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의식 과잉인 사람들 관찰일지: 낮은 자존감

의도를 숨기는 대화가 피곤한 이유

by 홍겨울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유독 눈에 띄는 유형이 있다.

자존감이 낮아 보이는데, 이상하게 자의식은 과잉인 사람들.


처음엔 이 조합이 불협화음 같이 느껴졌다. 자존감이 낮으면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는 건데, 왜 오히려 자기 자신을 더 의식하는 걸까? 그런데 관찰하다 보니 알게 됐다. 이 둘은 모순이 아니라 인과관계에 가깝다는 걸.


자존감이 낮으면, 내 안의 '나는 괜찮다'가 약하다. 그래서 괜찮다는 것을 바깥에서 확인하려는 습관이 생긴다. 그 확인 욕구가 커질수록 '지금 내가 어떻게 보이지?'에 더 매달릴 수밖에 없다. 결국 자의식 과잉은 자기애가 아니라 자기 의심에서 온다. "내가 특별해야 해"가 아니라 "나 지금 평가받고 있어"에 가까운 거다. 그리고 이 자의식 과잉은 대화에서 특정한 패턴으로 나타난다.



내가 관찰한 몇 가지를 적어본다.



패턴 1. 말이 '전달'이 아니라 '관리'가 된다

이들의 말에는 내용보다 주변 장치가 더 많이 붙어 있다.

말은 "그냥 한번 물어본 거야"의 뉘앙스인데, 눈은 "너 지금 내 마음 읽어봐"를 하고 있다. "거절하면 너 나쁜 사람 되는 거 알지?"가 웃음의 기저에 깔려있다.


메시지는 내용이 아니라 표정, 뉘앙스, 여지, 보험, 변명까지 함께 세팅 되어 있다. 대화가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니라 무대 위의 연기가 된다. 문제는 그 연기 냄새가, 생각보다 잘 난다는 거다. 그래서 거짓에 거짓으로 답을 하려니, 내가 이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싶을 때가 많다.



패턴 2. 확실한 결론 대신 '떠보기'로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상대의 반응을 계속 살핀다. 내가 한 말이 어떻게 들렸을지, 내가 지금 무시당한 건 아닌지, 내가 조금 더 잘 보여야 하는지. 그래서 대화가 이런 식이 된다.

"그런데… 그거 가능해?"

가능하면 "역시 너밖에 없어"가 따라오고, 불가능하면 "아니 그냥 물어본 거야~"가 나온다.


"요즘 다들 힘들지?"

정말 힘든지 묻는 게 아니다. '나 힘든데 말해도 되나?'의 예열이거나, '너 힘들다고 말하면 내가 위로해줄 테니 나도 인정받을래' 조금 더 나쁜 심보의 사람들은 '나만 힘든건가? 너도 힘들었으면 좋겠다. 너만 맨날 잘되는 것 같아 질투나.' 일 수 있다.


"난 괜찮은데…"

괜찮은데 왜 말해. 괜찮으면 그냥 괜찮으면 되잖아. 그런데 이 문장은 대체로 괜찮지 않다는 뜻이다. 괜찮지 않다고 말했을 때 거절당할까 봐, 먼저 "괜찮다"를 올려놓고 시작하는 안전장치다.

책임은 최소화하고, 상처받을 가능성도 최소화한다. 그리고 그 최소화 작업을, 상대가 대신 해주길 은근히 바란다. 가끔 보면 대놓고 바라는 것 같기도 하다.



패턴 3. 모르는 척, 바보인 척하는 연기

내가 특히 관찰하게 되는 지점이다.

"나 잘 몰라서 그런데…"라는 느낌으로 시작하는데, 진짜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니라는 걸 대화 몇 번만 하면 알 수 있다.

그 질문에는 정보가 아니라 상대의 심리가 걸려 있다. '너 지금 친절하게 설명해줄 사람인지', '내가 이 말을 꺼내도 안전한지', '네가 어디까지 양보할지', '내가 이득을 챙겨도 네가 기분 안 나쁠지'.


질문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테스트다.

이게 왜 더 눈에 띄냐면, 모르는 척이라는 포장은 상대에게 두 가지를 동시에 요구하기 때문이다. 첫째는 친절. 둘째는 책임.


내가 설명해주면 그게 당연시되고, 동시에 그 사람이 원하는 방향으로 대화가 밀려도 거절하기 어려워진다. 거절하면 내가 "쪼잔한 사람"이 되고, 받아주면 내가 "평범한 사람"이 되는 아이러니다.

대화가 어느새 내용이 아니라 이미지 게임으로 바뀌어 버린다.


물론 누군가는 정말로 몰라서 물을 수도 있다. 문제는 '몰라서'가 아니라 '몰라 보이게'가 습관이 된 경우다.

그 사람은 직접 요청하면 거절당할까 봐, 직접 주장하면 미움받을까 봐, 그래서 질문을 들고 나온다. 질문 뒤에 숨으면 덜 다친다.



패턴 4. 논점을 이탈해서 판을 바꾼다

가끔은 대화가 더 노골적으로 삐딱해진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는 분명히 B인데, 상대는 갑자기 옆구리에서 A를 꺼내서 던진다. "근데 너 예전에 A라고 했었지 않아?" 같은 질문. 그 순간 나는, 이 사람이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논점을 이탈해서 판을 바꾸려는구나 하고 느낀다.


애초에 다루던 문제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건지, 아니면 내가 말한 걸 더 다루기 쉬운 모양으로 구겨서 공격하려는 건지. 실제로는 내가 그런 취지로 말한 게 아닌데도, 상대는 내 말을 자기 편한 형태로 바꾼 다음 "그럼 결국 너는 A 주장한 거잖아"로 몰고 간다.


내가 말한 사람이 아니라, 상대가 만들어낸 가짜 나를 세워놓고 치는 느낌. 논리학에서는 일명 "허수아비 권법"이라고 한다.


그렇게 대화가 흘러가면, 내용은 사라지고 '내가 뭘 말했냐/안 했냐' 같은 말싸움만 남는다. 그렇게 되면 그 말싸움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이미 지친다. 그건 대화가 아니라, 상대가 본인에게 유리하게 나를 끌고 가려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패턴 5. 의도를 숨기고, 책임을 흐린다

이 모든 패턴의 공통점은 하나다. 의도를 명확히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

똑바로 요청하면 "응" 또는 "아니"로 끝나는 일인데, 떠보기로 말하면 결론이 애매해진다. 그리고 애매함 속에서 사람은 쉽게 빠져나간다.

일이 꼬이면 "그런 뜻 아니었는데?" 관계가 흔들리면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로 뒤집는다.

결과적으로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나를 조종하나?" "왜 책임을 나한테 넘기지?"라는 감각이 올라온다.


나는 문장을 듣고 의미를 이해하는 걸로 끝나고 싶다. 그런데 그 사람의 말은 "문장 + 숨은 의도 + 혹시 모를 방어 문장 + 반응 테스트"로 구성되어 있다. 듣는 사람이 매번 다 해석해야 한다. 대화가 교류가 아니라 해독이 된다. 그리고 해독은 가성비가 떨어진다.


왜 이런 패턴이 반복될까

관찰을 계속하다 보니 내 나름의 해석이 생겼다.


의도를 숨기는 것은 악의라기보다 자기보호 습관이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거절당했을 때의 타격이 크다. 그래서 거절을 피하기 위해 요청을 직접 말하지 않는다.

대신 간을 본다. 반응을 떠본다. 여지를 남긴다. 실패했을 때 "내가 요청한 게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는 탈출구를 만든다. 이것이 그 사람의 생존 방식이다. 그래서 가끔은 안쓰럽기도 하다.


문제는 그 생존 방식이 타인에게는 비용이 된다는 것이다.

자의식 과잉은 결국 '나를 어떻게 봐줄까'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고, 그 집착은 상대방에게 ‘추리’ 라는 노동을 떠넘긴다. 누군가의 안전벨트를 내가 매번 대신 조립해주는 느낌. 그게 반복되면 관계가 피곤해진다.



관찰 이후, 나의 생존 방식

그렇다면 어떻게 대응할까. 내 안에서 약간의 원칙이 생겼다.

의도를 캐묻지 말고, 요청 형태로 끌어내자.

"무슨 뜻이야?"라고 하면 상대는 더 방어한다.

대신 "그래서 내가 뭘 하면 돼?"로 묻는다.


"지금 말하는 게, A를 해달라는 거야? 아니면 B를 원하는 거야?"

"결론만 확인할게. 지금 요청은 이거 맞아?"

"가능/불가능 판단하려면 조건이 필요해. 조건을 말해줘."

이렇게 말하면 상대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더 숨기거나, 아니면 드디어 요청을 말하거나.

둘 중 뭐든 내 입장에선 낫다.


숨기면 내가 거리를 두면 되고, 요청을 말하면 나는 판단하면 된다. 대화가 다시 바닥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나는 애매함을 싫어하니까, 정리 문장을 남긴다.

" 이렇게 이해했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만큼이야." 라고 바운더리를 만들어 상대를 통제한다.

말을 기록으로 바꾸면 게임이 끝나는 경우가 많다.

떠보기로 유지되던 대화가 갑자기 현실의 형태를 갖는다.



결론은 나도 성숙하진 않다. 그래도 짜증나.

물론 이 모든 관찰을 하면서도, 나는 매번 완벽하게 성숙하지는 못하다.

떤 날은 그냥 귀찮고, 어떤 날은 내가 너무 피곤해서 공감할 여력이 없다. 그럴 때는 "왜 말을 똑바로 안 해?"라고 속으로 외친다. 곧 이내, 그 다음 문장도 따라온다. "아, 저 사람은 지금 무서운 걸 수도 있겠다."

이 두 문장이 내 안에서 싸운다. 하나는 효율을 원하고, 하나는 이해를 원한다.


그래서 결론은, 이 글이 관찰일지인 것 답게 중간쯤에서 멈춘다.

나는 자의식 과잉인 사람들을 보며 여전히 피곤함을 느낀다. 그 방식이 신뢰를 갉아먹고, 관계를 이상한 심리전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느낀다.


동시에 나는 그게 종종 "나쁜 마음"이 아니라 "약한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도 안다. 낮은 자존감이 만든 생존 전략이라는 것도. 결국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상대의 마음을 고치는 일이 아니라, 내가 그 패턴에 말려들지 않는 방법이다.


그래서 추리 대신 확인을 택하고, 해석 대신 구조를 택하고, 불필요한 감정 노동 대신 명료한 문장을 택한다. 그게 이 관찰 끝에 내가 배운, 최소한의 자존심이자 최소한의 평화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그래도 짜증날 때는 짜증난다. 아주 많이.

다만 그 짜증을, 다음번엔 좀 덜 소모적으로 쓰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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