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으스타슈의 "엄마와 창녀 "1973을 보고
#엄마와창녀 #장으스타슈 #포스트누벨바그 대표작 1973
1. 포스트 68혁명의 대표작 엄마와 창녀는 온갖 금기에 저항하며 사람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품고 열정적으로 자신을 불사지른 68세대의 자기혐오와 절망이 부르는 실패한 사랑노래이다. 파티가 끝난 후 난장판이 된 뒤치닥거리를 하고 남자의 불안을 다독여주고 비빌언덕이 되어준 것은 영화 속 세 여자들이다.
2. 하는 일 없이 까페에서 신문과 철학책을 읽으며 지나가는 여자들을 그야말로 "꼬시는 데 " 소일을 하는 알렉상드르는(장피에르레오) 그에게 집을 제공하고 용돈을 주며 꼬셔오는 여자들까지 집에 들여재워주는 "엄마"와 같은 애인 마리가 있다. 반면 새애인인 베로니카는 전문 직업인인 간호사로 그녀를 유혹하는 모든 사람과 자유분방하게 관계를 맺지만 정작 사랑은 하지 못하는 "창녀"와 같은 여자이다. 그녀는 마지막에 " 사랑이 없는 수 많은 섹스는 아무의미가 없어"라며 울부짖는다. 정신과 육체(사랑과 쾌락)가 분리된 - 프리섹스주의자를 양산한 성해방담론이 -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며 양적으로 팽창된 아름답고 해방된 사랑이 남았을까 감독은 아니라고 한다. 알렉상드르는 그녀의 입을 통해 혁명과 자유, 성해방을 부르짖고 부르조아와 사회를 비판하는 발언을 하지만 사실은 세 여자 동거녀- 옛애인- 새애인을 착취하는 무력하고 위선적인 지식인 남자일 뿐이다.
3. 포스트 68의 짙은 자조를 담은 베르톨루치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와 오시마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은 같은 태내에서 태어난 쌍둥이 같은 영화이다. 이념과 신념과 지적 열정이 갑작스레 떠나간 자리에 그들은 이름모를 상대와 섹스에 몰두한다. 마치 애인이 떠난 후 아무와 잠을 자며 자신의 남겨진 리비도를 소진시키며 자신에게 빠져드는 사람처럼 열정의 대상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집단 무의식은 리비도를 대체할 그 무엇을, 즉 쾌락을 추구한다. 그리고는 쾌락은 스스로가 소망한다. 자기파괴적 죽음충동을.
4. 프랑스영화는 일본영화보다 정도가 덜하지만 주인공의 "케세라 세라 " 식의 삶의 태도는 결국 애인들을 착취하고 파괴하는 방식으로 귀결된다. 그는 쉴새 없이 여자들에게 사랑한다 말하지만 사랑이 뭔지 모르겠다며 운다. " 알렉상드르는 "샤르트르의 계몽의 변증법은 술 취한 상태에서 썼을거야" 며 68의 정신적 토대였던 실존주의의 대명사 샤르트르를 술주정뱅이라 비판하며 당대 철학적 풍토와 지식인의 위선에 대해서도 메스를 들이밀지만 지적 공허함을 달래려는 무의미한 수다에 그치고 만다.
<엄마와 창녀>는 4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동안 플롯없는 대화와 상황들이 반복되지만 놀랍게도 전혀 지루하지가 않다. 마치 에릭 로메르나 파리를 배경으로 한 홍상수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5. 장 으스타슈오와 동거했던 실제 모델은 시사를 본 뒤 목숨을 끊었고, 괴로움과 가난 속에서 시달리던 으스타슈도 권총 자살했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도 든다. 어쩌면 어쩌면 말이다. 우리에겐 무망하고 헛된 희망일지라도 정념을 불태워야할 어떤 이념과 신념을 , 혹은 예술적 창작욕망을 종교처럼 간직하며 살아야 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그게 불가능한 사랑이 되었든 세속적 성공이 되었든 타인에게 해와 폭력만 끼치지 않는다면? 필요한 것인가?
6. 이 세 영화를 약간의 시차를 두고 동시에 봤더니 사람이 위악적이 되려고 한다. 위악보다 위선을 싫어했는데 이제는 반대가 되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