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와인 만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개인 척한 고냥이 Jun 03. 2021

뽐뿌, 혹은 와인지옥

개미지옥을 아는가. 아마 자연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서 한번 쯤은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모래밭에 절구 모양으로 뚫린 개미지옥은 그야말로 개미들에겐 지옥이다. 한 번 미끌어지면 살아서 빠져나올 수 없다. 개미지옥의 가장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개미귀신. 어떻게든 개미지옥을 벗어나겠다고 기어 올라가는 개미들에게 그야말로 귀신같이 모래를 뿌린다. 결국 아래로 굴러떨어진 개미는 개미귀신의 날카로운 턱에 물려 체액을 쪽쪽 빨리고 만다. 왜 갑자기 개미지옥 얘기냐고? 더위가 본격 몰려오기 전 재고를 털어내려는 샵들의 노력이 집중되는 시기인 요즘이 바로 본격적인 와인 장터 시즌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모 마트의 장터가 끝났고, 온누리 상품권 사용이 가능한 중소 규모의 모 마트 또한 금주부터 와인 장터에 돌입한다. 여기에 대형 와인샵과 대기업 체인점의 정기 할인이 맞물리니 매일 장터가 이어지는 느낌이다.  


"어머! 이건 사야 해!!"


대규모 와인 장터는 애호가들에겐 개미지옥과 다를 바 없다. 업체들이 단골들에게 보내는 메일링 리스트는 구미가 당기는 와인들로 가득차 있다. 평상시에는 쉽게 손이 가기 어려웠던 고가의 프리미엄 와인들이 높은 할인율로 유혹한다. '줄서기 상품', '12병 한정' 이라고 표시된 상품을 누가 먼저 집어갈까 장터 시작 당일에 불이나케 뛰어간다. 요행히 초특가 와인들을 몇 병 건지고 나면 다른 와인들에도 눈이 가기 마련이다. 평상시 즐겨 마시는 와인들이 오천 원, 만 원씩 저렴하게 나와 있으니 이것저것 카트에 담게 된다. 마치 개미지옥에 빠진 개미에게 개미귀신이 뿌리는 모래마냥 피해 갈 도리가 없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박스에 가득 찬 와인들이 계산대에 올라간 후다. 비로소 지름신을 영접했던 영혼이 육신으로 돌아오는 기분. 하지만 결제는 완료되었고 잔고가 바람에 스치울 일만 남았다. 딱 개미귀신에 체액을 빨린 개미 꼴이다.  


이렇게 애호가를 탈탈 터는 장터는 연중 계속된다. 이맘때는 물론, 더운 여름이 오기 전에도 재고털이를 위한 대형 할인 행사가 있다. 이외에도 매월 업체 별, 지점 별 크고 작은 행사들이 이어진다. 뽐뿌의 연속이다. 혹자는 이런 할인행사가 뭐가 문제냐고 할 지도 모르겠다. 고객은 와인을 싸게 살 수 있어서 좋고, 판매자는 대량 판매를 통해 이익을 얻으니 상호간에 좋지 않냐는 얘기다. 구매는 소비자가 ‘합리적으로’ 하고 그에 따르는 책임도 본인이 지는 자유시장경제, 참으로 이상적이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나는 어떤가. 견물생심(見物生心). ‘이 와인이 이 가격에?’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안 사기 어렵다. 장터기간 와인카페나 소셜 미디어에 올라오는 수많은 ‘득템’과 ‘박스떼기’ 사진들을 보라. 이렇게 구매한 와인들은 셀러나 와인 랙(wine rack) 등 와인 저장 공간으로 설정한 곳을 다 채우고도 모자라 옷장 서랍이나 찬장, 냉장고, 신발장까지 굴러다니게 된다. 이는 무차별적인 음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와인이 계속 쌓여 가면 마셔야겠다는 의무감(?)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매일 마셔도 와인은 계속 늘어나기만 한다. 이어지는 장터에 마시는 속도가 구매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 일반적으로 와인 하면 건강하고 여유로운 음주문화를 떠올리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또 다른 이슈는 정보의 비대칭성. 정찰제가 아니기 때문에 고객이 와인 가격에 대해 정확히 알기 어렵다. 당연히 할인율 또한 알수 없다. ‘이 와인 가격은 원래 얼마인데 할인해서 얼마’라고 하면 그대로 믿을 수 밖에 없다. 정보의 비대칭성 앞에 합리적인 구매는 무력화된다. 해외 가격검색 사이트 등을 참고하는 애호가들도 있으나 각국의 세금제도 및 시장 상황이 달라 한계가 있다. 게다가 엄청나게 다양한 와인들을 모두 검색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일부 프리미엄 와인들은 빈티지에 따라 매년 가격이 변동되기도 하니 더욱 복잡하다. 무엇보다 와인 가격에 대한 불신이 쌓인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30% 할인을 해도 남는다는 얘기네? 그럼 원가는 얼마...?’ 이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한 번 할인가에 와인을 사면 그보다 높은 가격에 구매하기는 싫어진다. 상시 판매가에는 와인을 안 사는 것이다. 비교적 고가 주류인 와인에서 몇 %의 할인만 받아도 상당한 금액이니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당연하다.  


결국 장터가 거듭됨에 따라 고객은 와인을 정가에 사서는 안된다는 학습을 거듭하는 꼴이다. 장기적으로 소비자와 판매자 간의 신뢰는 무너진다. 초등학생 방학 숙제마냥 매 시즌 흘러나오는 ‘와인 가격에 거품이 많다’는 언론 보도가 이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는 반론도 많다. 와인을 할인가에 내놓아야 하는 수입사들도 힘들다는 것. 일부 ‘초특가 한정상품’ 등은 울며 겨자먹기로 손해를 보며 내놓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레이블 불량 상품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멀쩡한 와인 레이블을 긁는다는 웃지 못할 소문까지 들린다. 게다가 이런 행사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준비부터 운영에 이르기까지 많은 노력과 인력이 필요하다. 담당 직원의 경우 할 때마다 야근은 필수다. 게다가 행사 와인을 세팅하고 행사 후엔 들여놔야 하니 물리적인 힘도 만만치 않게 든다. 판매 직원의 애환도 적지 않다.


이쯤되면 진짜 개미지옥, 아니 와인지옥이다. 개미귀신 격인 판매 직원도 행복하지 않다는 점에서는 개미지옥보다 더 심하다. 개미귀신은 성장하면 아름다운 명주 잠자리로 변하기라도 하지. 우리의 와인시장이 아름답게 변화할 수 있는 길이 개미지옥같은 장터에 있지는 않을 것 같다. 헬조선을 살기도 힘든데 와인을 위해서도 꼭 ‘헬’에 들어가야 하는가. 

매거진의 이전글 와인이 일상 음료가 되려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