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알려 하지 않는 사람만큼 오만한 사람은 없다.

by 홍겨울

보통의 사람들은 '확신에 찬 사람'을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흔들리지 않는 신념, 빠른 판단, 분명한 옳고 그름.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이 시대에 그런 태도는 매력적으로 보인다. 혼란 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는 나침반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니체식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의지의 힘’처럼 보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우리는 ‘진실은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닌 시대가 되었다’는 기묘한 감각 속에 살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단단함이 진정한 강인함인지, 아니면 사고를 멈춘 결과인지 의심하게 되었다. 지금 시대는 정보가 넘쳐난다. 검색 하나만 해 보아도 상반된 주장이 쏟아진다. 채소가 몸에 좋다면서도 독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콩류는 장 건강에 좋다가 어느 순간 장을 망가뜨린다고 재분류된다. 이런 현상은 의학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 교육, 윤리까지 모든 영역에서 일어난다. 이런 시대에 사람들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비교하고 보류하는 쪽이고, 다른 하나는 "나는 이게 맞다"고 선언하고 멈추는 쪽이다. 나는 후자의 태도가 늘 불편했다. 확신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확신이 '더 알려 하지 않겠다는 선택' 위에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불확실성을 견디기 어렵다. 그래서 단단하게 지지할 곳을 찾는다. 문제는 그 발판이 '절대적인 틀'이 되는 순간이다. 그때부터 사람은 질문을 멈춘다. 낯선 정보는 무시하고, 반대되는 증거는 피해버린다. 점점 이 생각에 이르렀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무지의 자각'이 가장 고귀한 지성이라는 것. 문제는 무지가 아니라, 무지를 끝냈다고 선언하는 태도다. 알고자 하지 않는 순간, 사람은 더 이상 배우지 않고 수정하지 않는다. 가장 아이러니한 풍경은 이렇다. 정보는 넘쳐나는데, 알고자 하는 태도는 줄어든다. 선택지는 많아졌는데, 생각은 단순해진다. 아마도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새로운 정답이 아니라, 질문을 멈추지 않고. 확신에 도취되지 않는 자세일 것이다.

'더 이상 알려 하지 않는 사람만큼 오만한 사람은 없다'는 주장은 여기서 나온다. 오만은 자만이 아닐 수도 있다."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말하는 순간에도 오만은 시작된다. 모르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 더 배울 가능성을 거부하는 태도. 그것이 가장 깊은 형태의 오만이다. 끊임없이 의심하는 삶이 편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불안하고 지치기 쉽다. 하지만 이 불안정함이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세상이 흐릿해질수록, 스스로를 단단하게 만드는 방법은 확신이 아니라 유연함이다.

요즘 사회는 마치 거대한 아노미 상태 같다. 규범은 약해지고, 권위는 흔들리고, 진실은 여러 갈래로 찢어진다. 이런 환경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길을 잃은 사람이 아니라, 길이 하나뿐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더 이상 질문하지 않고, 자신이 옳다는 전제로 타인을 재단한다. 그래서 나 또한, 아직도 많은 것을 모르지만 '더 알고 싶지 않다'는 선택만은 하지 않으려 한다. 멈추지 않는 질문, 완성되지 않은 결론, 흔들릴 수 있는 생각들. 이것들이 나를 불안하게 하면서도 살아 있게 만든다.

한 가지 금기 같은 생각을 해본다. 만약 '악'이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어떤 조정자 역할을 한다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악은 경계 테스트 같은 역할을 한다. 이 선이 정말 선인가? 이 규칙은 왜 존재하는가? 이 확신은 어디까지 유효한가?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질문은 대개 '선을 의심하는 순간'에 나오며, 그 출발점은 대부분 '악'으로부터 시작된다.

만약 이 시대에 악마가 있다면, 칼이나 불처럼 폭력성을 나타낼 수 있는 형태로 어지럽히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친절하게 말할 것이다. "굳이 더 알 필요 있어요?" 위험한 유혹. 폭력 없이 사람을 멈추게 만드는 문장. 질문을 피곤하게 만들고, 탐구를 귀찮게 만드는 완벽한 기술이다. 확신에 찬 사람들은 정말 강한 것일까, 아니면 이미 멈춰버린 것일까. 명확한 기준을 가진 사람과 더 이상 수정되지 않는 기준을 붙들고 있는 사람은 전혀 다른데도, 우리는 이 둘을 쉽게 혼동한다. 멈춘 확신은 개인의 영역에만 남아 있지 않다. 그것은 타인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질문하는 사람은 우유부단해지고, 흔들리는 사람은 미성숙해지고, 모호함을 견디는 사람은 이상해진다.

사회가 이상한 방향으로 정돈되어 가고 있다고 느낀다. 불확실성을 견디는 능력 대신, 빠른 판단과 확신이 미덕이 되고, 질문은 지혜가 아니라 피로함의 상징이 된다. 철학적으로 보면, 인간은 두려움 앞에서 두 가지 방식으로 반응한다. 하나는 더 깊이 파고드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문을 닫고고 멈추는 방식이다. 흥미로운 점은, 문을 닫고 경계를 만드는 사람들이 늘 스스로를 '현실적인 사람'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세상은 원래 그래." "생각해 봤자 바뀌는 건 없어." "그냥 믿고 살면 돼." 이 문장들은 한 가지 공통된 "더 이상 깊이 들어갈 용기가 없다"는 고백을 담고있다.

이 구분은 단순한 성향 차이가 아니라, 우리가 불확실성을 다루는 방식의 본질적인 갈림길이다. 두려울수록 더 깊이 사유하려는 사람은 불안을 감수하고 계속 열려 있으려 한다. 반면 닫는 사람은 안정과 단순함을 선택하지만, 그 순간부터 더 이상 갱신되지 않는 세계 속에 스스로를 가둔다. 이 전환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기 때문에 당사자는 오히려 그 선택을 “현실적”이라 느끼곤 한다. 그래서 확신이라는 태도는 단단함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닫힌 구조물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확신에 찬 사람들을 보면, 콘크리트가 떠오른다. 겉으로는 견고해 보이지만, 내부는 이미 변화된 환경을 버티지 못할 만큼 경직되어 있다. 금이 가기 전까지는, 누구도 그 구조를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금이 가는 순간, 그 단단함은 유연하지 못한 만큼 빠르고 크게 무너진다.

반대로 유연함은 흔들리지만, 변화에 따라 조정되고 적응할 수 있다. 나는 이 차이가 ‘확신과 사유’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확신"은 흔들림이 없지만, 동시에 수정될 수 있는 여지도 없다.그래서 오히려 흔들릴 줄 아는 쪽이 더 강하다고 느낀다. 흔들림은 약함이 아니라, 변화에 반응할 수 있는 생존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사유"는 불안정하지만, 그래서 살아 움직인다.

인간의 위대함은 생각하는 능력에 있다. 다만 요즘 세상에선, 이 위대함이 점점 옵션처럼 취급되는 것 같다.

"더 이상 알려 하지 않는 사람만큼 오만한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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