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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nterbreak Jan 31. 2023

첫 회사의 저주, 불신

평온에도 메뉴얼이 있다면

나의 작은 프리랜서 기간은 끝났다. 8개월의 결과물을 모아 기획과 엮어 포트폴리오를 만들었다. 작은 경험을 잔뜩 끌어내 자소서도 완성했다. 지금 보면 한없이 부족하지만 당시엔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였다. 최선의 자소서를 30회 넣고, 3번 면접을 봤다. 이 모든 과정이 두 달도 걸리지 않았다. 나는 야심에 가득 차있었지만 들어가고 싶은 디자인 전문 회사에서는 내 서류가 인상적이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스타트업과 중소기업에만 서류를 넣었다. 부족한 대로 시작하겠다는 마음이었다.


내가 회사를 찾는 조건은 두 가지였다.


-제품은 좋은데 디자인은 고칠 부분이 많은 브랜드

-상대적으로 중요한 일도 경험할 수 있는 10-20명대의 작은 기업


화장품 관련 디자인을 많이 해서인지 화장품 회사에서 주로 연락을 받았고, 그중 하나에 입사했다. 내 두 가지 조건에 맞는 12명 인원의 작은 회사였다. 면접을 회사 근처 카페에서 봤기 때문에 내부는 보지 못한 채 연봉을 합의했다. 대표는 젊은 여자로 면접 때 디자인에 관한 질문을 하기보단 자신의 제품의 장점을 늘어놓는 사람이었다.


‘조건에 가장 맞는 곳이야, 여기서 1년 동안 경력을 쌓아보는 거야.’


나는 또 한 번 머릿속으로 앞으로 펼쳐질 장밋빛 미래를 그렸다. 연봉은 적지만 열심히 노력한다면 초라해지지 않을 수 있을 거야, 번듯하게 살 거야. 따위의 생각도 했다. ‘번듯함’을 너무 갖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나의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우선 회사 인원은 12명이 아니라 3명이었다. 그만큼 할당된 업무는 많고 체계는 없었다. 그럼에도 사무실은 붐비는 편이었는데, 대표의 가족이 운영하는 회사와 사무실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첫날에 작성한 근로계약서를 확인한다며 다시 가져가더니 퇴근할 때까지 돌려받지 못했다. 사실 한 달 동안 돌려주지 않았다. 한 달 후 확인했을 땐 처음 협의한 연봉에서 몇백만 원이 깎여있었다. 월급으로 표기되어 있던 계약 금액에 12개월을 곱해 구두로 합의한 연봉이 맞는지 확인하지 않은 내 탓이었다. 하지만 서류를 받았더라면 바로 계산해 볼 수 있는 일이었다.


계산해 본 월급과 다른 것을 보고 근로계약서를 달라고 했더니, 너무나 뻔뻔한 연기를 펼쳤다.


“나는 줬는데? 제가 안 줬나요?”

“네 한 달 전에 다시 가져가셔서 못 받았어요.”

“그래요? 뭐 확인하느라 그랬나 보다, 바로 보내드릴게요.”


나는 ‘근로계약서 전달해 드립니다^^’라는 메시지를 받고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살면서 별로 들어보지 않은 감정이었다. 그 이후 동료가 3명 들어왔는데, 모두 근로계약서를 가져가 돌려주지 않았다.


그 이후 나는 회사를 사사건건 믿을 수 없었다. 몰래 100원이라도 연봉을 깎아서 서류를 작성하는 그런 사람을 어떻게 믿겠는가? 그래서 나는 야근이 너무 싫었다. 사장은 내가 당연히 해야 하는 몫이라고 생각하는 듯했으나 내가 당연히 받아야 받아야 할 몫을 못 받고 무상으로 하는 추가근무는 너무나 고역이었다.


‘자신이 분별력 있는 어른이라고 생각하겠지? 연약한 사회초년생 연봉도 후려치는 주제에…’


이후 비슷한 사건이 몇 번 벌어져, 나는 결국 일할 때마다 화가 나서 손이 떨렸다. 매일 점심시간이면 약국에 가서 ‘화날 때 먹는 약 주세요’를 말했다. 그것을 반복하다가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회사를 다닌 지 6개월째였다. 그때까지 고민했던 이유는 생계가 걱정된다기보다는 내 커리어가 끝날 것만 같은 공포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2주나 3주 후 그만두겠다는 나의 말에 ‘회사는 너의 사정 따위 봐주지 않으니 모든 일을 다 처리하고 나가라’는 일장연설을 들었다. 그녀는 본인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는데도 내가 사업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서 모든 일을 책임져주길 원했다. ‘1원의 손해라도 끼치기만 해 봐’라는 눈빛으로 책상을 쾅 치며 하던 모든 말을 듣고 나는 그 앞에서 얼굴을 감싸고 한숨을 쉬었다. 이 일로 불신이 깊게 생겨 반년이 넘게 다른 회사를 가지 못했다. 머리로도 이해가 안 가서 감정적으로 소화하지도 못하고 마음에 깊이 남았다.


결국 다시 혼자가 되었다. 자유로워졌다고 느꼈다. 감옥에서 빠져나와 다시 자유를 얻은 탈옥수의 마음이 이랬을까? 내 상처도 마법처럼 나아진 듯했다. 하고 싶었던 디자인 의뢰도 받고, 좋은 고객도 만났다. 반년 후엔 다시 포트폴리오를 꾸려 천만 원이 넘게 연봉을 올려 다른 곳에 입사했다. 다 해결된 것 같아 보였고, 별 일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처음부터 너무 낮았던 연봉 때문에 평범한 연봉을 갖게 될 때까지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고, 더 많은 열등감을 느껴야만 했다. 집 계약하기 전 사기당하지 않도록 주의사항을 알아보고 가는 것처럼, 회사와 계약을 할 때도 그래야만 했다.




처음 취업하는 이에게


나는 첫 입사를 하는 사람들에게 당장 힘들고 초조해도 기본을 지키고 ‘개인’에게 관심을 보이는 회사에 들어가는 것을 권해주고 싶다. 이는 면접을 보면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 진행했던 프로젝트에 대해 물으면서 어떤 생각을 갖고 디자인을 하는지, 디자인을 진짜 좋아하는지를 알아보고 싶어 하는 회사들이다. 개성 있는 포트폴리오를 준비해 두었다가 관심 있는 회사나 브랜드를 팔로잉해서 취업 기회가 왔을 때 도전해 보는 방식을 추천한다. 결국 면접관도, 면접자도 어떤 말을 하는가를 보면 평소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일을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나처럼 실력이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그 부족한 실력 속에서도 나의 생각과 개성을 드러내서 누군가 나를 발견해 기회를 줄 수 있게끔 강의나 클래스, 디자인 모임을 활용해도 좋다. 장점을 끌어올리면서 기본을 지키는 포트폴리오, 자소서, 면접을 봐야 한다. 하지만 최근 너무 많은 강의와 돈을 벌게 해 주겠다는 식의 모임이 많으니 ‘내가 어떤 작업을 하고 싶은지’를 잘 판단해보아야 한다.




근로계약서 확인


-근로계약서는 처음부터 2부를 동시에 작성해 그 자리에서 한부씩 나눠갖는 것이다

-(근로계약서에 연봉이 아닌 월급으로 기재되어 있을 경우) x12를 한 후 협의한 연봉이 맞는지 확인한다

-연봉이 13개월로 나누어 지급되는지 확인한다

(퇴직금을 포함하는 연봉으로 계약서에 해당 내용이 있으면 사실상 불법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계약서에 기재 없이 마음대로 13개월로 월급을 쪼개면 불법.)

-포괄임금제인지 확인한다. (포괄임금제 = 야근수당 없이 연봉으로 퉁치겠다!)


*의심 가거나 모르는 부분이 있다면 노동청에 문의하는 것도 좋지만 저렴한 비용으로 할 수 있는 노무사와의 전화상담도 권해주고 싶다. 나는 사직서에 이상한 문장이 있어서 상담을 해봤는데, 퇴사 후 임금산정확인서라는 서류를 다시 방문해서 작성하지 않으면 급여 지급을 무기한 미룰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전문가의 깔끔한 설명과 대처방법을 제안해 주셔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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