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집에서 인간을 보다

체인소맨 2부 완결 리뷰

by 최시헌

마침내 체인소맨 2부가 종결이 돠었다. 그러나 현재 체인소맨의 결말은 매우 논란이 많다. 결국 이 모든 것이 꿈이었다는 진부한 클리셰처럼 보이는 탓에 독자들은 지금까지 희생되어져 온 덴지의 가족들 그리고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들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항의를 한다. 그러나 이는 복합적인 시선으로 작품을 바라보기 보다 단편적인 서사 해석일 뿐이다.


가짜 체인소맨이 나타나 체인소맨에 대한 군중의 여론이 안 좋아질 시점, 체인소맨이 공격을 당하고 남겨진 나유타는 덴지와의 행복을 떠올리며 한때는 그의 심장을 먹으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죽음을 맞이한 지금, 나유타는 덴지가 채워준 행복한 기억이 자신을 이루어왔음을 깨닫는다.


키가의 은신처로 옮겨진 덴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체인소맨 교회의 수장을 만나게 된다. 사실 그는 덴지 안의 완전한 체인소맨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모두의 공포, 그리고 덴지의 불행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그 조건을 충족사켰다. 나유타의 머리가 스시 쟁반에 올라오는 순간 이성을 잃어버린 덴지는 체인소맨에게 몸을 맡겨버린다.


마키마 떄와 달리 죽음의 악마를 막기 위해 공안과 노화의 악마에 의해 철저하게 기획된 작전은 확실히 잠시나마 덴지의 정신적 결핍을 채워준 소중한 존재인 나유타를 죽임으로써 불행을 극대화시켜 최강의 체인소맨을 만드려고 한다.물론 죽음의 악마를 없애는 것을 포함하여 인류에게 해가 되는 것을 없애려는 진보된 인간을 위한 계획이기도 했지만 노화의 악마의 요구에 맞춘 그 대가는 아이 1만명을 죽이는 것이었다.


결국 노화의 악마에게 먹혀버린 전쟁의 악마 아사/요루와 덴지는 각자의 상싱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가족

을 끊임없이 잃어 괴로워하는 덴지에게 아사는 엄마를 악마에게 잃은 경험을 고백하며 그녀도 그 상처를 극복한 적이 없지만 불행함에도 다가올 행복이 있을 것이라고 체인소맨이 말해주어서 살아갈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자 덴지는 뱃 속에서 어떤 악마의 사체를 토해내고 그렇게 1부에서의 동료들인 아키와 파워와 성묘를 갔던 행복한 기억을 떠올린다. 첫사랑이었던 레제를 떠올린다. 그리고 나유타까지…


좋아하는 사람들이 곁에서 모두들 떠나가는 것을 무력히 보기만 해야 했던 덴지는 그 사실에 몹시 괴로워한다. 하지만 포치타가 그 악마를 먹은 것은 상실을 기억하며 토해내며 가족을 잊지 않도록 한 것이다. 그의 본능적인 욕구로 포장된 무기력 따위가 삶의 동력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이 남겨준 기억들이 그로 하여금 생명력으로 전환되도록 한 것이다.


결국 노화의 악마가 무로 돌아가고 죽음의 악마가 강림하지만 덴지는 전쟁의 악마와 이에 맞서서 싸운다. 그러나 전투 끝에 기절해있던 덴지를 데려온 것은 죽음의 악마였고 전쟁의 악마는 죽음의 악마를 죽이고 영원한 전쟁을 반복시키는 꿈을 이루고자 한다.


정작 전쟁의 악마가 덴지를 애초부터 무기로 삼지 않은 것은 다른 인간 쪽의 영혼인 아사와 영혼이 섞여 덴지를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치열한 전투 끝에 덴지는 어떤 악마에게 먹힌다. 덴지는 포치타와 자신의 꿈은 평범한 생활을 하기를 바랐다고 생각하면서 그와 모두가 행복한 새로운 세계를 만들겠다고 결심힌다.


그러나 막상 포치타는 덴지는 평범한 생활을 할 때보다 악마와 싸울 때 더 행복해한다고 말한다. 덴지는 지옥이 아니면 천국을 찾을 수 없다면서. 결국 포치타는 체인소맨의 심장을 스스로 무로 돌려보냄으로서 체인소맨으로서의 덴지의 운명을 종결시키고 그토록 덴지가 꿈꾸던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한다.


그러니 다른 평행세계의 덴지는 이 모든 것이 결국 꿈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작가의 2부 시작 전 인터뷰에 따르면 <위대한 레보스키>라는 영화를 언급하며 결국 뭐였던 거야? 아무것도 안했고 전부 의미 따위 없었잖아. 라는 것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작가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 찝찝한 뒷맛에는 비극적인, 그러나 본질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디오니소스적 비극에 대해서 말하면서 창조자란 오직 가상 속에서만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가장 고통받는 자라고 말한다. 니체는 쇼펜하우어를 인용하며 세계와 삶은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을 줄 수 없고 따라서 우리는 그것에 집착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 인식의 열림이라고 말한다.


또한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을 대조하면서 아폴론적인 것은 실존적 공포를 위해 도덕이라든가 아름다움과 같은 가치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내야 했지만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이 최상의 성취라고 말하며 오직 인간에게 주어진 차선은 죽음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니체는 기억 없이 살아가는 것은 가능할지라도 인간은 망각 없이 살 수 없다고 말한다. 즉 인간의 삶은 탐욕스럽게도 사물 위에 올려진 환상으로 생존과 행복을 강요받는다는 것이다. 비록 체인소맨의 덴지의 경우와는 다르게 순서는 바뀌었지만 아폴론적인 것은 깨어있는 반쪽으로서 절제라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오히려 과도함이라고 말한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덴지의 상황을 비극적으로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덴지 또한 유년기부터 불행한 삶을 살아왔고 본능에 충실하며 그와 그를 둘러싼 악마들조차도 절제 없이 충동적으로 파괴와 학살을 하는 등 절제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고 도덕이라고는 더더욱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덴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폴론적인 쪽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자 하지만 번번히 그럴때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는다,. 그래서 그는 디오니소스적인 삶애 더 기울어져 있지 아폴론적인 삶에는 발을 걸치지도 못하는 상태인 것이다. 니체는 도덕이라는 환상 속에 살아가는 것보다 오히려 현실보다 현실 같은 가상 속의 가상 즉 전도된 의미의 꿈 속에서 실존적 욕구를 충족시키라고 말하지만 니체 자신이 정작 자살로 삶을 마감했듯이 덴지도 자신의 반복적인 괴로움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이때 포치타가 덴지의 체인소맨으로서의 운명을 종료시키고 이 모든 것을 평행세계의 꿈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과연 평행세게의 덴지가 느끼는 행복은 진정한 행복인 것인가. 니체가 말한 것처럼 결국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나는 평행세계의덴지가 느끼는 행복도 덴지의 디오니소스적인 쾌락도 행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니체는 평소에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초인의 전형을 드러내는 작품이라며 인용해왓는데 석영종 교수는 <죽음의 집에서 보다> 라는 책에서 니체가 도스토옙스키를 오독 했음을 설명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악 속에서도 선을 찾아내려고 몸부림 친 것이지 선악을 초월한 괴물을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석영종 교수는 역원근법이라는 서사적 관점을 제시한다. 즉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동시적인 시점에서 인간을 바라볼 때 비로소 신성한 이콘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1부의 완결인, 동시에 2부의 결말의 단초이기도 한 나유타는, 덴지의 충만한 행복으로서 존재했기에 이러한 동시성을 드러낸다.


마치 피에타처럼 무죄한 어린 아이에 불과한 나유타는 결국 살해당했지만 그녀는 덴지에게 주어진 진정한 행복은 그녀 자신이 누구인지도 상관없을 만큼 누군가를 돌본다는 충만함과 마키마로부터 이어지는 자식 같은 애틋함이 사랑을 베푸는 덴지 자신마저도 행복하게 했음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이다. 의미에서 반의미에서 다시 의미의 변증법으로서의 체인소맨은 감히 수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