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lpolicella)
셰익스피어의 명작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으로 유명한 도시 베로나(Verona). 하지만 와인 애호가라면 로미오와 줄리엣보다 아마로네(Amarone)를 먼저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사실 베로나는 이탈리아에서 와인 생산량이 가장 많은 지역이다. 과일 풍미가 청량하게 드러나는 깔끔한 스파클링 와인 프로세코(Prosecco), 신선한 시트러스 풍미와 파삭한 신맛이 매력적인 화이트 와인 소아베(Soave) 모두 베네토 지역에서 나온다. 하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바로 사랑스러운 체리 풍미와 가벼운 쌉쌀함이 입맛을 돋우는 레드 와인 발폴리첼라(Valpolicella)다. 물론 발폴리첼라에서 만드는 농밀하면서도 우아한 프리미엄 와인 아마로네와 그 동생 격인 리파소(Ripasso)도 함께다.
발폴리첼라 와인 산지는 베로나 시 북쪽의 산악지역에 넓게 펼쳐져 있다. 전통적으로 발폴리첼라를 만들던 곳은 베로나 시 북서쪽으로 가르다 호수 옆 바르돌리노(Bardolino)와 경계를 이루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1968년 발폴리첼라가 DOC로 지정되며 생산지가 동쪽의 소아베(Soave) 생산지까지 확대됐고, 기존에 발폴리첼라를 만들던 지역은 클라시코(Classico)라는 공식적인 수식어가 붙었다. 베로나 시 바로 북쪽에 위치한 발폴리첼라 발판테나(Valpolicella Valpantena) 또한 공식 하위 지역으로 지정되어 레이블에 표기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냥 발폴리첼라든 발폴리첼라 클라시코나 발폴리첼라 발판테나든 일반적인 와인 품질 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그보다는 생산자나 세부 포도밭을 확인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발폴리첼라는 과거 화산 활동이 활발했던 곳이라 매우 비옥한 화산 토양이 주를 이룬다. 또한 발폴리첼라의 어원이 ‘강의 퇴적물이 많이 쌓인 계곡’이라는 뜻의 ‘vallis pulicellae’에서 유래한 만큼, 강과 빙하가 실어 나른 퇴적 토양 또한 많다. 여기에 석회암 등이 더해져 포도나무가 아주 왕성하게 자랄 수 있는 토양을 구성한다. 때문에 포도나무의 생육과 포도 생산량을 적절히 조절하는 것이 와인 품질 유지의 핵심이다. 대체로 가파른 경사지에 조성된 계단식 포도밭에서 양질의 와인이 나온다. 기후는 전반적으로 온화하며, 겨울과 여름의 기온 차가 적어 와인 품질과 스타일을 일관성 있게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발폴리첼라 와인에 사용되는 품종은 다양하다. 그중 핵심 품종은 단연 코르비나(Corvina)와 코르비노네(Corvinone)로, 최소 45%에서 최대 95%까지 사용한다. 이외에 론디넬라(Rondinella)도 5%에서 30%까지 반드시 사용해야 하며, 기타 허용된 품종들은 도합 25%까지 블렌딩 할 수 있다. 아마로네와 레치오토, 리파소의 규정도 동일하다.
코르비나는 발폴리첼라 와인에 섬세하면서도 탄탄한 구조와 신선한 붉은 과일 풍미를 부여하는 고급 품종이다. 특히 특징적인 체리 아로마와 살짝 씁쓸한 여운을 남기는 아몬드 뉘앙스는 코르비나의 대표적인 풍미다. 늦수확하거나 건조한 코르비나로 만든 와인에서는 건자두나 건포도 같은 말린 과일의 농밀한 풍미와 실키한 질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양조 초기에는 싱그러운 과일 풍미가 강하게 드러나며, 숙성이 진행될수록 복합적인 부케가 고혹적으로 피어난다. 코르비나는 비교적 알이 큰 편이라 과거에는 타닌이 적고 힘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게다가 만생종이기 때문에 재배가 까다로운 것도 단점이다. 하지만 껍질이 두껍기 때문에 건조를 통해 당분과 페놀 성분을 농축시켜 풍미가 진한 와인을 만들기에 매우 적당하다. 그렇게 말린 포도로 만들어진 와인이 바로 아마로네와 레치오토(Recioto)이며, 그 잔여물 조차도 아깝게 생각한 생산자들은 리파소를 만드는데 재활용했다. 기본적으로 코르비나는 30년 이상의 장기 숙성용 와인을 만들 수 있는 힘을 지닌 품종인데, 그 잠재력에 비해 적절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일부 의식 있는 생산자들은 코르비나 품종을 사용해 아마로네가 아닌 프리미엄 레드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알레그리니(Allegrini)가 만드는 라 호야(La Poja)가 대표적인 예다.
코르비노네는 ‘커다란 코르비나’란 뜻으로 발폴리첼라 와인에 검붉은 베리 풍미를 부여한다. 과거에는 코르비나의 클론 중 하나로 취급되다가, 최근에야 DNA 분석을 통해 다른 품종임이 밝혀졌다. 수확량도 많고 추위나 병충해에도 강해 재배자들이 선호하며, 건조에도 적당해 아마로네와 레치오토에 많이 쓰인다.
론디넬라는 거의 코르비나의 블렌딩 파트너로 사용되며, 와인에 은은한 체리 풍미와 함께 컬러를 더하는 역할을 한다. 론디넬라 또한 병충해에 강하고 수확량이 많으며, 건조에도 알맞아 재배자들이 좋아한다.
이외에 오셀레타(Oseleta) 품종은 껍질이 두꺼워 타닌이 많고 포도알이 작아 농축적인 풍미를 지녔다. 때문에 와인의 구조를 강화하고 컬러를 진하게 만들어준다. 약간 쌉쌀한 미감 또한 매력 포인트. 오셀레타는 오래전부터 베네토 지역에서 재배하던 품종이었으나, 수확량이 매우 적어 재배가 거의 중단되었다가 1970년대 부활했다. 최근에는 발폴리첼라 와인의 양을 늘리기 위해 많이 사용되던 몰리나라(Molinara) 대신 사용되는 경우가 늘면서 그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발폴리첼라의 이름을 달고 나오는 와인은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일반적인 발폴리첼라, 아마로네 델라 발폴리첼라(Amarone della Valpolicella), 레치오토 델라 발폴리첼라(Recioto della Valpolicella), 발폴리첼라 리파소(Valpolicella Ripasso)가 그것이다. 이렇게 스타일의 차이를 만드는 핵심은 아파시멘토(appassimento)라는 포도 건조 방식과 그 이후의 과정이다. 아파시멘토는 로마 시대부터 활용된 전통적인 방식으로, 잘 익은 포도를 손 수확해 나무나 플라스틱 받침대에 눕혀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서 3-4개월 자연 건조한다. 그 과정에서 포도의 수분이 30~40% 정도 감소하면서 당분과 타닌, 각종 풍미 요소 등이 농축되어 복합적인 맛과 향을 지닌 와인을 만들 수 있다. 일부 귀부균(botrytis)의 영향을 받은 포도는 글리세린(glycerin)이 생성돼 특유의 부드러운 풍미를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아파시멘토 방식을 통해 말린 포도를 사용해 만드는 와인이 바로 아마로네와 레치오토다.
아마로네와 레치오토를 가르는 것은 발효 후의 잔당 수준이다. 레치오토는 당분이 전부 알코올로 바뀌기 전에 발효를 중단한다. 완성 와인의 잔당은 리터 당 50g 이상이어야 하며 보통 그보다 많다. 결과적으로 유연하고 진하며 복합적인 풍미의 달콤한 레드 와인이 된다. 일부는 거품이 있는 스푸만테(spumante)로 만들기도 한다. 아마로네는 잔당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농후한 레드 와인이다. 전해지는 스토리에 따르면 아마로네는 레치오토를 만들던 중 실수로 인해 탄생했다고 한다. 실수로 발효를 중단시키지 않고 너무 오래 발효하는 바람에 완전히 드라이하고 씁쓸한 맛이 나는 와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맛이 상당히 괜찮아 하나의 스타일로 굳어졌다. 와인 이름도 ‘씁쓸하다’는 의미의 아마로(amaro)에서 유래했다. 아마로네의 잔당은 리터 당 12g(알코올 14% 이하이면 9g) 이하 여야 하는데, 일반적인 잔당 함량은 5-7g 정도다. 아마로네 스타일은 1950년대 이후 발폴리첼라의 중흥을 이끌었으며, 현재는 바롤로(Barolo)와 바르바레스코(Barbaresco),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Brunello di Montalcino) 등과 함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프리미엄 레드 와인으로 꼽힌다. 2010년에는 레치오토와 함께 별도의 DOCG가 되었다.
리파소는 갓 발효했거나 발효 중인 발폴리첼라 와인에 아마로네나 레치오토 발효 후 남은 포도 껍질 등 잔여물을 첨가해 만든다. 아마로네와 레치오토 양조에는 최고 품질의 포도만 선별해 사용하는 데다 건조를 통해 풍미를 응축시켰기 때문에 그 잔여물에는 여전히 다양한 성분들이 충분히 남아 있다. 그래서 이 잔여물을 사용해 가볍고 신맛이 강한 발폴리첼라 와인의 색상과 풍미, 타닌 등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리파소는 아마로네의 뉘앙스가 드러나면서도 아마로네보다 값은 훨씬 저렴하기 때문에 ‘베이비 아마로네’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리파소 또한 2010년 별도의 DOC가 되었다.
아마로네나 리파소가 아닌 일반적인 발폴리첼라 또한 스타일이 다양하다. 전통적인 스타일의 발폴리첼라는 싱그러운 과일 향이 가볍게 드러나는 미디엄 바디 와인이다. 반면 그린 하비스트 등을 통해 풍미를 응집시키고 최대한 수확시기를 늦춰 농익은 포도로 만드는 비교적 묵직하고 구조감 있는 스타일도 있다. 두 스타일 모두 각자의 장점이 있으므로 취향과 상황에 따라 선택하면 되지만, 레이블만 봐서는 어떤 스타일인지 알기 어려운 게 문제다. 일단 뒤에 수페리오레(Superiore)가 붙은 것은 두 번째 스타일일 가능성이 높다. 수페리오레는 규정 상 최소 1년 이상 숙성해야 하며, 일반적으로 더 진하고 복합적인 풍미를 드러낸다.
발폴리첼라는 아니지만 코르비나 등 발폴리첼라의 주요 품종을 사용해 만드는 와인들도 있다. 보통 베로네제(Veronese) IGT/IGP를 달고 나오는데 코르비나 100%로 양조하는 와인도 있고, 일반적으로 발폴리첼라에 사용하지 않는 품종을 블렌딩 하는 경우도 있다. 건조한 포도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도 스타일이 갈린다. 건조한 포도로 양조한 와인과 일반 포도로 양조한 와인을 블렌딩 한 와인도 있고, 일반 포도로 발효한 와인에 건조한 포도를 넣어 추가 발효하는 이중 발효(double fermentation)로 만드는 와인도 있다. 특히 이중 발효는 아마로네/레치오토 잔여물 대신 건조한 새 포도를 첨가한다는 점에서 발전된 리파소 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마시 캄포피오린(Masi Campofiorin)과 알레그리니 팔라쪼 델라 토레(Allegrini Palazzo della Torre) 등이 이런 방법으로 만드는 대표적인 와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