. 그렇기에 기하학적으로 쪼개져있는 느낌을 받게 된다.


달리는 이와 달리, 마치 이런 질문을 던지는 듯한 느낌이다. ‘만약 이 장면을 꿈에서 본다면 어떻게 나올까?’. 달리는 현실을 다양한 각도로 바라보며 재 구성하는 방식이 아닌, 현실 넘어 환상의 영역을 시각화한 화가이다.


그렇기에 두 화가의 작품을 보면 피카소는 구조적이며 형태의 본질에 집중하여 현실을 해체하여 다르게 보여주는 반면, 달리는 몽환적이고 상징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비현실을 시각화 하였다.’ 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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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와 달리는 1926년 파리에서 첫 만남을 가졌다. 젊은 시절 달리는 피카소를 거의 우상처럼 받들었다. 달리는 피카소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이 첫 만남에서 피카소의 사인을 받았고, 이를 죽을 때까지 간직하고 있었다. 피카소도 달리에 대한 인식이 매우 좋았던 것 같다. 후에 기록에서, 달리는 매우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이라는 표현으로 칭찬을 적기도 하였다.


그 이후 달리는 여러 번 피카소에게 편지와 엽서를 보내며 애정을 과시하였으나, 그 둘은 그만큼 가까워지지 못한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살바도르 달리.jpg 달리는 예술가보다는 인플루언서나 셀러브리티에 가까운 캐릭터이다. (출처 : 위키백과)



우선 성격이 너무 달랐다. 달리는 자기 어필이 매우 강한 타입 이였다. 자기 과장이 매우 심하였고, 쇼맨십이나 도발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직접 언급한 적은 없지만 달리는 피카소를 존경하면서도 뛰어 넘어야 할 존재로 여겼다. 반면 피카소는 자신감이 매우 강하고, 집요한 사람 이였지만 따뜻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 같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정치적 이슈였다. 당시 스페인은 파시즘의 그늘에 속해 있었다. 스페인 내 안달루시아(스페인 최남단) 출신인 피카소는 프랑코 정부를 강하게 반대한 대표 인물이였다. 바스크 지방의 민간인 폭격과 같은 국가적 폭력과 독재에 강력하게 반발하였으며, 스페인 공산당에 가입할 정도로 정치적인 성향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였다.


이와 반면에, 달리는 카탈루냐 출신이였다. 희한하게도 프랑코 정부의 엄청난 핍박을 받은 지역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달리는 프랑코 정부에 공감하거나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달리에게 중요한 것은 본인 자신밖에 없었다. 그에게 정치는 자신의 명성을 올리기 위한 주요 수단 이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대표적인 예로 세계 2차 대전 종료 후 달리는 프랑코 정부가 주장하던 가톨릭, 고전주의 방향으로 기울어진 것을 보면, 그는 자기 보존을 우선했을 가능성이 매우 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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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1958년, 피카소는 1973년 빈티지의 라벨을 그렸다. 샤또 무똥 로칠드는 라벨을 그리면 돈을 주는 것이 아닌, 해당 빈티지의 와인을 제공한다. 어느 정도 제공하는지는 불분명하나, 이 두 사람도 와인을 받았을 것이다. 다만, 피카소는 이듬해인 1974년 사망하면서 이 와인을 마셔보지 못했다.


무똥로칠드 1958, 1973.png 달리의 1958년, 피카소의 1973년 라벨 (출처 : Chateau Mouton Rothschild)



그렇다면 이 둘의 빈티지는 어땠을까? 1958년은 비교적 가볍고 섬세한 빈티지에 가까웠다. 1956년에 받았던 서리 피해 이후 재 식재를 진행하였기에 생산량이 적었던 해였다. 이에 비해 1973년은 평균적으로 낮은 여름 기온, 8월에 많은 비를 겪으면서 매우 좋지 않은 빈티지라는 평가가 다수이다.


의외로 두 거장은 와인으로는 재미를 못 봤다. 하지만 피카소의 1973년은 샤또 무똥 로칠드의 역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한 해이기도 하다. 바로 1등급 승격이 이뤄진 해이다.


1855년, 메독 지역 와인 등급인 그랑 크뤼 클라쎄(Grand Cru Classé)의 첫 지정은 논란의 여지가 많았다. 당시 나폴레옹 3세는 등급체계 신규 설립을 지시하였으나, 당시 농업부는 이 일을 보르도에 유명한 몇 개의 네고시앙들에게 맡겨버렸다. 네고시앙들은 와인의 품질이 아닌, 당시의 명성과 판매 가격으로 61개 와이너리의 등급을 매겼다. 당연히 형평성에 문제가 생겼다. 또 한가지는, 당시 너무나도 유명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메독 지방이 아닌 와인을 하나 넣어버렸고, 그것도 모자라 1등급을 부여했다는 점이다.


당시 오너인 바롱 필립 로칠드(Baron Phillpe de Rothschild)는 무똥 로칠드에 대한 자부심이 어마무시한 사람이였다. 필립 로칠드는 1920년대부터 꾸준히 무똥 로칠드의 품질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하였으며, 샤또에서 직접 병입하는 방식을 통해 품질 개선과 보증을 처음으로 시도한 와이너리이다. 무똥 로칠드를 단순히 아티스트와의 콜라보를 시도한 와인으로만 봐서는 안된다.


바롱 필립 로칠드.jpg 바롱 필립 로칠드의 자부심은 그 어떤 생산자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출처 : Chateau Mouton Rothschild)



동시에 무똥 로칠드의 1등급 승격을 계속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재밌는 사실은 그가 처음에는 1855년 전체 등급의 재 조정을 주장하기도 하였고, 거의 될 뻔하였으나 다른 와이너리들의 반발로 진행되지 못한 적도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의 와이너리에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


1973년, 당시 농업부 장관이였고, 미래에는 프랑스 대통령까지 역임하는 자크 시라크(Jacques Chirac)는 5명의 심사 위원의 승격 허가 추인(Rubberstamp)을 근거로 농업부 장관령으로 샤또 무똥 로칠드의 1등급 승격을 허가했다. 원 분류에서 한번도 변화가 없던 리스트를 유일하게 바꿔낸 케이스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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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 피카소의 세대에 우린 살지 못하고, 다시 돌아갈 수도 없다. 하지만 묘하게도 이런 이야기들을 와인을 통해서 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기분 좋은 일이다. 회화, 전시 등을 좋아하시는 분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펼치면 충분히 흥미를 끌 수 있고, 그렇게 와인을 좋아하게 되시는 분들을 많이 봐왔다. 어떤 분의 이야기가 참 인상적 이였다. 마치 새로운 세계에서 익숙한 이야기를 들으니 달리 들린다는 이야기였다.


우리가 와인을 왜 좋아하는 것일까? 물론 개인적인 입맛 등 다양한 요인이 있으나, 이러한 이야기들이 한층 더 와인을 맛있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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