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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의 어려움

<비폭력 대화>의 단상

by winter flush

상대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듣는다는 것의 어려움을 매번 실감한다. 잘 듣고 공감한다고 여기지만 과연 정말 그럴까? 들리는 이야기는 나만의 렌즈로 재인식되고 내 안에서 해석된 이야기들을, 그러니까 나의 의견을 쏟아내기 바쁘지 않았던가 말이다. 상대가 바라보는 세상이 나와 같지 않을 수 있다는 한 치의 의심도 품지 않기에 우리의 대화는 매번 벽에 부딪히는지 모른다. 모든 주장이 난무하는 자리에 배려의 마음이 스며들 자리는 없다. '공감'이라는 건 생각보다 무척 어려운 일이라는 걸 실감한다. 익숙한 나의 세계를 내려놓는 일부터가 시작일 텐데 이는 넘기 어려운 난관이다.


'같은 상황에서 어떤 이는 상처를 주고, 또 어떤 이는 그 상처를 치유하는가'에 대한 유년 시절의 궁금증으로 <비폭력 대화>라는 장르를 만들어낸 마셜 로젠버그는 그 화두를 마음에서 놓지 않고 평생을 연구했다. 마음 안의 좋은 것들을 지키고 발현시키려는 그의 노력은 인도의 영성 지도자인 '크리슈 나무르티'나 인간 중심 상담의 '칼 로저스'의 신념들과도 맞닿아 있다. 크리슈 나무르티는 어떤 책도, 종교도, 사상도, 사람도 추종하지 말라했다. 마치 불교 경전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처럼 타인의 시선이나 잣대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자기 내면의 단단함으로 자신만의 길을 꿋꿋이 걸어가라는 의미가 담긴 말이 아닐까. 누구나 내면에 고유한 힘이 있음을 시사하는 이 깊이를 가늠할 수 있을 때 자신을 믿는 마음은 근원에서부터 차오를 수 있다.

우리의 대화는 대게 반응으로부터 시작된다. 상대가 던진 말에 나의 생각과 감정이 반응하면서 공감이 아닌 의견이 먼저 치고 올라오는데, 단순한 의견이면 그래도 좀 낫다. 대게는 비판이나 지적, 비교로 자신의 의견을 강화시킨다. 대화 상대가 어릴수록 이런 오류는 늘어나고 어른이니까 내 말이 맞고 옳다는 식으로 가르치려는 본능을 고수한다. 이런 식의 대화가 문제 되는 건 상대에게 닿은 그 말이 '폭력적'으로 다가가기 때문이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진심 그 마음이겠지만)이라 주장하는 건 매우 위험하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이 오류는 덫처럼 숨어 있다. 우린 상대를 위한다고 포장하지만 실제로는 폭력적인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칼 로저스는 사람이 사람을 가르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했다. 가르친다는 것의 효용성 마저 의심하는 그는 오직 배우려는 자만이 배울 수 있다 말하며, 스스로 배우려는 의지가 없는 이에게 억지로 가르치려 하는 모순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서로의 마음을 다치지 않으며 어떻게 대화를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 저자는 그 대화의 단계를 관찰, 느낌, 욕구, 부탁의 4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그러나 책에서 단계별로 예를 들어 설명하는 대화는 꽤 부자연스럽다. 그 단계로 마음을 단련시키는 연습이라 여기는 편이 더 쉽게 다가올 것이다. 우선 첫 단계인 '관찰'은 우리가 대화 중에 쉽게 놓치는 부분이라 매우 유용하다. 상대의 말을 내 의견 없이 마치 cctv처럼 관찰한다는 게 뭐가 그리 어렵겠나 싶지만 실제로 해 보면 꽤 어렵다. 우린 상대의 말에 즉각적인 반응, 그러니까 내 느낌이나 생각으로 즉시 전환되는 시스템으로 대화를 주고받는데 익숙하기에 나의 생각, 감정, 판단 등을 내려놓고 상대의 이야기를 그저 관찰만 한다는 건 꽤 낯설다. 그러나 이 관찰의 필요는 같은 상황도 서로 다르게 인지할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나의 개입을 최소화시키려 잠시 침묵하며 뜸을 들이는 시간이라 하겠다. 그 순간 나의 느낌과 그 느낌 아래 들어있는 욕구를 알아차림 하는 것이 포인트인데 대부분 우린 느낌에만 사로잡혀 정작 그 원인인 욕구를 잘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알아도 무시하곤 한다. 그러나 근본적인 자신의 욕구가 해결되지 않으면 소통의 불협화음만 지속될 뿐이다. 그러니 대화의 기본은 내 마음을 '알아차리는'일이 우선이고, 그리고 그것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이 가능해지면 책에서 제시한 4단계(관찰, 느낌, 욕구, 부탁)의 스텝을 밟지 않아도 자연스레 소통이 불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알아차린 자신의 욕구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다스릴 수 있게 만들고, 자신의 생각 또한 질서 있게 정리해 주기에 상대와의 대화를 부드럽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어지게 만든다. 비폭력 대화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을 키우는 것이라고도 하겠다.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만 소통하려는 헛된 의지나 노력이 결국은 폭력적인 대화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유념해야겠다. 팽팽한 줄다리기처럼 신경전만 벌이다 해결되지 않는 논쟁만 벌이거나 해소되지 않은 자신의 욕구를 무기로 상처 주는 말들을 쏟아내고 있는 건 아닌지, 상처는 더 큰 상처를 키운다는 사실을 인지하며 나로부터 나오는 말들을 점검할 필요를 느낄 때 단단한 중심을 잡고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뚜벅뚜벅 나아갈 수 있지 않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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