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의 마르크스주의적 해체론으로 분석한 다와다 요코의 <헌등사>
다와다 요코의 헌등사는 2011년 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중심으로 마치 작품들의 베경 속에 과거가 망령처럼 배회하는 옴니버스 형식을 가진 단편집이다. 먼저 작품의 메인이 되는 <헌등사>에서는 한 노인의 무너져가는, 언제 꺼져도 이상하지 않을 기억 속 에서만 문명도, 사랑도, 일상도, 미래도 모두 숨 쉴 수 있다.
<헌등사>에서 인상적인 작품들 중에 또 다른 하나는 <불사의 섬>이라는 소설이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모든 원전을 영원히 중단시킨 이후, 우익과 시민단체의 대립 자체가 소멸한 시점, 그 이후로부터 정부는 민영화되고 인터넷도 끊기고, 빙송국도, 의무교육도 끊기면서 지식을 얻을 방법이 사라졌다.
해외와의 교류는 방사능 피폭의 우려로 진작에 끊겼고 세포가 계속해서 분열하는 돌연변이 때문에 노인들은 죽지 못하고 젊은이들은 죽어간다. 미디어가 사라져감에 따라 문명이 퇴화되어 흡사 에도 시대와 같은 상황이 된다.
그럼에도 최근에 나오는 오락 중에는 ‘몽환노게임’이라는 게 있다고 한다. 원한을 품고 죽은 망령이 읊조리는 어려운 말과 단편적인 망상을 나열해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든다. 그리고 그들 각각에게 어울리는 이야기를 들려주면 성불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개 없애도 끊임없이 새로운 망령이 나타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래도 실신하지 않고 끊임없이 즐기는 자가 승자가 된다. 그러나 이제는 ‘이긴다’라는 말의 뜻을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이렇듯 과거가 정지된 시차 속에 망령처럼 배회하는 모습은 마치 “하나의 유령 -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에 떠돌고 있다.”라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문장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서 유령은 물질화되어 있고 강력해지는 추상의 운동이다. 노동 가치, 화폐, 기술 등등 유령적 형식에 따라 이들 자본의 현실적인 전개 과정은 은폐된다.
이에 대항하는 사용가치와 주체성은 150여년전 마르크스의 시대에는 존재했으나 노동의 패러다임이 바뀐 지금은 같은 의미의 존재론적 아우라를 가져올 수 없다. 인간 노동은 점점 더 착취에 연루되고 담론 세게는 비참과 규율을 산출한다. 자본주의는 이러한 유령들, 언어적인 세계를 규제하고 욕망을 거세하는 존재들을 생산한다.
이에 대해 데리다는 새로운 인터내셔널 등 당시에는 현실적이지 못한 대안이라고 평가받기만 한 대안을 내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데리다 본인의 주장으로는 그의 화두는 고리타분한 신학적 대안이 아니라 메시아적 종말론과 목적론을 구별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를테면 벤야민의 메시아적 세계관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장소가 어디에 있으며 무엇이냐는 것이다. 헌등사에서 현대의 일본은 그 모습이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문명 이하의 그 무엇이 되었듯이 이 폐쇄된 공간에서 탈출구가 존재하냐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데리다와 마르크스주의는 막다른 골목으로 다다를 수밖에 없었는가? 이는 데리다의 사상인 해체주의(destructionism)과 연관되어 있다. 해체주의는 데리다 이전의 모든 주류 서양 철학을 싸잡아 로고스 중심 주의로 묶어버린 뒤 이를 비판하면서 불변의 절대적 진리라는 개념을 해체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같은 사상적 계열인 니체부터 푸코까지도 비판한다. 여기서 로고스란 신의 뜻이자 역사로서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진리로 나타낼 때 쓰는 표현이다. 그리스도교의 세계관이 깊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데리다는 로고스중심주의는 현존인 존재자의 존재의 규명에 지나치게 천착해왔디며 존재론은 이제 언어학에, 언어학은 기호학에, 기호학은 그래마톨로지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필자는 감히 그리스 사상을 토대로 그리스도교를 또 한 번 오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성경에서 모세를 처음으로 떨기나무에서 만날 때 하느님은 스스로를 두고 “나는 있는 나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존재자의 존재 규명은 애초에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미 존재는 신이 스스로가 존재한다고 확언함으로써 그 모든 신비가 풀렸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 이상 감추어진 것은 없다. 이 이상 그 어떠한 것의 존재론도 불필요하다. 이제는 명사의 철학이 아닌 존재의 행위인 동사의 철학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어떠한 동사이고 어떠한 행위여야 하는가. 이 또한 역시 복음서에 나와 있는 대로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 밀알(존재)가 스스로를 타인을 위해 희생하면 별과도 같이 무수한 아브라함이 후손보다도 많은 역사를 낳는 것이다. 이것이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이자 지고의 계명이 가지는 효과이다.
그러나 ‘마지막’ 계명이라고 역사의 종말이 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오히랴 그 계명의 실천으로 앞서 말했듯 수많은 역사가 재생산된다. 과연 사랑이란 법 조항은 절대적 진리이다. 그러나 그것은 명사로서 로고스로서의 최후의 개념일 뿐이다. 실제 실천은 전통적인 서구 철학에서처럼 단순한 이항대립일 수가 없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존재론이 다양한 허구의 주체들과 객체들을 형성해내고 이들을 대립물로 규정지음으로써 인간의 식민과 착취의 프레임을 만든다. 서로간의 희생은 나를 위한 타인의 희생이 됨으로써 인간을 형제가 아닌 원수 관게로 만든다. 선과 악의 무수한 전선이 대립한다고 하지만 실은 간교한 뱀을 배불리기 위한 돼지 울타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명사로서의 사랑은 지고의 덕이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사랑은 데리다가 단언하기를 망설였던 ‘목적론’이다. 그것은 목적론적인 희생이다. 예수가 보여준 가장 고도의 사랑이 십자가 수난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목적의 수단은 타인이 아닌 자신이며 목적의 내용은 타인이 로고스를 믿도록 하는데에 있다.
그리고 믿음은 추상을 실재로 받아들이는, 불완전한 인간 이성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실존적 행위이므로 로고스가 마침내 명사라는 질료에서 동사라는 실재로 행위되도록 다시 환원된다. 헌등사에서 100살이 넘은 할아버지는 너무나도 많은 사랑을 떠나보낸 구인류이자 자조적인 의미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신인류이기도 하다. 사랑은 기억 속에서 수없이 반복 재생되며 행복은 회생시키지만 사랑할 대상조차 없어진 생태가 무너진 지구에서는 그 누구도 지킬 수 없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자. 너무 늦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