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은 영웅이 아니다.

효도라는 이름의 오만함에 대하여

by 염가인생

2026년의 설 연휴를 하루 앞두고, 나는 14년 전의 블랙박스인 일기장을 열어 본다.


2012년 1월 18일, 중국 장춘의 낯설었던 사계절을 버틴 스물넷의 나는 한국이라는 익숙한 이름의 쉘터로 향하고 있었다. 롱쟈공항 직원의 실수로 항공권이 증발하는 소동을 겪으며 깨달은 것은 중국은 여전히 만만치 않다는 사실이었고, 인천공항에 내려 검문 없이 통과하며 느낀 것은 내가 결국 한국인이라는 안도감이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 학창 시절 내내 무수히 열고 닫았던 공동현관 앞에 선 순간, 나는 내가 고작 일 년의 부재 만으로도 이곳에서 완벽한 이방인이 되었음을 실감했다. 머리가 아닌 손이 기억하던 비밀번호는 응답하지 않았고, 부모님도 외출 중이셔서 하염없이 누군가 문을 열어주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엔 문조차 열지 못한 채 1층에서 부모님이 집으로 돌아오길 기다리던 그 초라한 스스로가 좀 우습기도 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곳은 엄밀히 말해 부모님의 집이지 내 집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내 집에 더 가까운 건 이제 저 영하 30도의 삭풍이 불어대는 장춘의 낡은 아파트였다.


내가 살아내야 하는 삶과 가까운 곳을 집이라 정의한다면, 그곳은 그저 나를 낳고 길러준 고마운 사람들이 이제 물리적 양육이라는 의무에서 조금은 해방되어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곳일 뿐, 내가 가기만 하면 언제든 대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두 팔 벌려 나를 환영해주어야 할 어떠한 의무도 없는 곳이었다.


아파트 단지를 어슬렁거리며 괜스레 외투 주머니 속 장춘 아파트의 투박한 열쇠뭉치를 만지작 거리던 그 모습은, 어쩌면 당시 한국과 중국 어디에도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하고 표류하던 내 정체성의 정확한 좌표였을지도 모르겠다.


"어렸을 땐 아버지와 대화하는 것이 참 싫었었는데... 이젠 나도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참 많고 아버지께서도 나에게 해주고픈 말들이 참 많으신 듯했다. 꿈 앞에 당당했지만 결국 현실을 이기지 못하셨던 아버지. 높은 이상과 투박한 현실 속에 고뇌해야만 하셨던 아버지. (...) 나는 아버지께서 나를 통해 못다 한 부분을 이루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내 마음속의 열망이 아버지의 한과 융화되어 버린 듯, 아버지 대신 내가 꿈을 잃지 않고 세상 앞에 당당한 거인이 되고 싶단 생각을 하게 된다." - 2012년 1월 18일의 일기


그날 밤 아버지와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선명하다. 이제 막 스스로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 펜을 쥐고 새하얀 지면을 응시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꿈 앞에 당당해지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당신처럼 결국 현실에 꺾여 똑같은 고뇌를 안은 채 평생을 살아갈까 봐 두려워하셨다. 물론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겠노라 답했다. 사실 그때의 나는 실패가 무엇인지, 그 실체조차 알지 못했다. 그저 실패란 결코 두려워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정의만 가슴에 품고 있던 시기였다.


그날 아버지와 주고받은 소주잔에는 꿈이라는 단어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160cm 남짓의 자그마한 체구로 거친 세파를 막아내느라 닳아버린 당신의 청춘을 보며, 나는 비장하게 다짐했다. 당신이 헐값에 팔아치운 그 꿈을 내가 반드시 비싼 값에 되찾아 오겠노라고. 그때의 내게 그것은 자식으로서 짊어져야 할 당연한 부채이자, 효도라는 이름의 성배였다. 나는 그 부채를 법정 이자의 몇 배를 덧붙여 누구보다 빨리 상환하고, 성배를 움켜쥔 인디아나 존스 같은 영웅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14년이 흘러 다시 설날을 맞이하는 2026년 오늘, 나는 그날의 나를 조용히 불러 세운다.

그리고 아버지를 대신해 거인이 되겠다던 그 기특하고도 위험한 다짐을 조심스럽게 거두어낸다.


이제는 그런 다짐이, 그런 생각이 나를 포함해 자식들로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 당연히 누군가의 자식이었을 부모와 그들의 부모까지 모두 포함한 이 무수한 삶들에 어떤 굴레와 족쇄를 채우는지, 그리고 반대로 누군가의 부모로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이 정작 자식에게 채워진 그 어떤 굴레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자식은 부모의 희생에 어떠한 부채도 없다. 부모가 청춘을 헌납해 자식을 키워낸 것은 훗날 이자를 쳐서 되받기 위한 투자가 아니라, 그 자체로 완결된 사랑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부모의 한을 내 열망과 융화시키는 행위는 언뜻 숭고해 보이나, 사실 그것은 우리가 성장하며 접했던 수많은 매체들이 뿌려댄 소위 "대단한 성취"를 거둔 이들의 신화적 내러티브나, 사회의 안정적 유지와 운영을 위해 가공된 목적지향적 내러티브에 절여진 결과일 뿐이며, 실체 없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스스로 인생의 주도권을 타인의 서사에 내맡기는 무책임한 일이며 자신을 부모가 못다 이룬 꿈의 대리인으로 전락시키는 일이다.


부모는 자식에게 영웅담을 바란 적이 없다.

그저 족쇄 없는 발걸음으로 자신의 길을 당당히 걸어가는 뒷모습을 원했을 뿐이다.


나를 통해 당신의 꿈을 이루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내가 당신보다 조금 더 편안하게 스스로의 길을 가길 바라셨을 뿐이다.


14년 전, 현관문을 열지 못해 서성이던 나에게 이제 명확히 말해 줄 수 있다.


부모를 위한 영웅이 되어 살기보다, 오롯이 한 명의 인간으로서 내 삶을 지탱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고도 가치 있는 일임을 기억하고, 내가 꾸린 가족을 지키고, 나 자신의 인생을 정직하게 살아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작아지는 부모의 등 뒤에서 자식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품격 있는 독립이라는 것을 명심하라고.

너는 그저 그분들이 지켜낸 그 지반 위에서 너만의 꽃을 피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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