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결핍과 욕구 관찰일지:컴플렉스

숨기지만 드러나는 것들에 대하여

by 홍겨울

사람을 많이 만나는 일을 하다 보면, 행동에서 과거의 사건들이 보일 때가 있다. 그 사람이 주장하는 이야기 그 자체의 텍스트보다, 반응이나 흐름 속의 태도가 더 솔직하다.


그렇다고 누군가의 상처를 꿰뚫어본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자주 반복되는 장면의 패턴들이 있다. 이런 것들이 우연이 아니라 통계처럼 느껴진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투사, 반동형성, 지위 불안 등의 말로 설명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훨씬 단순하다.


역설적이게도 사람은 결핍을 감추려 애쓸수록, 그 결핍과 가장 가까운 방식으로 행동한다.


이 글은 누구의 어떤 행위를 비판하는 것도, 감정적으로 못마땅해 여기는 것도 아니다. 그냥 나도 모르게 보이는 것들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관찰 일지일 뿐이다. 누구나 방어기재는 존재하고, 마땅히 있어야만 생존할 수 있다.





패턴1. 나를 과하게 높여 부르는 사람들


내가 원한 적 없는 호칭을 받을 때가 있다. 아니, 원한 적 없다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굳이 그렇게까지 높여주지 않아도 되는데, 조금 부담스럽게 들리는 상황이랄까. 물론 어찌되었든 존중이라는 측면에서 감사하긴 하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부터 “원장님”, “대표님” 같은 말이 반복적, 지속적으로 쓰인다. 나는 스스로에 대해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는데, 상대가 먼저 날 위에 올려 놓는다. 이건 예의라기 보다는 위치 정렬에 가깝다.


이 경우는 크게 세가지이다.


첫째, 지위불안

본인의 위치가 불안정할수록, 타인의 위치를 먼저 고정하려는 경향이다. 어린 시절, 비교 속에서 자란 사람들에게서 자주 보인다. 늘 누군가보다 위거나 아래여야 했던 경험. 아이러니하게도 진짜 권위를 가진 사람은 호칭을 가볍게 쓴다. 호칭에 집착하는 쪽은 권위가 부족하게 살아왔던 사람이다.


둘째, 인정결핍: 널 올려줄 테니 나도 올려줘!

인정 결핍인 사람들의 대화는 칭찬이 그 행위의 내용보다 사람 자체에 붙는다. 예를 들면, “역시 다르시다.” 같은 칭찬. 그리고 그 칭찬 후에 본인의 이야기(묻지 않는 자기 PR)를 자연스럽게 이어가려 한다. 그 쯤에서 한 번 웃어주면 내심 좋아한다. 사실 이들은 나를 올린 게 아니라, 나를 통해 본인의 가치를 끌어 올리고 싶어한다.


셋째, 수동지배이다. 내가 낮아지는 “척”하며 너를 묶겠다.

통제 회피형. 스스로를 낮추고 상대를 높여서, 결정이나 책임을 넘기거나 죄책감을 유도한다. 속으로는 ‘널 존경한다고 하면, 나한테 강하게 못하겠지.’ 라고 생각한다. 이건 강의 현장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제가 잘 몰라서요, 선생님이 하라면 할게요.” 그래서 내가 기준을 세우면 “역시 대단…”으로 감정 포장을 해서 반박을 어렵게 만든다. 세상에 바보는 없다. 그래서 모두들 원하는 방향이 이미 있다. 이들은 존중을 빌미로 갈등을 못하겠다는 기술을 구현한다.





패턴2. 가장 계산적인 사람이 계산을 혐오할 때


가장 계산적인 사람이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인정이 없냐, 계산적이냐”고 말할 때가 있다. 그는 늘 손익을 따진다. 말 한마디, 약속 하나에도 유불리를 계산한다. 그런데 누군가가 비슷한 행동을 하면 유독 강하게 반응한다.


비슷한 맥락으로 불안, 서운함, 의존욕이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 울거나 서운함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면 “감정적인 사람 제일 싫어. 피곤해.” 라고 회피한다. 내 감정이 흔들릴까 봐 차단하는 모습이다.


이런걸 심리학 용어로는 “투사”라 한다. 내 안에 있는데 인정하기 싫은 성향, 충동, 감정이다. 그리고 그걸 내 자아가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그걸 타인에게 붙여서 본인의 불편함을 줄인다. 여기서 핵심은 내 안의 요소가 강할 수록 남에게서 그 신호를 더 빠르게 잡아채고 과민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대게 어린 시절 경험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경로 몇 가지를 적어보겠다. 실제 원인은 이 중 여러 개가 섞여서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첫째, 조건부 사랑, 칭찬이다. 어린시절 부모님 말씀을 잘 들어야 예쁨을 받고, 착해야 사랑을 받았다. 화, 욕심, 질투, 이기심 등 특정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면 혼나는 방식으로 교육받아왔다. 그 결과 그 감정과 성향 자체가 무의식 중 금지되는 현상이다.


둘째, 불안정 애착이다. 예측불가한 돌봄을 받고 커온 경우이다. 어느 날은 부모님이 차갑고 어느날은 친절하다. 그 상황에서 아이는 관계를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눈치를 발달시킨다. 그 결과 통제, 계산 능력이 자라나는데 동시에 그걸 부끄럽게 여기기도 한다.


셋째, 양육자의 모순이다. 부모의 말과 행동이 불일치하게 커온 경우이다. 부모는 밖으로 드러내기를 좋아하면서 필요 없는 걸 사지 말라 한다던가, 인간관계에서 손해보지 않으려 꼼꼼하게 따지면서 계산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 결과 아이는 그 규칙을 내면화하면서 실제 행동은 배운 대로 한다. 내면에서는 충돌, 밖으로는 “난 저런 사람 싫어.” 가 된다. “반동형성”이라는 방어와 흔히 자주 붙어 다닌다.





패턴3. 원칙과 도덕을 과하게 중요시하는 사람.


어떤 사람은 원칙과 도리를 너무 자주 말한다. 그리고 누가 사회적인 법규나 도덕을 지키지 않는 모습을 보면 참을 수 없어 한다. 이건 “도덕적 과잉보상”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이 사람들은 도덕이 본인의 불안을 가라앉히는 장치가 되는 경우가 흔하다. 그래서 상황을 유연하게 보거나 협상하기보다, 먼저 규칙, 원칙, 정의라는 틀을 내세워 판을 통제하려 한다.


이런 사람들은 속으로는 이기심, 계산, 질투, 회피, 욕망 등의 스스로가 허용하기 싫은 면이 있다. 왜냐하면 어린시절 착해야 사랑받았거나 그런 모습으로 혼나거나 수치심을 크게 겪어 왔기 때문이다.

그럼 마음속에서 흔들리는 나를 남이 보면 안된다, 느슨해지면 무너진다는 공포가 생긴다. 그래서 도덕을 철벽처럼 강화한다. 본인의 정체성이 불안할수록 도덕을 더 크게 여기고, 남의 작은 흠도 크게 느낀다. 타협을 현실적인 조정이 아니라 타락의 형태처럼 크게 느낀다. 그래서 남의 실수에 유난히 가혹하고 예외를 싫어한다. 본인의 이익이 걸려도 원칙으로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그 원칙으로 상대를 제약하려 한다.

예를들면, “원칙이 이러니 당신이 따라야죠.”, “그건 예의가 아니죠.” 이런 식으로 도덕을 협상에서 이기기 위한 무기로 사용하려 한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이런 유형은 사회에서 일을 같이하면 조금 많이 피곤하긴 하다.





패턴4. 웃음을 가장한 비꼬기


첫 만남인데도 어깨를 툭툭 치고, 이름을 편하게 부르고, “우리 이제 친구하자”, 또는 애인이 있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물론 이렇게 행동해도 이상하게 거리감이 안 생긴다면 오케이. 근데 묘하게 불편함이 드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 불편한 사람들은 거리감을 표했을 때 “에이~ 또 벽친다. 너 이런거에 예민한 타입이구나?” 아니면 “헐, 너랑 있으면 숨 막히겠다.” 라는 문장으로 응수한다. 칭찬인 듯 시작했다가 “야, 그래서 너 남친이 좀 힘들겠다?” 로 끝나는 농담을 던지고, 상대가 불편해 하면 장난도 못 치냐며 분위기도 못 읽는다고 책임을 넘긴다. 이들은 친한 척 하며 사적인 영역을 넘나들고, 분위기를 주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은근히 눈치가 없고 선을 넘는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경계침범”과 “과잉친밀”의 조합으로 본다. 불안애착성향, 회피와 불안이 뒤섞인 혼합형 애착이 바탕이다. 유머를 방어기제로 사용하면서 수동과 공격을 함께 쓰는 언어로 관계를 조율해 나간다. 그 가운데에서 상대의 경계와 반응을 떠보는 테스트가 반복된다.


이 패턴이 작동하는 목적은 세 가지다.

첫째, 거절이 무서워서다. 진지하게 다가갔다 거절당하면 아프니까 처음부터 농담으로 접근한다. 거절당해도 "장난인데?"로 상처를 줄인다.

둘째, 관계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는 것이다. 친밀감을 빠르게 만들면 상대가 '이미 친한 사이'처럼 행동한다. 그 상태에서 던지는 비꼼은 작은 통제가 된다.

셋째, 내면의 불안을 숨기려고다. 속으로는 불안한데 겉으로는 쿨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다. 그래서 웃음과 비꼼으로 감정을 덮는다.


이들의 내부를 보면 '거리감'이 느껴질 때마다 불안해진다. 거절 신호를 받으면 상대를 "예민한 사람"등의 프레임을 만든다. 그러면 자신이 거절당한 게 아니게 된다. 경계를 세우는 건 자신을 밀어내는 것으로 느껴진다. 비꼼으로 상대를 위축시킨 뒤 다시 자기에게 유리하게 만든다. 당근과 채찍을 섞어서 거리를 조절한다. 상대가 불편해하면 "장난"이라며 책임을 피한다.


이런 패턴을 가진 사람들의 어린시절은 대게 이렇다. 집이나 학교에서 개인적인 경계가 존중되지 않았다. 진지하게 다가갔다 무안당한 경험이 반복됐다. 그래서 웃기게 접근하면 덜 아프다는 것을 배웠다. 감정을 드러내면 유난이라는 말을 들었다. 애정 표현이 존중되지 않는 집에서 자랐다. 그래서 진지함=약점이라고 배운 것이다. 그래서 다가갈 땐 빠르게, 걸리면 농담으로, 거절당하면 비꼼으로 돌아오는 게 방어기제가 되었다. 나보다 한 세대 위의 다수의 한국 남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그 시대는 그랬으니까.





마무리하며


결핍은 절대량이 아니다. 욕구 대비 충족되지 못한 비율이다. 그래서 겉으로 풍족해 보이는 사람이 오히려 더 불안할 수도 있다. 이 모든걸 다 없애고 완벽한 사람이 될 수는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 인정하자. 그게 스스로도 편하다.


진심으로 인정하고 나면 이 모든 것이 나의 무기가 된다. 오히려 이런 결핍을 내세워 그런 사람인 척 연기하고, 사회에서 이득을 취할 수 있는 경지가 온다.


혹시 이런 결핍이 큰데 용기가 없거든, 그림을 열심히 그리는 방법이 해결책 일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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