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덴 형제 <내일을 위한 시간>
우울증에 걸린 시간
내일을 위한 시간
1. 우울증은 왜 찾아오는 걸까
왜 하필 다르덴 형제는 우울증에 걸린 산드라를 주인공으로 설정을 했을까. 질문에 답은 쉽지 않아보이지만 영화에서 아무의미 없는 우연이란 드물다.
우울증은 삶의 의지없음, 내가 왜 계속 살아가야 하는지 모를 때 찾아오며 무기력을 동반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산드라와 같은 우울증 환자일 수 있다. 철학자 한병철의 "피로사회"나 우울사회에 대한 진단이 큰 파장을 일으켰던 것처럼 하루하루 의미없는 날들이 지나가고 또 찾아오는 소외된 노동과 존재감없는 하루들의 권태이기도 할 것이고 무엇인가를 향해 힘을 뻗고 애를 썼지만 나혼자서는 아무것도 할수 없다는 무능력상태를 인식했을 때 포기하고 싶어지는 체념이다.
2. 우울증에 걸린 주체
산드라(마리옹꼬띠아르) 는 우울증환자이다.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리고 병가이후 복직을 앞두고 있다. 우울증에 걸린 산드라는 사실 별로 복직에 대한 의지가 없어 보인다. 회사를 다녀야할 어떤 의지가 그녀에겐 없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나 신경안정제 없이는 대화조차 힘들만큼 그녀는 불안하다. 오히려 그녀대신 나서주는 사람은 줄리엣이라는 직장동료이다.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동료들을 설득하고 산드라를 격려한다. 그녀의 남편도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산드라를 위로하며 지지하지만 산드라는 동료들의 조그마한 거절이나 비난에도 쉽게 망가진다.
우울증에 걸린 주체들은 주위에 흔하디 흔하다. 20대와 30대의 사망원인중 1위가 자살이라는 통계는 산드라의 행동을 대변해준다. 이전의 사회가 금지와 억압으로만 조직되어 상명하복에 따르는 강제된 주체였다면 오늘은 주어진 가능성중에 나의 선택이 가능하다는 착각(?)으로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성과주체"이다. 타자에게 주어진 명령대신 자기자신이 명령을 내리고 선택하기도 한다는 양심적 주체, 즉 이 도덕적주체는 "피고인 동시에 재판관"이기도 하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착취한다.
이 말은 그녀의 해고결정을 내리는 직원투표에서 산드라대신 돈(보너스)을 선택한 대다수 직원들이 자발적 행동의 근거가 된다.
3. 교환된 당신, 부재된 존재감
왜 사장은 그런 선택을 하게 했을까? 사실 직원들은 산드라때문에 돈을 못 받는게 아니라 산드라때문에 돈을 받는거였다. 동료들이 아무리 각자의 타당한 사정이 있다고 해도 애초 질문이 달랐다면 답이 달라질 문제였던 것.
얼핏 합리적 결정으로 보이는 사장의 두가지 제안은 가장 치졸한 생존방식을 보여준다. 직원들의 보너스와 그녀를 같은 가치에 놓아 버린 것이다. 그리고 한 때 직장에서 친했을 대다수의 동료들은 그녀가 없는동안 그녀대신 천유로(150만원) 를 선택했다. 각자의 사정이 어떠하든 그녀라는 인간주체는 돈과 교환되었다.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그녀는 천유로에 팔렸고 친구들에게 버림받은 셈이다. 문득 그녀는 막연하게 알게 되었을 것이다. 나라는 존재감은 몇 푼 돈 만큼의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그리고 직장동료들에 대한 믿음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임을. 그러니 그토록 그녀가 보너스대신 자신을 다시 선택해달라고 설득할 때 " 마치 거지처럼 나를 구걸하는 것 같다" 고 느낀 것이다.
그녀의 구걸은 " 내가 왜 너때문에 내 천유로를 포기해야 하냐 꺼져버려" 라는 막말과 폭력을 경험했을 때, 완전히 무너졌다. 그리곤 집으로 돌아와 신경안정제 한 통을 차례로 까서 입 안에 털어 넣는다.
그녀는 피로하다. 고독한 피로, 세계가 없는, 고립된 피로, 버려졌다는 피로, 타자와의모든 관계를 파괴하는 피로에 그녀는 그나마 버티던 삶의 의미를 상실했을 것이다.
우리가 직장에서 해고를 당했을 때 느끼는 가장 큰 괴로움은 돈을 벌지 못한다는 사실이 아닐 것이다.내가 더이상 그곳에서 필요로하지 않는 사람,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자괴감이다. 직장에 다닌다는 것은 단순히 돈을 벌기위한 수단이 결코 아니다.
나라는 존재가 단지 누군가의 일년치의 가스비가, 누군가의 학비가, 어느 집의 공사비로 대체되었다고 생각할 때 느끼는 절망감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산드라 대신 자기가 그 자리에 설수도 있다는 두려움(작업반장의 협박)에 양심과는 다른 선택을 한다. 얼마 안 남은 계약에서 재 고용되지 못할까봐 작업반장의 권력에 복종한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존엄하다.
다르덴 형제는 이런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그사실을 서사의 한 축으로 설정했다. 그리고 각각이 직면한 윤리적 선택지점에서 개인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의 차이를 세세하게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방식이 영화의 단순한 플롯에 극적 긴장감을 부여한다. 산드라가 찾아간 9명의 공통된 질문이 있다. " 보너스대신 너를 선택한 사람이 누구냐고." 혹여 자기만 그런 선택을 했을까봐 전전긍긍한다. 고통받는 친구의 얼굴을 마주하기 힘들어 아예 자리를 피하는 친구도 있다.
하지만 다르덴형제는 포기하지 않는다. 어쩌면 극단적으로 산드라의 자살로 끝을 맺었을 수도 있을 사태를 1박 2일의 직접 마주대하기에서 바꿔낸다. 과반의 사람들이 변화하는 그 순간의 반짝임을 위해 길고 긴 롱테이크를 고집한다. 어쩌면 상투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극의 흐름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존엄으로 나아간다.
4. 아주 사소한 물음의 가능성
다르덴 형제가 사람을 돈이나 기계나 시스템의 일부로만 취급하는 자본주의 방식에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는 방식은 아주 사소해보인다. 하지만 그 사소함이 때로는 사람을 죽이게도 살리게도 한다.
자기대신 다른 계약직 직원을 해고한다는 마지막 선택지 앞에서 산드라는 그럴수 없다며 회사를 나온다. 그건 타인에 대한 희생이 아니라 스스로의 존엄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결정이었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는 소수자와 약자를 언제나 배제하는 방식인 다수결의 원칙으로 존재했다. 만약 그녀가 7:9로 승리했다고 하더라도 누구든 그 중 하나가 희생될거라는 건 불보듯 환하다. 그리고 그것은 철저히 사장이 만든 게임의 룰이다. 공리주의적 선택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그녀는 당당하게 게임의 룰에 들어가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나 지금행복하다 " 말한다. 산드라 스스로가 자신을 살린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믿음이란 언제나 자신을 믿는 그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던가
5. 빛나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
다르덴 형제는 돈 앞에 굴복하는 인간의 윤리적 선택을 주인공으로 선택해왔다.
그러나 영화는 낙관적이긴 하지만 희망적이진 않다. 낙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라는 말을 남기지만 희망은 "그래서 앞으로 너희는 무엇을?"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산드라는 잠깐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깨달았지만 우울증은 쉽게 낫지 않을 것이다. 나는 잠깐의 반짝임으로 모든 것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모든 것이 빛나는 것" 이 아니라 "빛나는 모든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희망은 모든 것이 잘 될거라는 것이라는 신념"이 아니라 "희망이 있다는 것을 믿는 능력"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