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저널리즘

영적 투쟁과 정치적 투쟁:한국 정치의 영성에 관하여

by 최시헌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에베소서 6:10~18


자,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 정치는 영적 투쟁일 수 있는가? 답은 모순적이게도 두 가지로 나뉜다고 생각한다. 영적 투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첫째, 정치가 영적 투쟁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영적 투쟁은 절대악과 절대선의 싸움이다. ‘우는 사자와도 같이’ 우리를 집어삼키려는 악 evil은 어디에서 오는가? 성경의 모든 부분을 통틀어서 인간의 원죄는 교만과 연결된다. 선악과와 생명의 열매를 먹으려 했던 아담과 이브에서 알 수 있듯이 단순한 신에 대한 불신이나 불복만이 아니라 필멸의 존재 그 이상의 욕망, 전지전능, 무한함을 추구한 죄이다. 즉 끝없는 ‘욕망’ 그것이 교만이며 본질적인 악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자본주의가 세계를 지배하는 힘은 무엇인가? 바로 이 ‘무한한’ 욕망이다.


기 드보르라는 68혁명의 선구자는 <스펙타클의 사회>라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삶은 스펙타클의 집적으로 나타난다.” 이는 자본주의와의 싸움이 인간의 내면까지 침식했다는 것을 상징했다. 스펙타클이란 웬만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볼 수 밖에 없는 마력을 지닌 것, 일종의 물신주의이자 욕망 그 자체의 극대화이며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은 구조적으로 강조할 수 없지만 소비는 결코 강제할 수 없다라는 것이 자본주의의 아킬레스건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본질 중 하나인 혹은 만들어진 본성 중 하나인 무한한 욕망이라는 원죄는 우리를 더욱 자본에 굴복시킬 뿐이다.


그러니 영적 투쟁으로서의 정치는 대의민주주의냐 사회주의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인간 본성의 문제인 것이다. 즉, 정치인이 누가 뽑히고 정책이 무엇으로 결정되는지도 중요하지만 그 이면에 어떤 의도가 반영되어 있는지가 핵심인 것이다. 인간을 결국 또다른 욕망에 굴종시키는 것이냐 아니면 그로부터 해방시켜 서로에 대한 헌신으로 나아가느냐의 문제가 영적인 시선으로 정치를 평가하는 방법일 것이다.

반면 두 번째로, 정치가 영적 투쟁일 수 없다는 다른 맥락에서의 답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이는 에덴 동산에 대한 은유로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에덴은 그 자체로 이상사회, 즉 내부적 공간에 해당한다. 따라서 인간이 에덴에서 추방당했다는 의미는 현세라는 외부로 쫓겨났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바꿔 말하면 쫓겨난 순간, 이제 에덴은 현세의 외부가 되고 현세는 인간 삶이 이루어지는 내부적 공간이 됨으로써 우리가 현세에 갇히게 되었다는 말도 된다. 인간이 현세에 갇히게 되었다는 것은 더이상 이상이라는 진리를 직접적으로 알 수 없으며 오직 표상으로서만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교만이 만연한 정치에 한해서는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기만당할 뿐이며 이상을 동경하던 시선은 혼탁해진다.


자본주의 국가와 대의제 국가의 공통점은 그 둘의 아킬레스건이 ‘~의 거부”에 있다는 것이다. 가령 자본주의 국가는 소비를 강제할 수 없고 대의제 국가는 선거를 강제할 수 없는데 이들을 거부하면 체제는 붕괴된다. 그런데 이 소비와 선거는 소비자와 시민의 욕망과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것이므로 그들의 욕구를 끊임없이 생성해내는 것, 즉 무한한 욕망을 창출해내는 것에 자신의 존속이 달린 것이다. 인류 문명을 교만에 빠지게 만든다는 것은 그러한 무한한 욕망 창출에서 형성되는 불평등을 불가피하게 만든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사회는 욕망이 갈수록 소진되어 가고 있다. 불태워 증기를 내뿜게 하는 석탄들처럼 인적 자원으로서 소모되기만 했던 한국인들은 오래 전부터 번아웃 현상으로 희미한 생존 신호만을 간간히 몰아쉬고 있다. 특히 저출산과 청년 취업 문제는 그러한 현상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생산이든 소비든 시간이 좀 걸릴지언정 ‘사회적 거부’는 이루어지고 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한국 자본주의’를 붕괴시킬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임하여야 할 영적 투쟁은 무엇인가? 일단 붕괴되고 있는 이 상황 자체를 이용해야 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즉 교만 혹은 무한한 욕망이 인간에게 어떠한 행복이라던가 자아의 실현을 이루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이번 기회에 못 박아 두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야 그들은 비로소 자신의 진정한 욕망, 진정한 정체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며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서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문명으로서의 개인주의와 집단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