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고 싶진 않지만 그립다

by 낭만무애 후니

좌판에서 술 마시기 정말 좋은 날이다.

여의도 '태성을지로골뱅이'에는 오후6시부터 가게 밖에 좌판이 펼쳐진다.'

가게 안에 계시던 분들이 모두 밖으로 이동하는 진풍경이 만들어진다. 4월 제법 쌀쌀한 날씨지만 이맘때 밖에서 마시는 맥주와 치킨은 왠지 낭만적이고 술 맛이 더 나게 한다.


오늘도 여의도에 와 주신 지인들과 저녁겸 반주로 치맥 한잔을 하러 갔다. 6시 조금 넘은 시간에 이미 좌판은 만석이지만 가게 안에서 마시다 자리나면 이동하는걸로 하고 지인들과 치맥에 곁들여 수다를 했다. 어느정도 수다를 떨다보면 가게 종업원이 밖에 자리 났다고 이동할거냐 묻는다.

"오브 코스지"

어둠이 내리기 전 여의도 좌판은 진짜로 술마시기 좋다. 몇잔씩 잔이 돌고 뜬금없이 지인에게

“만약에 다시 20대, 30대로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겠어요?”

“아니, 난 지금이 더 좋아요.”
“그땐 다시 살라고 하면 자신 없어요.”


나도 잠깐 망설이다가 결국 비슷한 말을 한다.
“돌아가고 싶진 않아. 그런데… 많이 그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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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에는 서로 설명하지 않아도 아는, 복잡한 감정들이 겹겹이 포개져 있다. 돌아가길 원치 않는다는 건, 지금의 삶이 그만큼 나쁘지 않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리움이 있다는 건, 그 시절의 어떤 공기, 어떤 온도, 그때만 가능한 얼굴 표정과 대화의 리듬이 지금은 더 이상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2030대의 우리는 늘 배가 고팠다.
먹을 게 없어서라기보다, ‘살아야 한다’는 감각이 너무 날 것이어서, 늘 허기가 진 상태로 살았던 것 같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되고 싶은 것도 많고, 증명해야 할 것도 많았다. 지금의 우리에게는 당연해 보이는 직함, 연봉, 명함, 집, 가족 같은 것들이 당시에는 모두 물음표였다.


“내가 이 길로 가는 게 맞나?”
“내가 이 회사에 계속 있어도 되는 걸까?”
“이 사람과 결혼해도 되는 걸까?”


선택하는 순간마다 인생이 갈라지는 것 같았고, 그래서 모든 선택이 시험대 같았다. 새벽까지 야근하고 돌아오는 길, 지하철 창문에 비친 초라한 내 얼굴이 나를 심판하는 판사처럼 느껴지던 날도 있었다. 잘하고 있는 건지, 뒤처지고 있는 건지, 나만 멈춰 있는 건지, 모든 게 불확실했다.


겁도 많았다.
직장에서 떨어질까 봐, 관계에서 버려질까 봐, 부모 기대에 못 미칠까 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까 봐. 겁이 많아서 더 날카로웠고, 더 예민했고, 더 자주 흔들렸다. 그러면서도 겁이 많기 때문에 오히려 무모한 선택을 할 때도 있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서’라는 변명을 달고서.


그럼에도 그 시절이 그리운 이유는, 그 불안이 그냥 고통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불안은 동시에 살아 있다는 증거처럼 우리를 깨웠다. 내일을 예측할 수 없다는 건, 내일이 아직 열려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떤 아침엔 갑자기 회사를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들고, 어떤 밤엔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 뜬금없이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논하고, 또 어떤 오후에는 카페 창가에 앉아 “나 진짜 뭘 해야 할까?”를 몇 시간씩 떠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고민의 절반은 허공을 맴도는 공상에 가까웠지만, 그 허공을 헤집는 말들 속에서 우리는 자기 인생을 어떻게든 설계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때는, 그냥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하루를 다 써버렸다.
아침에 눈을 뜨면 출근할지, 이직 사이트를 볼지, 공부를 할지, 사람을 만날지, 단순한 선택마저 내 인생의 방향을 건 결투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늘 지치고, 늘 번아웃에 가까웠지만, 동시에 뚜렷한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지금보다 훨씬 부족했고, 훨씬 덜 배웠고, 훨씬 덜 벌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때의 나를 떠올리면 눈빛이 또렷하다. 덜다려진 옷을 입고 구겨진 가방을 들고 다니던, 지갑은 얇고 자존심은 두꺼웠던 그때의 나를 생각하면, 마음 한 구석이 묘하게 뜨거워진다. ‘참 바보 같았지만, 그래도 치열했지’라는 인정 같은 것.


지금의 우리는 그 시절 덕분에 겨우 도착한 어딘가에 서 있다.
전세든 자가든, 월세 계약 날짜에 매달리지 않게 된 집이 있고, 내 이름이 적힌 명함이 있고, 어느 정도 쌓인 경력이 있고, “이 일을 최소한 이 정도는 할 줄 안다”는 자기 확신도 있다. 삶의 기본 구조가 자리 잡히니, 예전처럼 내일이 완전히 무너질 것 같은 공포는 줄어들었다.


안정이 찾아오자, 우리는 비로소 행복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여유를 갖게 되었다.
예전에는 ‘생존’과 ‘성공’이 우선이었다. 밥벌이가 먼저였고, 인정을 받는 것이 절실했다. 지금은 겨우 숨이 조금 돌면서, “그래서 나는 행복한가?”, “나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고 있는가?”를 되묻는다.


그리고 깨닫는다.
그때는 행복을 준비하느라 너무 바빠서, 정작 행복을 누릴 틈은 별로 없었다는 것을.
반대로 지금은 행복을 누릴 조건은 훨씬 좋아졌지만, 그때의 날것 같은 감정은 많이 옅어졌다는 것을.


지금의 나는, 그 시절의 나에게 고맙다.
아무도 보장해 주지 않는 내일을 향해, 수많은 실패와 불안을 견디며 앞이 안 보이는 터널을 걸어준 그 시절의 나 덕분에, 지금의 나는 이만큼 안전한 길 위에 서 있다. 그리고 아마 내 주변의 친구들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것 같다(요즘 20대 자식들이 내가 경험했던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듯해서 안심?이 된다고할까...).


그래서 술자리에서 그 질문을 던질 때,
“그때로 다시 돌아갈래?”
대부분의 대답이 “아니”인 건, 그때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그때의 자기 자신을 이미 충분히 존중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때의 나를 다시 시험대 위에 올리고 싶지 않은 마음, 다시 그만큼 치열하게 흔들리고 싶지 않은 마음. 그것은 회피가 아니라 일종의 예의 같은 것이다. ‘그 정도면 됐다, 고생했다’라고 말해 주는 태도.


그럼에도 왜 그리울까.
돌아가고 싶지는 않지만, 왜 이렇게 자꾸 그 시절 이야기를 꺼내게 되는 걸까.


아마도 그때뿐인 공기와 밀도 때문일 것이다.
그 시절의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자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했다.
카톡 단체방 대신, 동네 호프집 구석 테이블이 있었고, 당구장 구석에서 짜장면을 시켜먹고 있었거나, 온라인 커뮤니티 대신 새벽 감성으로 주고받는 긴 문자와 전화가 있었다. 알고리즘이 추천해 주는 콘텐츠 대신, 친구가 들려주는 노래와 직접 건네는 책이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시간을 너무 많이 가져갔다.
지금 기준으로는 비효율적이었고, 어쩌면 낭비였다. 하지만 그 비효율 속에서 관계는 깊어졌다. 단순한 정보 교환이 아니라, 같이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 아무 말 없이 걷는 시간,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몰라서 괜히 숨만 깊어지는 시간들이 있었다.


지금은 효율이 좋아진 대신, 그런 ‘허투루 보내는 시간’이 많이 줄었다.
이제 우리는 서로의 시간을 최소한으로 침범하려 애쓴다. 약속은 캘린더에 맞춰 딱 맞게 잡고, 빈 시간엔 각자의 기기로 흩어진다. 분명 더 편해졌고, 더 똑똑해졌고, 더 안전해졌는데, 가끔은 그때처럼 누군가와 어설프게 시간을 낭비하고 싶어진다. 아무 의미 없는 농담과 허황된 계획을 늘어놓다가, 막차 시간도 잊어버린 채 밤을 새우고, 다음 날 아침에 비몽사몽 출근하던 그런 무모함이 그립다.


돌아가고 싶지는 않지만, 그리운 건 바로 이런 순간들이다.
이제는 다시 만들기 어려운, 나이와 상황과 시대가 만들어준 특수한 조합의 시간들. 그때의 빈 지갑, 실패의 두려움, 상사의 눈치, 부모의 기대, 연애의 불안까지 모두 포함한, 한 덩어리의 삶.


그래서 나는 가끔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가 진짜로 원하는 건, 20대·30대라는 숫자로서의 과거가 아니라, 그 시절의 ‘감정 구조’를 지금의 나이로 잠깐 빌려오는 것 아닐까.


지금의 안정 위에서, 그때처럼 조금 더 무모해지고, 조금 더 솔직해지고, 조금 더 깊이 사람을 만나고, 조금 더 뜨겁게 무언가에 매달려 보는 것. 인생이 걸린다는 착각을 하면서 프로젝트를 시작해 보고, 말도 안 되는 꿈을 같이 떠들어 보고, 아무 의미 없는 밤을 허비해 보는 것.


물론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다. 책임질 것들이 너무 많고, 잃고 싶지 않은 것들이 너무 많다. 그걸 알기에 우리는 쉽게 다시 ‘그때처럼’ 살 수 없다. 바로 그래서 “돌아가고 싶진 않다”는 말이 진심이다.


하지만 그리움은, 돌아가겠다는 결심이 아니라, 그 시절의 나를 인정하는 방식이다.
“그때의 나는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지금의 내가 있다.”
이 사실을 마음속에서 조용히 확인할 때, 비로소 그리움은 미련이 아니라 감사에 가까운 감정이 된다.


돌아가고 싶진 않지만, 그립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친구들과 마주 앉아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야, 진짜 다시 20대, 30대로 돌아갈래?”


그리고 알면서도 또다시 같은 대답을 한다.
“아니야, 난 지금이 더 좋아.”
그러고 나서,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옛날 이야기를 한참 더 늘어놓는다.


그 말 속에 숨은 진짜 속마음은 아마 이런 거 아닐까.
그때의 나야, 고맙다.
다시 살라고 하면 못 살 것 같으니까, 그냥 그 시절의 너는 거기 그대로 있어줘라.
나는 여기서, 네가 만들어 준 오늘을 최대한 잘 살아볼게.


돌아가고 싶진 않지만, 그래서 더, 참 많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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