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 접종

감정과잉의 세상에 대처하기

by 염가인생

서른 즈음이 되어서야 '나'라는 사람의 컨셉을 좀 더 명확하게 잡고, 스스로와 타인에 대해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살게 되었지만, 나의 이십 대는 그렇지 않았다.


과장을 조금 보태어 비유하자면 흩날리는 꽃잎에도 헤픈 웃음을 짓고, 또 떨어지는 꽃잎에 헤픈 눈물을 흘리는, 감정의 파도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휩쓸리는 불안정한 존재였으며, 질척한 감상에 절여지다 못해 스스로가 그것에 취해버려 끝 모를 자기연민의 내러티브를 재생산하며 시간을 보냈다.


돌이켜 보면 그 시절이 그립다던가 혹은 참 부끄러웠다던가 하는 식상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고,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겪어봄직한 그런 세월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뭐 꼭 굳이 꺼내서 분석하고 활용하겠다는 생각 자체도 불필요한 감이 없진 않지만, 빛바랜 기억을 담고 있는 기록들을 하나씩 살펴보는 과정에서의 자연스러운 반응에 가까운 듯 하다.


장춘에서 보냈던 길다면 길고, 짧다면 한 없이 짧았던 그 2년간의 유학(유배)생활 동안, 나는 참 치열하리만치 외로움과 싸우고, 끊임없이 자기연민의 늪에 스스로를 밀어 넣었다가, 그 진흙탕에 침잠해 숨이 꼬로록 넘어가기 직전에 겨우 다시 머리끄댕이를 잡아 끌어올려 불안한 일상을 지탱하는 삶을 살았다.


사실 청운의 꿈이라는 것도, 가족에 대한 감사와 보답이라는 뭉클한 서사도 정말 그것이 가슴 깊이 단단히 자리잡고 있었다기 보단, 그저 외롭고 불안한 하루하루를 어떤식으로든 견뎌낼 이야기가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을지, 지금의 나는 여전히 애정가득한 눈빛으로, 하지만 한편으론 조금은 건조하게 그 시절을 바라본다.


2012년, 장춘 정월담(淨月潭)에서

외로움과 고립감이라는 감정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총량이 저마다 다를 수 있을까? 누군가는 무리에서 잠시만 이탈해도 절벽 끝에 선 듯한 외로움을 느끼고, 또 누군가는 숲을 휘감는 바람 소리만 들리는 눈 덮인 허허벌판에 홀로 서 있어야 비로소 고립을 실감하는 걸까.


"나는 소주 세 병쯤은 거뜬하지!"라며 얼큰하게 취해 외치는 아저씨들의 유치한 주량 경쟁마냥, "나는 이정도는 되어야 외로움을 느끼지!"라는 식의 '외로움 차력쇼'가 가능할 것인가 말이다.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외로움이나 고독 같은 감정은 외부의 물리적 작용에 의해 경중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금 외롭다'는 말을 달고 사는 이들에게 그럼 대체 정작 '많이 외로운 것'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쉬이 답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지금도 저 사진 속 풍경을 보면 마음 한구석에 왠지 모를 불안함과 시린 감정이 스멀스멀 고개를 든다. 사람도 언어도 박탈당한 그곳에서 나는 분명 깊은 고립감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걸 꺼내 보여주거나 호소할 대상마저 사라진 상황에 이르러서야 깨달았다. 외로움이란, 상호작용을 위한 표현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그 실체조차 불분명한 감정이라는 것을.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완벽한 고립 속에서 내가 겪은 외로움은, 어쩌면 나를 삼키려 증식하던 허상이자, 전혀 불쌍할 것 없는 스스로를 굳이 불쌍히 여기며 보듬으려 했던 흔한 자기연민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내가 기억의 편린 중 굳이 외로움이라는 유쾌하지 않은 것을 가져와 씹고 뜯고 맛보는 이유는, 그것이 내 과거의 일부를 가득 채웠던 가장 흔한 감정인 동시에, 현재의 세상에서 가장 많이 오용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외로움은 마치 우리 사회가 반드시 정복해야 할 질병처럼 취급받는다. 누군가 외로움을 느낀다고 하면 당장에라도 달려가 응급처치를 하고, 최고의 의료진을 급파해 세심히 케어해야 할 재난이라도 되는 양 구는 모습들을 자주 마주한다. 사실 좀 외로워도, 혹은 모두에게서 외면받아 고립무원에 홀로 서 있다고 해도 그 사실 자체가 우리를 치명적인 고통으로 밀어 넣지는 않는데 말이다. 돌이켜보면 장춘에서 내가 겪었던 것은 소외나 결핍이라기보다, 일종의 '고독 접종'에 가까웠다.


어쩌면 우리는 '적당히 즐길 만한', '적당히 취할 만한' 외로움에 흠뻑 빠져, 자신의 고독을 멋스럽게 포장해 세상 밖에 꺼내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종의 관객 지향적 고독이라는 것이다. 내 외로움을 봐줄 사람, 들어줄 사람이라는 상호작용의 보루가 있기에 역설적으로 외로움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닐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는 외로움에 대한 획일적 대처방식을 갖고 있는 듯 보이는 오늘날의 세상을 종종 감정과잉의 시대라 칭한다.


"당신은 절대 혼자가 아니다."

"외로울 땐 주위를 둘러보라, 소중한 사람들이 당신 곁에 있다."

"당신이 외로운건 당연한 것이다. 결코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외로움에 지친 자기자신을 꼭 안아주세요, 위로해 주세요."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아이를 꼭 안고 토닥여주는 듯한, 참으로 따뜻하고 달콤한 말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의구심이 든다. 왜 빨리 엉엉 울지 않느냐고, 너는 지금 충분히 외롭다고, 그러니 어서 빨리 상처 입은 나약한 속살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눈물을 흘리며 위로를 구하라고 재촉하며 되려 뺨을 후려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타인의 시선조차 없는 진공 상태에서 외로움은 비로소 거추장스러운 자기연민의 가면을 벗고 실체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 실체가 사실은 진정한 고독이 아닌, 관객을 기다리는 마음이었음을 마주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외로움이라는 실체 없는 독(毒)에 대한 면역을 갖게 된다.


장춘에서의 혹독했던 예방접종 덕분에, 나는 이제 세상이 요란하게 떠드는 감정의 유행병에 휩쓸리지 않고 나만의 방에서 평온할 수 있게 되었다.


부디, 여러분도 평안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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