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언할 수 있다. 리슬링은 참으로 매력적인 품종이다.
단언할 수 있다. 리슬링(Riesling)은 참으로 매력적인 품종이다. 산뜻하고 개운한 과일 자체의 풍미는 물론 긴 여운을 남기는 상큼한 신맛과 영롱한 미네랄 또한 훌륭하다. 특히 독일, 오스트리아 등 북부 유럽의 와인 산지에서 떼루아(terroir)의 개성을 잘 반영하는 품종으로 각광받고 있으며 호주나 뉴질랜드, 미국 등 세계 각지에서 재배하고 있다. 완전히 드라이한 와인부터 꿀 같이 달콤한 디저트 와인까지 스타일도 다양하다. 어릴 때 신선하고 상큼하게 마시기도 좋고 십 년 이상의 숙성할 수 있는 잠재력 또한 지니고 있다. 영국의 와인 평론가 잰시스 로빈슨(Jancis Robinson)이 열렬한 리슬링 마니아로 알려져 있다.
리슬링은 음식과 매칭하기에도 아주 좋은데, 특히 스파이시한 요리와 잘 어울리는 와인으로 자주 거론된다. 즉, 한식, 중식, 태국요리 등 아시아 음식과 함께 즐기기에 적절한 와인이라는 뜻이다. 탕수육이나 팔보채, 유산슬 등 중화요리는 물론 태국식 볶음면이나 카레, 간장을 살짝 찍은 생선회나 레몬 혹은 초고추장과 함께 즐기는 생굴과도 적절히 어울린다. 개인적으로도 굴소스를 가미한 볶음 요리에 오프드라이 정도의 단맛 감도는 리슬링을, 날것이거나 가볍게 조리한 해산물 요리에 드라이 리슬링을 곁들이는 것을 좋아한다. 이외에도 배달 음식인 치킨, 피자, 족발과도 무난하게 어울린다. 한 마디로 가정 식탁에서 편안하게 즐기기에 어울리는 와인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리슬링은 아직 한국에서 그렇게 사랑받는 품종은 아닌 듯하다. 리슬링의 종주국 격인 독일 화이트 와인의 국내 수입량은 200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답보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특히 훌륭한 생산자의 퀄리태츠바인(Qualitätswein) 급 와인 중에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즐길 수 있는 밸류 와인들이 상당수 존재하는데 수입이 중단되었거나 시중에서 잘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아 아쉽다. 게다가 과거에는 와인샵 매대에서 가끔이나마 만날 수 있었던 호주나 뉴질랜드의 밸류 리슬링들 중 상당수가 자취를 감춘 점도 안타깝다.
어쩌면 리슬링의 종주국인 독일 와인 등급 체계의 복잡함이나 용어의 생소함이 리슬링을 외면하게 되는 한 이유가 될지도 모르겠다. 또한 한국 소비자들의 드라이 와인, 그리고 레드 와인을 선호 취향이 반영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는 독일 화이트 와인에 대한 편견과 맞물려 리슬링 하면 시큼하고 들큰한, 그리고 일반적으로 낮은 품질의 와인이라는 인식으로 확장된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리슬링은 넓은 당도의 스펙트럼과 다양한 스타일을 지닌 와인이다. 스위트한 와인은 물론 완전히 드라이한 와인도 생산되며, 최근에는 독일의 와인 법령 개정과 함께 양질의 드라이 리슬링 생산이 증가하는 추세다. 스위트 리슬링 또한 도수는 낮고 과실의 신선한 풍미와 산미가 조화를 이루는 와인이 많아 평소 모스카토 등을 즐기는 애호가에게도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있다.
한 가지 더 집고 넘어가자. 리슬링, 특히 몇 년 이상 숙성된 리슬링에서는 독특한 미네랄 풍미가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평론가들이 ‘페트롤(petrol)’ 향이라고 표현하는, 석유 화합물 냄새와 유사한 향이다. 이 페트롤 향에 대해서는 애호가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어려운 매력적인 향이기도 하다. 게다가 리슬링은 기본적으로 시트러스와 핵과, 멜론 등의 열대 과일, 꽃과 꿀 뉘앙스 등 친근한 향과 매력적인 풍미가 뒷받침되는 와인이다. 이제 그 향긋함과 싱그러움, 그리고 친근함을 제대로 느껴볼 때가 되었다. 일단 한 번 마셔 보라.
슐로스 폴라즈 라인가우 리슬링 카비넷 (Schloss Vollrads, Rheingau Riesling Kabinett)
가벼운 페트롤 향이 감도는 시트러스, 사과, 핵과 아로마. 입에 넣으면 감귤, 포도 과육, 백도 등 신선한 과일의 쥬이시한 풍미. 상큼한 산도가 적당한 단맛에 실려 아름답게 표현되며 풍미와 알코올의 밸런스 또한 훌륭하다. 코르크(Cork) 대신 깔끔한 유리 마개인 ‘비노락(Vino-lock)’을 사용했으며, 세련된 스트라이프 패턴과 심플하면서도 우아한 레이블로 장식된 슐로스 폴라즈 만의 녹색 와인병과 함께 그 매력을 더한다. 필자가 처음 화이트 와인에 관심을 갖게 만들어 준 와인으로 지금까지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 다양한 음식과 무난하게 어울리며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만한 편안한 와인이다. 또한 독일 고품질 와인 등급인 프래디카츠바인(Pradikätswein)의 품계 중 하나인 ‘카비넷(Kabinett)’이라는 용어를 1716년 처음 사용한 것이 바로 슐로스 폴라즈이다.
프리츠 하그 브라우네베르거 리슬링 카비넷 (Fritz Haag, Brauneberger Riesling Kabinett)
개운한 라벤더, 상큼한 시트러스, 달콤한 서양배와 파인애플, 잘 익은 복숭아 등 신선하고 풍성한 아로마에 가벼운 패트롤 미네랄이 더해진다. 크리미한 질감에 풍만한 인상의 미디엄 바디, 크리스피한 산미와 아련한 단맛, 쌉쌀한 여운이 매력적이다. 카비넷 급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군계일학의 품질. 이렇게 신선하고 가벼우면서도 본질을 담아내는 와인은 흔치 않다. 브라우네베르크(Brauneberg)라는 마을 이름만 표시되었지만 프리츠 하그가 소유한 이름 높은 두 포도밭인 유퍼(Juffer)와 유퍼 존넨우어(Juffer Sonnenuhr)에서 수확한 포도만을 블렌딩하여 양조한다.
반 폭셈 자르 리슬링 트로켄 (Van Volxem, Saar Riesling trocken)
연기 미네랄과 라벤더 허브의 첫 향. 핵과 향은 단단하게 뭉쳐 초반에는 쉽사리 퍼져 나오지 않는다. 스월링을 하면 서서히 드러나는 섬세한 배 아로마, 레몬 라임 계열의 시트러스 아로마 또한 섬세하지만 밀도 높게 느껴진다. 입에 넣으면 달콤한 조린 사과, 황도 풍미에 곁들여지는 오렌지 속 껍질 뉘앙스. 미디엄(풀) 정도의 비교적 두툼한 바디에 드라이하지만 가벼운 잔당감이 느껴지며, 여운을 지배하는 강한 산미와 쌉쌀한 피니시가 깔끔한 입맛을 선사한다. 전반적으로 산미의 골격과 미네랄리티가 뛰어나다는 인상을 받았다. 반 폭셈은 모젤(Mosel)의 명가 에곤 뮐러(Egon Müller)와 이웃하고 있는 비교적 신생 와이너리다. 에곤 뮐러의 전 와인메이커인 도미니크 뵐크(Dominik Völk)를 고용하고 양질의 포도밭을 매입하는 등 고품질 와인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샤토 생 미셀 콜럼비아 밸리 리슬링 (Chateau Ste. Michelle, Columbia Valley Riesling)
생 오렌지 껍질, 시트러스, 자몽, 멜론, 달콤한 배와 사과, 살구 등 다양한 과일 풍미가 매력적으로 드러난다. 기저에 깔려 있는 시트러스의 상큼한 신맛이 가벼운 단맛을 제어하며, 쌉싸름한 미네랄은 가벼운 허브 힌트와 아름답게 어우러진다. 미디엄 바디에 가벼운 페트롤 향과 프루티한 풍미가 대단히 친근하게 다가오는 리슬링이다. 가격 또한 저렴한 편으로 처음 리슬링을 접하는 분이라도 부담 없이 집어 들 수 있을 것이다. 샤토 생 미셸은 미국 워싱턴 주에 위치한 와이너리로 리슬링은 물론 레드와 화이트를 망라한 다양한 품종의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전반적인 품질이 훌륭한 데다 가격 또한 합리적인 편으로 와인 스펙테이터 등 다양한 와인 언론들로부터 매해 꾸준한 호평을 얻고 있다.
위겔 에 피스 알자스 리슬링 (Hugel & Fils, Alsace Riesling)
처음엔 약간의 페트롤과 흰 꽃, 시트러스, 핵과 아로마가 가볍게 느껴질 뿐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향기의 밀도가 강해하게 드러난다. 입에 넣으면 입안을 강하게 압박하는 산미와 견고한 구조감이 과일 풍미에 앞서 느껴지며 그린애플, 라임 등 녹색 과일의 풍미에 가벼운 토스티 힌트가 더해진다. 단정하고 클래식한 인상의 리슬링으로 신선한 샐러드나 가벼운 소스의 해산물 요리와 잘 어울린다. 휘겔은 1639년부터 무려 12대에 걸쳐 알자스에서 와인을 만들고 있는 대표적인 생산자다. 특히 방당주 타르디브(Vendange Tardive, 집중된 맛과 높은 잠재 당도를 갖는 ‘늦수확’ 포도로 만드는 와인)의 개척자로, 현재 알자스의 방당주 타르디브 관련 규정도 휘겔에 의해 준비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방당주 타르디브와 셀렉시옹 드 그랑 노블(Selection de Grains Nobles, 귀부화된 포도알만 골라 양조한 와인)등 프리미엄 와인은 물론 정띠(Gentil)를 비롯한 엔트리급 와인까지 모두 훌륭한 품질을 갖추고 있는 것이 바로 휘겔의 진정한 장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