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에 깊이 빠지게 되면 와인과 관련한 모든 것에 관심이 쏠리기 마련이다. 와인 글라스나 소믈리에 나이프 등 액세서리를 구비하고 아끼는 와인을 보관할 와인 셀러를 구매할 지 고민을 시작한다. <사이드웨이(sideways, 2004)>나 <와인 미라클(Bottle Shock, 2008)> 같은 와인을 소재로 다룬 영화가 개봉하면 반드시 찾아보고, <몬도비노(Mondovino, 2004)>, <와인의 땅, 프리오라트(Priorat Dreaming of Wine, 2016)> 같은 와인 다큐멘터리나 다섯 시간에 이르는 학습 DVD <잰시스 로빈슨의 와인 코스(Jancis Robinson's Wine Course, 2004)>도 지루한 줄 모르고 시청한다. 어디 그 뿐인가. 본격적인 와인 공부를 위한 개론서와 시음 방법론 서적들이 책꽂이를 점령하며 영국의 <디캔터(Decanter)> 나 미국의 <와인 스펙테이터(Wine Spectator)> 등 해외의 와인 전문지를 정기 구독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가장 쉽고 편안하게 즐기는 콘텐츠인 만화도 예외가 아니다. 이미 와인 업계와 애호가는 물론 일반인 사이에도 널리 알려진 와인 만화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신의물방울(神のしずく)>과 <소믈리에르(Sommeliere)>다.
와인 만화의 대명사, <신의 물방울>
<신의 물방울>은 설명이 필요 없는 베스트 셀러다. 유명 와인 평론가의 두 아들이 아버지가 남긴 유산을 두고 ‘12사도’와 ‘신의 물방울’로 상징되는 와인들을 알아내기 위해 경쟁을 펼치는 스토리로 총 44권으로 완결되기까지 300만 부 이상이 팔리는 큰 인기를 누렸다. 출간 초기엔 ‘사도’로 소개된 와인은 물론 부가적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와인조차 인기가 급상승하여 가격이 대폭 인상되는 현상이 발생했을 정도로 <신의 물방웅>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와인을 잘 모르는 사람도 <신의 물방울>은 알 정도로 인지도가 높았고, 기업 CEO의 필독서로 인식되기도 했다. 그렇기에 <신의 물방울>은 와인이 대중화되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만큼 많은 비판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우선 12개의 ‘사도’들이 대부분 일반인들은 구매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가라는 사실이 여론의 뭇매를 맞았고 유럽 이외의 와인은 하나 밖에 포함되지 않았을 정도로 유럽, 특히 프랑스에 편중되었다는 점도 이슈가 되었다. 무엇보다 가장 논란이 된 것은 시음한 와인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세계 최고의 와인 평론가로 등장하는 칸자키 유타카부터 그 아들들인 칸자키 시즈쿠와 토미네 잇세 등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은 와인을 개인적인 경험이나 자유연상에 의해 떠오르는 이미지로 표현한다. 예를 들어 주인공인 시즈쿠가 “라투르(chateau Latour)가 오케스트라처럼 역동적이라면 라피트(Chateau Lafite Rothschild)는 고성처럼 단정하고 중후하며 차분해” 라고 감탄하면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동의하는 식이다. 이는 <미스터 초밥왕>이나 <맛의 달인>과 같은 일본의 대표적 요리 만화에서 음식 맛을 묘사하는 스타일과 일맥 상통한다. 하지만 이런 식의 개인적인 감상에 대해 다른 사람이 그대로 동의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사람마다 와인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떠오르는 이미지가 제각각 다른 게 당연하지 않은가. 게다가 <신의 물방울>의 와인에 대한 평가 및 묘사 방법은 와인의 빛깔과 향, 맛 등을 통해 와인의 상태와 품질을 평가하는 일반적인 와인 평가 방법과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와인 업계에서 통용되는 객관적 기준이나 용어 보다는 주관적이고 애매한 표현이 많이 쓰인다는 얘기다.
사실 <신의 물방울> 은 와인과 와인업계를 소재로 스토리가 전개되지만, 작품 구조와 전개 방식은 전형적인 무협지나 판타지의 플롯과 유사하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신의 물방울>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주요 원인일지도 모른다. 와인을 잘 모르더라도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장황하고 과장된 와인평 또한 극적 재미를 배가하기 위한 의도적인 수법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주관적 이미지에 치중한 감성적인 묘사 방식이 꼭 무의미하거나 잘못된 것만도 아니지 않은가. 와인의 성격을 객관적으로 드러내고 평가하는 데는 문제가 있을 지 모르지만, 와인과 사람이 교감하는 시공간의 정취를 드러내는 데는 이렇게 시적이고 감흥에 젖은 표현이 더 알맞은 방법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신의 물방울>의 전개와 표현 방법에 어느 정도 면죄부를 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예술적 가치나 수준은 별도로 판단할 문제다.
와인을 통해 사람을 본다, <소믈리에르>
<소믈리에르>는 와인에 대해 무한한 애정을 가진 여주인공 이츠키 카나가 소믈리에르로 일하면서 겪는 에피소드를 통해 와인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소개하는 옴니버스 형식의 만화다. 원작자인 아라키 조 씨는 <소믈리에(Sommelier)>, <순간의 와인(瞬のワイン 新ソムリエ)>, <바텐더(Bartender)> 등 다수의 와인 및 주류 만화를 집필한 베테랑 작가답게 일반적인 와인 지식부터 비하인드 스토리에 이르기까지 알찬 내용들을 작품 요소요소에 녹여 내는 데 탁월한 재주를 지니고 있다. 게다가 매 회가 끝날 때마다 에피소드에 소개된 와인의 성격과 정보가 요약되어 있어 와인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와인의 자유’라는 칼럼 또한 이 만화의 큰 장점 중 하나다. '와인의 자유'는 감수를 담당한 호리 켄이치 씨가 만화에 소개된 와인을 심도 있게 설명하고 에피소드의 내용을 보완하는 성격으로 책의 뒷부분에 실려 있다. 오랫동안 와인을 공부해 온 소믈리에이자 칼럼니스트인 호리 씨의 전문 지식과 편견을 깨는 시각이 듬뿍 녹아 있어 일반 애호가는 물론, 와인 업계 종사자나 와인을 공부하는 학생에게도 도움이 될 내용이 많다.
<소믈리에르>는 기본적으로 와인이 담고 있는 의미에 포커스를 맞춰 스토리가 전개된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점이 사람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가는 신기한 상황이 발생한다. 주인공의 고뇌와 등장인물들 사이의 갈등이 와인을 통해 해소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와인에서 인간으로 주제가 옮겨지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와인이 아니라 그것을 마시는 인간’이라는 작가의 의도를 페이지를 넘길 수록 강하게 느끼게 된다. 대체로 편안한 그림체와 멋진 스토리로 즐겁고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 바로 <소믈리에르>다.
* <신의물방울>: 아기 타다시 글, 오키모토 슈 그림, 학산문화사 출판. 44권 완간.
* <소믈리에르>: 아라키 조 원작, 마츠이 카타노리 그림, 호리 켄이치 감수, 학산문화사 출판. 21권 완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