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격, 구매 편의, 전형성, 일관성, 외관 등 다섯 가지 기준
지인으로부터 와인을 추천해달라는 얘기를 들으면 난감할 때가 많다. 순간적으로 떠오르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보통은 원하는 스타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얘기해 주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실 물어보는 사람이야 '와인 하나 추천해줘' 외엔 별다른 생각이 없을 수 있다. 그냥 맛있는 와인 한 병 마시고 싶을 뿐인데 구체적인 요구사항을 말해 달라고 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지도 모른다.
이런 경우 다음 다섯 가지의 원칙을 가지고 와인을 추천한다. 물론 품질이 좋아야 한다는 것은 기본이니 제처 두도록 하자. 첫째, 가격이 합리적일 것. 인간은 경제적 동물인 이상 가장 중요한 것은 가격이다. 둘째, 마트나 백화점 등에서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을 것. 아무리 가격이 저렴해도 살 곳이 마땅치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니까. 셋째, 지역/품종/생산자의 전형성을 드러낼 것. 그래야 다음에 다른 와인을 찾을 때 기준점으로 삼을 수 있다. 넷째, 매년 꾸준한 품질을 유지할 것. 빈티지에 따라 품질 차이가 큰 와인이라면 쉽게 추천하기 어렵다. 다섯째, 레이블/병모양 등 외관이 깔끔하고 아름다울 것.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 선물용이라면 더욱 그렇고.
첫 번째로 위 원칙에 의거해 가장 많이 추천했던 네 가지 레드 와인을 소개하고자 한다. ‘강력 추천 빅 4’랄까. 와인 추천 요청에 대한 공개적 답변인 셈이다.
토레스, 그랑 코로나스 (Torres, Gran Coronas)
“토레스는 배반을 하지 않는다!” 와인 추천을 할 때 내가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다. 스페인 와인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이 와이너리에서 생산하는 어떤 와인을 골라도 크게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좋은 품질과 이른 뒷받침하는 가격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특히 그랑 코로나스는 와인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한 생각을 갖게 만들어 준, 개인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지닌 와인이다. 국내 선호도가 높은 국제 품종인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을 중심으로 토착품종인 템프라니요(Tempranillo)를 15% 블렌딩하여 누구에게나 친근한 맛을 선사하며 ‘찬란한 왕관’이라는 의미와도 잘 맞아떨어지는 격조를 지니고 있어 선물용으로도 적당하다.
제나토, 발폴리첼라 수페리오레 (Zenato, Valpolicella Superiore)
‘이태리 와인은 시큼하고 떨떠름해 좋아하지 않는다’는 분들을 가끔 만나게 되는데 그런 선입견을 단박에 날려 줄 와인이 바로 제나토 발폴리첼라 수페리오레다. 이태리 북동부 베네토 부근의 토착 품종인 코르비나(Corvina, 80%)와 론디넬라(Rondinella, 10%), 오셀레타(Oseleta, 10%)를 블렌딩하여 만든 이 와인은 향긋한 꽃 향기와 신선한 붉은 과실 풍미, 그리고 모카 초코 힌트가 새콤한 산미와 어우러져 훌륭한 밸런스를 이끌어낸다. 우아함과 편안함의 미덕을 고루 갖춘 데일리 와인이다. 다가오는 봄을 맞아 피크닉이나 캠핑 용으로 한 병 챙기기도 안성맞춤. (※ 수입사가 문을 닫는 바람에 현재는 미수입 상태이지만 조만간 좋은 수입사를 다시 만나게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콜럼비아 크레스트 그랜드 에스테이트 멀롯 (Columbia Crest, Grand Estates Merlot)
미국 와인은 비싸다는 편견을 깨자. 합리적인 가격에 맛볼 수 있는 대표적인 미국 와인이 바로 콜럼비아 크레스트 그랜드 에스테이트다. 미디엄풀 바디에 밸런스가 좋은 와인이지만 갈비찜 등 간장 양념 요리에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풍미의 밀도가 높다. 진하면서도 섬세하고, 섬세하면서도 강하게 어필하는 와인이랄까. 그래서인지 매년 <와인 스펙테이터(Wine Spectator)>, <와인 애드버킷(Wine Advocate)> 등 유수 와인 언론들로부터 꾸준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WS 100대 와인에는 단골손님이다. 최근 변경된 레이블로 세련된 이미지를 더했다.
산 페드로, 몰리나 리제르바 까르미네르 (San Pedro, Castilo de Molina Reserva Carmenere)
몇 년 전 후배의 집에 놀러 갔다가 함께 장을 보러 나온 적이 있다. 뭘 먹을까 고민하던 중 트럭에서 파는 로스트 치킨을 발견하고 단박에 저녁 메뉴로 낙점해 버렸다. 탁자 위에 닭 두 마리를 푸지게 펴 놓고 코르크를 열었던 와인이 바로 몰리나 리제르바 까르미네르. 친근한 흙 내음과 매콤한 스파이스, 적절한 산미와 알코올 기운이 로스트 치킨의 풍미와 너무나도 잘 맞아떨어졌다. 순식간에 와인 한 병이 닭 두 마리와 함께 자취를 감춰 버렸다. 몰리나 까르미네르는 닭고기뿐 아니라 쇠고기 돼지고기는 물론 다양한 음식과의 좋은 친화력을 보이는 와인이다. 같은 급의 화이트 와인 몰리나 리제르바 소비뇽 블랑 또한 애호가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