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래머블 머니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권력
우리는 오랫동안 돈을 숫자로 이해해 왔다.
얼마를 벌었는지, 얼마가 남았는지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더 필요할지를 계산하는 도구였다.
하지만 지금,
돈의 본질이 조용히 바뀌고 있다.
이 변화의 이름은 프로그래머블 머니(Programmable Money)다.
돈이 더 이상 단순한 교환 수단이 아니라 규칙을 내장한 소프트웨어가 되는 순간,
금융은 기술이 되고, 기술은 곧 권력이 된다.
지폐는 중립적이었다.
만원짜리 한 장은
누가 쓰든, 어디에 쓰든,
아무 조건도 묻지 않았다.
그러나 프로그래머블 머니는 다르다.
특정 상점에서만 사용 가능
정해진 기간 안에만 사용 가능
특정 대상에게만 송금 가능
이 모든 조건이
돈 자체에 코드로 새겨진다.
이 변화는 단순한 편의성의 문제가 아니다.
돈이 규칙을 갖는 순간 금융은 자유의 문제가 된다.
지금 스테이블코인 세계는 두 개의 철학으로 나뉜다.
은행과 자산운용사가 만든 스테이블코인은 안전하고 정교하다.
준비금은 국채로 채워지고, 규제는 명확하며, 접근 권한은 제한된다.
문제는 단 하나다. 누구나 들어갈 수 없다는 것.
이 돈은 안정적이지만 동시에 통제 가능한 돈이다.
반대로 크립토 네이티브 스테이블코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은행 계좌가 없어도, 신분증이 없어도 인터넷만 있으면 접근 가능하다.
이 돈은 자유롭지만 동시에 무질서의 위험을 가진다.
현실의 세계는 이 두 극단 사이에서 새로운 균형을 찾고 있다.
그리고 그 균형이 미래의 권력 구조를 결정한다.
이 이야기가 먼 나라의 금융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한국도 이미 그 안에 들어와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코로나 시기 지급된 재난지원금은 특정 지역에서만 사용 가능했고 기한이 지나면 사라졌다.
이것은 사실상 초기 형태의 프로그래머블 머니다.
지하철 카드 잔액은 현금처럼 자유롭게 쓸 수 없다.
포인트 역시 정해진 가맹점에서만 사용 가능하다.
우리는 이미 조건이 붙은 돈 속에서 살고 있다.
지금 달라지는 점은 단 하나다.
그 조건이 국가와 플랫폼, 금융기관 전체로 확장된다는 것.
프로그래머블 머니의 핵심은 돈을 누가 발행하느냐가 아니라 규칙을 누가 쓰느냐다.
현재 세계에서는
세 가지 주체가 경쟁 중이다.
월가(은행·자산운용사)
크립토 네트워크
국가(CBDC)
그런데 흥미롭게도 CBDC는 서방에서 힘을 잃고 있다.
감시 가능성 때문이다.
결국 남는 것은
월가와 크립토의 경쟁이다.
그리고 이 경쟁은 총이나 전쟁이 아니라
돈의 규칙을 둘러싼 조용한 전쟁이다.
더 무서운 미래는 극단이 아니다.
통제도 아니고, 완전한 자유도 아니다.
각자가 돈을 벌기 위해 합리적으로 움직인 결과,
탈중앙 시스템 위에 중앙화된 권력이 쌓이는 구조다.
예를 들어,
디파이는 담보가 필요하고
가장 안전한 담보는 국채이며
국채는 월가가 발행·관리한다.
결과적으로
디파이의 심장부에 월가의 자산이 쌓인다.
아무도 장악하려 하지 않았지만 구조는 그렇게 흘러간다.
한국은 지금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다.
은행 중심 스테이블코인
플랫폼 기반 결제
글로벌 달러 스테이블코인 유입
어느 방향을 선택하든
결과는 같다.
우리는 어떤 규칙 아래 살 것인가를 선택하게 된다.
앞으로 돈을 볼 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얼마인가”가 아니다. 어떤 조건이 붙어 있는가.
이 돈은 어디서 쓸 수 있는가
누가 막을 수 있는가
언제 사라지는가
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소비자가 아니라 설계된 행동의 사용자가 된다.
프로그래머블 머니 시대에 지갑은 단순한 보관함이 아니다.
조용한 투표함이다.
우리가 어떤 돈을 쓰는지에 따라 어떤 규칙의 세상이 확장될지가 결정된다.
통제된 안정의 세계
자유로운 불안의 세계
혹은 그 사이의 새로운 질서
지금 우리의 선택은 사소해 보이지만 결국은 미래 금융 권력의 방향을 정하게 된다.
그래서 마지막 질문은 단순하지만 가장 중요하다.
지금 당신의 지갑 속 돈은 어떤 규칙 위에 올라타 있는가.
그리고 그 규칙은
정말 당신이 선택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