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겨울산 Feb 21. 2023

아주 사적인 공원의 시작

보라매 공원을 소개합니다 

 공원의 시작은 눈물이었다. 몇 년 전, 남자친구와 보라매공원을 처음으로 찾았다. 기억 속 보라매공원은 지나치게 크고, 우중충하고, 황량한 느낌까지 들었는데 그건 공원 탓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남자친구와 보라매공원을 찾은 이유가 우리가 계속 사귈 것인지 말 것인지, 한마디로 결판을 짓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늦가을의 스산한 바람을 맞으며 우리는 한참을 말없이 트랙을 걸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입을 뗐다. 우리, 어떻게 할까? 아무리 생각을 하고 대화를 나눠도 결국 답은 이별이었다. 공원을 하염없이 돌면서 엉엉 소리 내서 울었다. 주변 사람들이 보든 말든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사정으로 헤어지기로 결심했고 보라매공원은 한동안 내게 눈물의 장소였다. 그 뒤로 몇 년이 흘렀고, 그날과 같은 늦가을에 나는 다시 보라매공원을 찾았다.     



 공원의 시작은 기상청이다. 보라매공원의 입구는 여러 개인데 농심 건물 옆에 있는 것이 정문이다. 정문에서 쭉 걸어 들어오다 보면 어렵지 않게 기상청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날 운이 좋다면 옆에 서 있는 ‘수상한 호떡’ 트럭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겨울이면 트럭 앞엔 으레 긴 줄이 늘어서곤 한다. 꿀과 치즈가 들어간 따끈한 호떡을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엔 야쿠르트 아주머니께 산 시원한 요구르트를 들고 있으면 세상을 다 얻은 것 같다. 기상청 앞에서 간단히 허기를 채우고 본격적으로 보라매공원을 산책해 본다.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보라매공원은 공군사관학교가 그 시작이다. 이곳에 위치했던 공군사관학교가 청주로 이전하면서 그 부지를 서울시가 매입하였고 1986년 5월 5일 보라매공원이 최초로 문을 열었다. 보라매는 난 지 1년이 안 된 새끼를 잡아 길들여서 사냥에 쓰는 매를 말하는데, 공군사관학교의 상징이기도 하다. 지금도 보라매공원에는 공군사관학교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당장이라도 날아갈 듯 날개를 펼치고 있는 보라매 동상, 풍향계 위에 살포시 앉아있는 보라매 모형 등 공군사관학교의 자취를 따라 공원을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에어파크에서는 실제로 사용했었던 전투기와 비행기, 헬기 총 8대가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채 전시되어 있는데 이곳에서는 예전 공군사관학교가 있었을 때의 사진도 확인할 수 있다. 




 에어파크에서 오른쪽으로 나오면 바로 보라매공원의 메인인 중앙잔디광장을 마주한다. 중앙에는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고 그곳을 삥 둘러 걸을 수 있는 트랙이 자리 잡고 있다. 탁 트인 잔디광장을 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 든다. 이곳은 낮에는 잔디밭에서 연을 날리거나 캐치볼을 하는 사람들로 평화로운 광경이 연출된다. 그러나 밤에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날씨가 좋은 밤이면 동작구 주민들이 모두 여기에 모였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두 같은 방향으로 열심히 트랙을 도는 장관을 구경할 수 있다. 얼핏 보면 대규모 플래시몹 같기도 하다. 어쨌든 중앙잔디광장은 낮과 밤이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는 공간이다. 




 중앙잔디광장을 지나 걷다 보면 보라매공원에서 내가 가장 ‘애정’하는 공간인 연못이 나온다. 공원 안내문에는 연못(음악 분수)으로 표기되어 있는 곳으로 큰 연못과 작은 연못이 교집합을 이루고 있는 형태의 꽤나 큰 연못이다. 가을 날씨가 완연한 지금, 연못을 바라보니 조금 과장을 보태어 ‘여기가 천국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가장 멋진 연못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장미원이다. 활짝 핀 장미를 감상하고 그 앞에 서서 연못을 바라본다. 와우산을 배경으로 잔잔한 연못, 빨갛고 노랗게 물든 단풍, 가지를 늘어뜨린 버드나무, 흐드러지게 핀 갈대들이 함께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벤치에 앉아 멍하니 연못을 바라보며 평화로운 가을풍경을 만끽할 수 있었다. 



 보라매공원에는 숨겨진 작은 산책로들이 많다. 보라매공원의 길 중 가장 좋아하는 길은 바로 동부공원녹지사업소와 에어파크 사이에 있는 작은 산책로이다. 이곳은 메인 산책로에 비해 사람이 적어 한가롭게 산책을 즐길 수 있는 길일뿐 아니라 사시사철 계절감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봄에는 멀리 나가지 않아도 벚꽃을 즐길 수 있고 벚꽃이 지고 나면 겹벚꽃이 피어나 봄이 끝나가는 아쉬움을 달래준다. 가을인 지금은 파란 하늘과 빨갛게 물든 단풍이 대조된 아름다운 풍경을 만끽할 수 있었다. 바스락바스락 떨어진 낙엽을 밟으며 길을 걸으니 잠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 보라매공원의 큰길뿐 아니라 작은 길들도 탐방해 보길 추천한다.




 보라매공원을 다 둘러보고 나니 배가 출출해져 온다. 어디선가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인 냄새가 나서 고개를 돌려보니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라면을 먹고 있었다. 중앙잔디광장 한편에 위치한 ‘인더라인 25 편의점’에서는 한강에 있는 편의점 못지않게 다양한 먹거리를 판매하고 있었다. 냄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라면을 하나 먹기로 한다. 신중히 고른 라면 봉지를 뜯어 즉석 라면 기계에 올리고 3분 30초를 기다리니 라면 한 그릇이 뚝딱 완성되었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야외에서 먹는 라면은 그 어떤 진수성찬도 부럽지 않을 만큼 꿀맛이다.      




 그때 여기서 누가 눈이 빨개지도록 엉엉 울더라? 코도 훌쩍대면서. 편의점에서 다 먹은 라면 그릇과 젓가락을 치우며 그가 웃으며 말한다. 지금의 보라매공원은 그가 나를 놀릴 때 써먹는 단골 소재 중 하나이다. 그날 보라매공원에서의 이별 후 우리는 극적으로 다시 만났고, 계속해서 인연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주말마다 함께 보라매공원을 산책하는 가족이 되었다. 공원의 시작은 눈물이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나에게 보라매공원은 웃음과 행복의 시작이 되었다.     



-아주 사적인 추천 (공원 주변 둘러보기)


카페프로스퍼

‘힙’한 카페를 찾고 있다면 프로스퍼로 향하면 된다. 밤 12시까지 운영하는 이 카페는 빈티지 가구들과 미니멀한 감성의 인테리어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음료와 함께 카페에서 직접 구워내는 케이크와 도넛도 꼭 함께 먹어보시길.  

[서울 동작구 여의대방로24길 101]     


파세로 에스프레소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지겨워질 때쯤 가보면 좋을 에스프레소 바. 에스프레소 뿐 아니라 토리노, 피노, 피콜로 등 다소 생소한 이름의 커피들도 만날 수 있다. 땅콩 모양의 그림이 프린트된 귀여운 잔에 담긴 에스프레소를 마시면 멀리 여행을 떠나온 것 같은 특별함을 느낄 수 있다. 

[서울 동작구 여의대방로24나길 10-2]     


서평면옥

평양냉면을 위해 을지로까지 가는 수고로움을 덜어주는 고마운 곳. 보라매공원 맞은편에 있는 전문건설회관 지하 1층에 위치한 이곳에서는 평양 물냉면, 어복쟁반과 같은 평양 요리를 맛볼 수 있다. 냉면 한 그릇에 편육이나 만두를 곁들이면 더 바랄 게 없는 한 상이 된다.

[서울 동작구 보라매로5길 15 전문건설회관 지하 1층]     


서일순대국

순댓국으로 건물을 세운 집이라 하면 이 식당의 명성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소위 서울 3대 순댓국에 들어간다는 이곳에선 가격은 저렴하지만 맛은 결코 저렴하지 않은 순댓국을 맛볼 수 있다. 기본에 충실한 순댓국과 깔끔한 밑반찬이 입맛을 돋워준다.  

[서울 동작구 여의대방로22길 20]     


* 동작구 청년문화매거진 THE MOVER 창간호에 실린 글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어쩌다 보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