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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타 May 26. 2021

똥오줌으로 범벅된 숭고한 몸의 그래피티

<헝거> 스티브 맥퀸 2008


-에필로그: 벌거벗긴채로 내던져진  몸뚱아리가 갖고 있는 단 하나의 진실은 그들 자신의 배설물일 것이다.



1.유태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의 처절한 기록인 데린스 데 프레의 <생존자>에서는 배설물과의 투쟁이 수용소의 고통 그 자체였다고 회고한다.

죽음의 공포나 극도의 궁핍보다도 사람은 자신이 한없이 무가치하다고 느낄 때 무너진다. 그런 생존자의 인간성과 자존감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과 고문이 나치의 전략이었다.


2.서로의 얼굴과 몸이 똥오줌으로 범벅이 되어 있을 때, 서로의 몸에서 견디기 힘든 냄새가 풍기고 있을 때,서로의 똥오줌을 받아먹어야 했을 때

인간은 어느 정도까지 자기의 자존감을 훼손하지 않고 지킬 수 있을까

생의 의지를 완전히 포기한 사람들의 참혹한 모습과 악취 , 수용자들끼리의 반감과 혐오감을 키워 연대감을 말살시키는 데 얼마나 유효했을까

 

3.영화는 그런데 전혀 반대의 시점에서 인간혐오의 조건인 배설물로 자신의 신념과 저항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그렇다면 하나의 질문이 떠오른다. 인간의 의지와 생각에 따라 혐오의 신체가 저항하는 신체로 바뀔 수 있고 냄새나는 똥오줌이 작품을 만드는 질료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정말?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IRA의 정치적 신념과 투쟁의 동기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거나 계몽하지 않는다. 또한 테러리스트라 불리우는 그들의 도덕적 판단에 대해서도 물러나 있다.

단지 IRA의 리더인 보비샌즈가 선택한 감옥에서의 단식투쟁의 과정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것에 그친다.

 

4.의아했다. 자신의 똥과 오줌을 물감처럼 섞어 별들의 궤도같은 모양의 소용돌이를 벽에 그려넣던 샌즈의 행동, 그들의 오줌을 복도밖으로 흘러내리게 하는 집단행동,

감옥에서 제공하는 옷을 거부하고 발가벗은 몸 만으로도 눈오는 추운 겨울을 견디게 하는 한평남짓한 감옥의 풍경, 똥오줌으로 범벅된  몸을 씻기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교도관들의 촛점잃은 광기와 사력을 다해 씻기를 거부하는 벌거벗은 몸들의 난무. 그저 피터지도록 얻어맞고 굶고 억지로 먹이는 밥을 토해내는 것이( 문득, 영화 <써프러제트>사라 가브론, 2015 에서 참정권을 얻기위해 단식투쟁하던 여성들에게 억지로 목구멍에 관을 삽입해 음식을 쑤셔 넣는 장면이 떠올랐다)

왜 그들은 그런 처참한 행동을 저항의 방식으로 선택했던 것일까

 

 

5.영화는 단식투쟁을 중단시키기위해 온 카톨릭 신부와 보비샌즈(마이클 패스밴더)의 대화를 20여분동안 진행되는 단 하나의 롱테이크 컷으로 배치하면서 그러한 행동의 단초를 보여준다.

카메라는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며 차갑게 응시하고 그 곳에  어떤 선악구분도 개입시키지 않는다.

둘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리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신부와의 대화 내용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영화는 그들의 정치적 신념과 행동에 촛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

한 인간이 죽음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치열한 자기고민과 살아야할 이유를 설득하러온 카톨릭 신부의 논쟁은

도덕적 판단을 넘어 근원적 존재론에 대한 논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때 샌즈의 어린시절을 이야기 하는 장면에서 샌즈의 얼굴로 카메라 싯점이 바뀐다.

샌즈의 지금 행동의 근거는 어린시절 안락사시키지 못해 연민과 죄책감에 시달려야했던 어린사슴의 고통으로 회귀하고 있었다. 어린사슴(타자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게 되는 시간성은 과거와 현재가 없이 하나로 중첩되어 있다.


 

 6.영화의 압권은 신부와의 대화를 마치고 난 다음 컷이다.

흘려보낸 그들의 오줌을 청소부가 복도 처음부터 끝까지 청소하는 장면이다.

신부와의 논쟁내용을 이리저리 꿰어 맞춰보느라 사유할 시간을 놓쳐버린 우리에게 이 장면은 또다시 이 영화의 처음과 끝을 성찰하며 되짚어보게 한다.

 

 

7.스티브맥퀸 감독은 현대미술 아티스트로서 명성에 걸맞게 차기작 <셰임>에서와 비슷한 맥락으로 인간의 육체와 정신(의식)의 관계, 몸의 실존을 사유했다.

셰임에서 육체는 더없이 안락하지만 정신적 공허함으로 훼손되는 섹스중독자의(속박된 )육체를 그렸다면 <헝거>는 반대로  그들의 범벅된 똥오줌과 몸위로 올라오는 구더기와, 벌거벗은 몸에 가하는 무자비한 폭력과 굶주림을 도덕적 신념하나로 견디어 내는 (초월한 )육체를 등장시켰다.


8.첫 시퀀스는 교도관장의 클로즈업 샷이 대부분이다. 맞아서가 아니라 때려서 망가진 손과 일그러진 듯 미묘하게 움직이는 적막한 표정은 나도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듯 했다. 아마도 감독은 그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들의 일상을 보며 그들은 결코 악마가 아니며 그저 평범한 우리들 , 정신적 가치를 모두 잃고 무기력과 권태에 빠져 폭력을 일삼고 생각할 능력을 잃어버린 우리의 모습임을 차가운 시선으로 되돌려줄 따름이다.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에서 보여준 통찰, '그들은 악마가 아니다. 우리의 이웃처럼 평범한 사람들이다. 다만 생각할 능력을 잃었을 뿐이다'는  말처럼.


9.그렇다면 다시 되돌아온 물음 둘, 감옥에 갇혀 있는 그들과 감옥 밖 그들중 누가 더 자유로운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들일까 (실존주의에서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을 "실존하는 인간"이라 말한다. )

마지막 시퀀스, 단식으로 마지막 숨이 넘어가던 순간의 보비샌즈의 얼굴 클로즈업이 대신 답을 해준 것인가

 

10.그럼으로 이 영화는 인간의 신념(정신)으로 그 모든 배설물(육체)의 공격을 無(하찮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불가능한 인간 정신의 가능함에 대한 영화이며

극도의 절망의 순간에서 인간의 육체를 초월하게된 어떤 인간의 실존에 관한 영화이다.

그리고 결코 잊을 수 없는 숭고한 그의 마지막 눈빛에 관한 이야기이다.



프롤로그: 그들의 비폭력투쟁과는 다르게 그의 죽음에 대한 댓가로 교도관들은 IRA의 희생이 된다. 나는 어쩌면 그것을 바라고 있었을지 모른다. 애초부터 IRA는 무장단체이다. 존재의  아이러니가 여기에 있다. 그러니 우리는 폭력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 세번째 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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