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생각이겠지만 특히 남자라면 젊어서 배워 두어야 할게 두 가지가 있다. 기타와 당구. 기타는 연애에 날개를 달고 당구는 친교의 장을 열기 때문이다. 어디 놀러 갔을 때 기타 치며 한곡 뽑기라도 하면 자신의 위상은 상상 그 이상이 되고 휴대폰 없었던 대학생 때 친구를 찾아볼 요량이면 으레 당구장으로 갔다.
아쉽게도 나는 둘 다 배우지 못했다. 통기타는 배우고 싶었지만 연습할 때 노래를 흥얼거려야 제맛이라 노래 못하는 나에겐 무리였고 당구는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서 따각따각, 당구알 부닥치는 소리가 그닥 경쾌하지 않아 별로였다. 기타와 노래, 당구와 담배는 바늘과 실 같은 존재로 각각 하나라도 잘했으면 쌍으로 재미를 붙였을 텐데 말이다. 아직도 기타 치며 노래 부르는 걸 보면 부럽다. 이 나이에 당구장 출입은 그렇지만...
나는 현악기가 좋다. 그 울림이 좋다. 클래식 음악에서 멜로디를 담당하는 대부분의 악기는 줄(현)로 소리를 낸다. 사실 건반악기로 알려진 피아노도 현악기다. 정확히 말하면 건반 달린 타현악기다. 코끼리 두 마리 정도가 끄는 힘으로 잡아당긴 줄을 건반에 연결된 해머가 때려서 소리를 내는 것이다. 이렇게 줄을 때리는 타현학기, 기타처럼 줄을 튕기는 발현악기 그리고 바이올린처럼 활로 줄을 마찰시켜 내는 찰현악기가 현악기의 세 종류다.
젊었을 때 기타를 배우지 못한 아쉬움에 바이올린을 들었다. 기회를 놓쳐 뒤늦게나마 배운다는 인상을 주는 기타보다는 낫지 싶었다. 사실 기타나 바이올린, 피아노도 다 어렸을 때 시작해야 하는 것이겠지만 왠지 모르게 끌리는 바이올린을 이런 식으로 접근했다.
고등학교 때 현악부에서 잠시 바이올린을 잡았지만 그로부터 수십 년 후 다시, 보면대를 세워 놓고 바이올린 몸통에 어깨받침대를 끼우고 왼손으로 바이올린 목을 잡아 어깨에 살짝 올려놓고 얼굴을 약간 왼쪽으로 돌려 턱으로 조인 다음 오른손으로는 미리 송진 먹인 활대를 쥐고 조심스레 바이올린 줄에 올려놓아야 비로소 바이올린을 켤 준비를 끝낸다. 아, 그리고 튜닝을 하고... 뚜껑만 열면 끝인 피아노는 그래서 항상 바이올린을 기다린다. 무대에서 흔히 보는 풍경이다.
평소 해보지 않던 자세는 일상을 깨운다. 앞으로만 걸었던 러닝머신을 뒤로 걸어보니 전혀 새로웠다. 쓰지 않던 근육을 움직이니 상쾌함이 자극이 되어 뇌를 쫄깃하게 한다. 눕다가 서다가 앉다가 걷다가 다시 앉거나 눕는 걸로 끝나는 일상에서 바이올린을 끼고 연습하는 자세는 나에게 신선함을 준다. 어깨를 펴고 두 팔 벌려 오른손을 휘저으면서 바이올린 선율에 몸이 웨이브를 짓기도 하고 눈을 지그시 감기도 하고... 스텝만 안 밟았지 우아한 때로는 경쾌한 춤사위를 연출한 것 같다. 두어 시간 연습하고 나면 어깨가 결리기도 하고 목이 뻐근하면서 팔도 좀 얼얼한 것 같아도 오래 묵힌 녹슨 기계를 돌린 기분이다. 개운하다.
장소는 무대가 아닌 방구석이지만 상상의 나래는 펴지게 마련, 사람들이 앉아 있고 36촉짜리 형광등 세 개는 눈부신 조명으로 빛나고 일 분짜리 연습곡은 한 시간짜리 연주곡이 된다 싶으니 일상이 화려하게 부활하는 것 같다. 혼자 놀기의 진수다. 아래윗집에도 들렸다면 그들도 함께 즐겼길 바랄 뿐이다. 기타 못 배운 한을 뒤늦게라도 푸는 기분이다. 언젠가는 한번 기타 치며 들려주고 싶었었던 젊었을 적 그 아이에게도.
여가활용을 대부분 보는 것으로 채우는 게 아쉬웠다. 영화를 본다거나 책을 읽는다거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게다. 여기에 게임까지 추가된다면 시간은 블랙홀로 빠져든다. 낮이 밤이 되고 새벽이 되는 것은 찰나의 순간, 몰입과 승부욕이 합체되어 시간을 잡아먹는 괴물이 된다. 예전에 나는 테트리스로 경험해 보았다. 머리도 식힐 겸 잠시 해본다는 게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르고 새벽녘을 맞이했다. 내일 아니 오늘이 된 그날이 리포트 마감날이었으니. 허걱... 다행히 때 이른 충격이 요법이 되어, 급체를 하면 그 음식을 다시는 입에 대지 않듯 게임을 멀리하게 되었다. 그러니 역시 야외활동이 좋은 건데 미세먼지에 요즘은 코로나까지 겹쳐 녹록지 않다. 서울로 이사 온 이후 연일 계속되는 미세먼지에 질려 춘천 호반의 도로를 질주했던 자전거를 팔아버렸다. 그다음 뭐가 있을까.
당연히 나에게는 바이올린이 있다.
하나하나 알아간다는 기쁨을 아직도 느낄 수 있다는 게 또한 기쁘다. 정확히 말하면 습득이겠다. 연습만으로 정직하게 얻어내는 실력 말이다. 하나하나 허들을 넘어 결승점까지 다가간다는 성취감은 결승점 통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정에 있는 것이었다. 대학입시도 치렀고 반백년이 넘는 인생을 살아오느라 숱한 경험을 했음에도 이제야 노력, 정직, 과정에 방점을 두는 사고를 '습득'하게 되었으니 그저 반성할 따름이다. 얼마나 많은 깨달음이 있어야 인생은 완성되는 것일까. 맞다 '과정'에 방점을 두었다 했으니 지금의 깨달았음에 일단 만족해야겠다.
오늘도 두 시간을 연습했다. 연습이 즐거웠으니 취미인 게 맞나 보다. 지판을 짚느라 손끝이 얼얼하다. 손끝 신경은 뇌의 자극으로 이어진다는데 치매는 안 걸리겠다. 취미에 노후까지 추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