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카리아트의 삶과 일

어느 관리된 시민의 기록

by 꽃돼지 후니

프롤로그

“우리는 결국 기본소득을 논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겁니다” 화면 속 그는 차분했다.

여느 인터뷰와 다르지 않게, 검은 재킷에 단정한 표정이었다.
질문은 단도직입적이었다.

“AI와 로봇이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하게 되면 사람들은 무엇으로 살아가게 됩니까?”

잠깐의 정적 후, 그가 대답했다.

“대부분의 일은 사라질 겁니다. 기계가 인간보다 더 빠르고, 더 정확하고, 더 저렴하게 할 수 있게 되니까요.”

인터뷰어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입니까?”

그는 미소도, 비장함도 없이 말했다.

“보편적 기본소득입니다.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말은 위로처럼 들렸고, 동시에 선언처럼 들렸다.
마치 이미 결정된 미래를 설명하는 사람처럼.

“사람들은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창의적인 활동이나, 취미, 자기계발에 집중할 수 있겠죠.”

인터뷰는 희망적인 분위기로 마무리되었다.
댓글창에는 박수가 쏟아졌다.

나는 그 영상을 국가 디지털 지갑 앱 알림이 울리기 직전에 껐다.


1

07:12. 기본생활 크레딧 지급 완료.
유효기간 72시간.

나는 눈을 뜨지 않은 채 휴대폰을 잡았다.
머스크가 말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삶’이
이 알림 한 줄로 압축되어 있었다.

굶지 않는다는 안도감이 먼저 왔다.
그리고 바로 뒤이어
이 돈을 반드시 써야 한다는 압박이 따라왔다.


2

샤워를 하며 계산을 한다.
남은 잔액 41,500원.
오늘 밤 소멸 예정 18,000원.

이 돈은 내 것이 아니다.
맡겨진 것이다.
그리고 남기면 안 된다.

머스크는 말했다.
“기본소득은 자유를 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시간 제한이다.


3

아침 식사는 늘 같다.
허용된 선택지 안에서만 가능하다.

개인 카페는 정책 비적합.
프랜차이즈는 사치성 소비.
편의점만 승인된다.

나는 메뉴를 고르지 않는다.
시스템이 허락한 항목 중 하나를 통과시킨다.

결제 승인음이 들릴 때마다
나는 다시 확인한다.

나는 소비자가 아니다.
나는 관리 대상이다.


4

지하철 개찰구.
CBDC는 자동으로 교통비를 차감한다.

도시 외곽 이동에는
가중 차감이 붙는다.

“비생산적 이동 억제.”

머스크는 말했다.
“인간은 더 이상 억지로 일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나는 안다.
움직이는 것조차 이유가 필요해진 사회에서
일하지 않는 인간은 곧 이동하지 않는 인간이 된다는 걸.


5

나는 일을 한다.
하지만 직업은 없다.

데이터 라벨링

AI 결과 검수

플랫폼 대기

모두 기록되지 않는다.
경력도, 숙련도, 설명도 남지 않는다.

국가는 말한다.
“기본소득이 있으니 실업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미래를 설명할 문장을 갖지 못했다.


6

기계는 점점 더 잘 일한다.
더 빠르고, 더 정확하고, 쉬지 않는다.

머스크의 말이 떠오른다.

“기계가 대부분의 일을 더 잘할 것입니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은 굳이 일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가 되었다.

아니, 일할 필요가 없는 존재가 아니라
일에서 배제된 존재가 되었다.


7

사람들은 말한다.
“그래도 기본소득이 있잖아.”

맞다.
나는 굶지 않는다.
나는 거리로 쫓겨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쌓지 못한다.

자산도, 경력도, 이야기조차도.


8

저녁이 되면
지갑 앱은 더 자주 울린다.

소멸까지 5시간 03분.

나는 필요 없는 생필품을 산다.
화장지, 즉석밥, 통조림.

저축은 불법이지만
소비는 의무다.

이 사회에서
가장 위험한 인간은
돈을 남기는 인간이다.


9

밤이 되면
국가와 기업은
콘텐츠를 제공한다.

무료 영화, 무료 드라마, 맞춤형 감정 관리 콘텐츠.

생각할 틈은 없다.
질문은 흐릿해진다.

머스크는 말했다.
“인간은 더 창의적으로 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점점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었다.


10

어느 날
함께 일하던 사람이 사라졌다.

플랫폼에서 이름이 지워졌고
정부 앱에서도 조회되지 않았다.

사망 알림은 하루 뒤에 떴다.
원인 미상.

나는 놀라지 않았다.


11

며칠 후
알림이 왔다.

정부 지원 장례식 안내.
참석 선택.
교통비 지원.

나는 갔다.


12

장례식장은
너무 조용했다.

관은 규격화되어 있었고
꽃은 정해진 색이었다.

사진은 없었다.
직업 소개도 없었다.

그는 누구였을까.
아무도 묻지 않았다.


13

사회자가 말했다.

“이분은 국가의 보호 아래 안전하게 생을 마쳤습니다.”

그 문장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14

화장은 자동으로 진행되었다.
지연은 없었다.
불필요한 절차도 없었다.

삶도, 죽음도
효율적이었다.


15

돌아오는 길
지갑 앱이 울렸다.

기본생활 크레딧 지급 완료.
유효기간 72시간.

머스크의 인터뷰가
다시 떠올랐다.


16

“기본소득은 인간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나는 이제 안다.
그 자유가 선택이 아니라 관리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17

그날 밤
나는 오래 잠들지 못했다.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가난하지 않다.
그러나 남길 수 없다.

우리는 보호받는다.
그러나 요구할 수 없다.


18

장례식 이후 며칠 동안
나는 평소보다 오래 화면을 보았다.

무료 콘텐츠는 여전히 흘러나왔고, 알림은 정시에 울렸으며,지갑의 잔액은 정확히 소멸되었다.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사실이.

그 사람은 사라졌고, 사회는 흔들리지 않았다.


19

며칠 뒤,
공공작업 공간에서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갑자기 말을 걸었다.

“장례식… 다녀오셨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주변을 한 번 훑어본 뒤 목소리를 낮췄다.

“가끔… 사라지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완전히요.”

“죽는 게 아니라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혹시, 소멸되지 않는 돈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요?”


20

그날 이후
나는 풍문을 듣기 시작했다.

규제된 지갑 밖에서 돌아다니는 가치

사용처도, 시간 제한도 없는 교환

국가 통계에 잡히지 않는 사람들

‘관리 대상’이 아닌 존재로 남아 있는 집단

그들은 자신들을 조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지원 네트워크” 혹은 “밖에 있는 사람들” 이라고 불린다는 이야기만 들렸다.


21

그 조직이 정확히 무엇을 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누군가는 말했다. “도망자들을 돕는대.”

누군가는 말했다. “또 다른 실험일 뿐이야.”

누군가는 비웃었다. “그런 건 희망을 미끼로 한 소문일 뿐이야.”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 중 일부는
더 이상 장례식에 나타나지 않았다.


22

나는 처음으로
지갑 앱의 알림을 무시했다.

소멸까지 6시간 21분.

그 숫자가 처음으로 절대적인 명령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검색하지 않았다. 질문도 하지 않았다.

다만
오래된 메모 앱을 열어
한 문장을 적었다.

“관리되지 않는 삶은 가능한가.”


23

며칠 뒤
나는 공공작업 공간에 가지 않았다.

교통비는 차감되지 않았다.
경고도 오지 않았다.

아직은
시스템이 나를 놓치고 있었다.

나는 작은 가방 하나에
필요한 것만 넣었다.

통조림도, 즉석밥도 넣지 않았다.
그것들은
이 세계의 물건이었으니까.


24

떠나기 전날 밤
나는 마지막으로
그 장례식을 떠올렸다.

규격화된 관,
사진 없는 얼굴,
“안전하게 생을 마쳤습니다”라는 문장.

그 순간
확실히 알았다.

이 사회에서
가장 가난한 것은
돈이 아니라 선택지라는 것을.


25. 결말

떠나는 사람들

아침 7시 12분,
알림은 여전히 울렸다.

기본생활 크레딧 지급 완료.
유효기간 72시간.

나는 휴대폰을 껐다.

그 돈이
내 삶의 마지막 문장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 조직이 진짜인지
또 다른 통제인지
나는 모른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여기에 남아 있는 한,
나는 정확히 관리된 삶으로 끝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떠난다.
어디로 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이동의 이유를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삶이
어딘가에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그 가능성 하나였다.

그리고 그 가능성만으로도
나는 처음으로 인간처럼 숨을 쉬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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