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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랙베리 Apr 03. 2020

영화를 무대 위에 올리다. 뮤지컬 <시티오브엔젤>

뻔한 듯 안 뻔하게. 편집의 예술을 공기 속에서 재현하려던 시도

이미지 출처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

시티오브엔젤은 2019년 8월 한국 첫 라이선스 무대로 관객을 찾아간 뮤지컬이었다. 필자는 운 좋게도 초대권 응모에 당첨되어 해당 극을 총 3번 관람하게 되었는데, 덕분에 거의 모든 배우의 극을 보게 되었다.

극에 대한 첫인상은 상당히 실험적이라는 것이었다. 원작은 1989년에 무대에 올랐다고 했는데, 이 부분이 믿어지지 않았다. 무대의 막으로는 커튼 대신 카메라의 조리개를 본뜬 장치가 사용되었다. 1940년대의 할리우드 영화 타이틀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스크린의 디자인은 장치의 성격을 더 부각했다.


이미지 출처 https://m.ajunews.com/amp/20190812143508714

극의 실험성이 부각되는 또 하나의 부분은 조명이었다. 흑백영화 속 인물에게는 창백한 청색의 조명을 쏘아 채도를 제거하였고, 영화 밖 인물에게는 황갈색의 조명으로 채도를 높였다. 또한 영화 속 인물의 의상 및 배경 세트가 흑과 백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점을 부각하기 위해 영화 밖 인물의 의상 및 배경의 색은 거의 원색에 가깝거나, 원색이 아니더라도 채도가 매우 높았다.

이미지 출처 https://www.google.com/amp/s/mnews.joins.co

또한 편집의 예술인 영화의 요소를 표현하고자 한 부분도 눈에 띄었다. 극 초반에 작가가 특정 장면을 수정하는 장면에서 영화 속 주인공인 스톤과 울리가 거꾸로 돌아가며 말도 거꾸로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녹음된 음성을 거꾸로 돌리게 되었을 때 실제 일어나는 바와 같이 자음과 모음이 분리되어 정말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대신 (ex. 개나리 -> ㅣ+ㄹ+ㅏ+ㄴ+ㅐ+ㄱ => '이라낵' ) , 글자들을 역순으로 배치하여(ex. 개나리 => 리나개) '아, 이 장면이 거꾸로 돌아가는구나'와 같이 이해되도록 했다. 특히 스타인 역의 최재림 배우 같은 경우 이후 장면에서 스톤 역의 테이 배우를 들어 올려 옮김으로써(이지훈 배우의 극은 아쉽게도 보지 못했음) 해당 캐릭터가 가상의 인물이며, 스타인의 머릿속에서 나온 인물이라는 점을 강하게 보여주었다.

이외에도 장면 장면의 디테일이 눈에 띄었는데, 대표적으로 스톤 vs 스타인의 대립 장면과 버디 vs 스타인의 대립 장면을 들 수 있겠다. 전자의 경우, 작가의 의지대로 움직여야만 하는 스톤이 개인행동(!)을 하며 자신의 주장을 작가에게 설파(!)하는데, 이와 같은 장면은 스타인이 만취 상태에서 나타난 환상이 실체화된 형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스타인에게 들어간 술이 머릿속 싸움을 통제하던 브레이크를 제거하여 싸우던 내면의 한쪽이 인물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의 근거로 필자는 극의 마지막 장면인 세트장에서의 스톤을 제시하려 한다. 스톤은 온전히 자기만의 의지로 움직이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스타인의 생각 범위 내에서  말하고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스톤은 스타인이 제작한 극사실주의 목각인형인 셈이다.

이미지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

후자의 경우, 버디와 스타인의 가치관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부패한 영화판을 상징하는 버디는 사실 전문가로, 영화의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스타인에게 말이 너무 많다고 하는 장면에서 이와 같은 점이 드러나는데, 그는 대사 대신 클로즈업만으로 표현하는 압축적인 장면 구성에 대해 제시한다. 이와 같은 메시지 전달 방식은 편집의 예술인 영화의 두드러지는 특징 중 하나이다.

반면 작품 속 개인 개인이 가진 디테일을 잃기 싫어하는 스타인은 버디의 제시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스타인은 글을 쓰는 사람이고, 글에서는 주연과 조연의 분량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인물 중심의 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등장인물의 성격과 스토리의 개연성이다. 스타인은 영화의 언어 대신 글의 언어를 따르고자 한다. 흥행성을 따르느냐 극의 의도를 살리느냐 이전에는 매체의 차이가 있었다.

어쩌면 이 뮤지컬의 단점으로 꼽히는 정신없음은 해당 극이 버디가 아니라 스타인의 연출을 따라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이 단점마저도 극의 특징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초보자의 플롯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느낌이 있었고, 액자 밖 극의 선이 깔끔하게 정돈이 되었다면 대조됨으로 하여 날것의 느낌이 더 잘 살아날 듯싶었다.

하지만 잘못하면 매니악한 요소가 너무 강해져 진입장벽이 높아질 것 같았다. '잘못하면'이라는 것의 예시로는 액자 안팎이 모두 어지러운 상황을 들 수 있겠다. 액자 안팎이 모두 어지러우면 대조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그렇게 되면 의도성이 나타나지 않는다. 어지러움을 '보여주는'극이 아니라 그냥 '어지러운 극'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라이선스 초연 버전의 경우, 모든 인물의 비중이 비슷비슷하고 주인공의 비중이 아주 조금 더 많은 형태였다. 이는 극 중 거의 모든 배역이 1인 2 역이라는 점에서 기인하는 듯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연의 비중을 강화함으로써 극의 메인 흐름을 강화할 수 있는 방안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특히 뮤지컬 하면 해당 극을 구성하는 넘버를 빼놓을 수 없는데, 이 과정에서 주연의 넘버가 부족해지는 안타까운 상황이 생겼다. 극을 지배하는 재즈 선율은 극의 느낌을 살렸지만, 정작 배우의 성량으로 관객의 귀를 사로잡는 넘버는 거의 없었다. 특히 주연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했다. 따라서 극 부분 부분에 대한 정리는 다소 필요하다는 판단이다.

이하는 배역 및 배우들에 대한 메모이다.

스타인
ㅡ최재림
직구. 자신감. 성량. 적은 넘버였지만 무대 뒤까지 뚫는 느낌. 힘찬 무대. '주인공은 나다!'
ㅡ강홍석
사회초년생의 느낌을 살린 연기. 적은 넘버 속에서도 재즈의 특징을 살리려 했음.

내려놓음으로써 더 빛난다는 게 뭔지를 보여주었기에 매우 인상적이었음

스톤
ㅡ테이
점점 살아나는 톤 차이, 끝처리 재즈 바이브레이션 등 세밀
굵게 지르는 톤은 개성이 되면서도, 재즈 특유의 간드러진 느낌은 x
옛날 미국 영화의 주연 느낌이 어울려서 시너지가 발휘되었음
(이지훈 배우 버전은 못 봤음)

개비
ㅡ리사
성량 풍부, 극 진행할수록 개비&바비 연기톤이 통합되는 느낌
ㅡ방진의
좀 더 가는 목소리, 살아있는 연기(두 캐릭터 연기 명백히 다름)

울리
ㅡ김경선
목소리, 발성(높낮이, 울림)으로 캐릭터 구분.
귀여운 캐릭터 울리, 카리스마+여유 넘치는 도나
도나의 경우, 희로애락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강한' 형태의 프로페셔널. 불의 느낌
캐릭터 컬러 : 초록
스톤의 대사 '우리 착한 울리'에 대한 반응 : 이성으로 보이지 않는구나 하는 깨달음에 대한 허무감+슬픔

ㅡ박혜나
캐릭터스럽다기보다는 좀 더 사람스러운 쪽의 연기톤. 풍부한 발성.
좀 더 굵은 느낌의 소리
발성의 폭 크기 차이로 캐릭터 구분.
귀여운 너스레 울리, 단정+깔끔한 도나
도나의 경우, 희로애락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는 '절제된' 형태의 프로페셔널. 얼음의 느낌
캐릭터 컬러 : 파랑
'우리 착한 울리'에 대한 반응 : 인정받았다는 느낌에 대한 감동 및 무한 기쁨. 두 배우의 상반된 장면 해석이 인상 깊게 다가왔음.

버디
ㅡ임기홍
차분한 톤, 약간 허스키하면서도 카랑카랑한 창법으로 짱짱한 캐릭터 소화, 깨알 같았던 키 개그
(정준하 배우 버전은 못 봤음)

어로라
ㅡ백주희
굵은 톤, 카리스마
칼라ㅡ발음 개그. '뒤져트먹을 시간이야'와 같은 부분에서 어로라와 상반되는 개그 캐릭터의 면모 발휘

ㅡ가희
중간 톤, 간드러짐, 부드러움
칼라ㅡ너스레 개그. 이쪽은 '후ㅡ식 먹을 시간이야'. 극 갈수록 굵은 톤 첨가 

이미지 출처 https://www.google.com/amp/s/m.yna.co.kr/amp/view/AKR20190809134900005

개인적으로 흑백 영화의 느낌과 실험적인 극을 모두 좋아하기에, 필자는 해당 극이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깔끔한 플롯과 꽂히는 넘버를 기다리던 관객들에게는 아쉬움으로 다가갈 것 같은 느낌이었다. 또한 옛날 영화판을 다루는 극이기에 현대적인 캐릭터를 원하는 관객에게도 추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필자와 같이 흥행 영화의 찍어낸 듯한 진부함에 지친 관객에게는 더없이 잘 맞을 극이다. 해당 극의 포인트는 아주 전형적인 캐릭터를 고의적으로 이용한 풍자이다. 해당 극에서는 캐릭터의 전형성을 극대화하여 어쩌면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을지도 모르는 메이저 영화의 진부함을 풍자하였고, 극의 마지막까지 아주 전형적인 할리우드 액션으로 장식하여 반대로 옛 메이저 영화판의 강요되던 전형성을 비꼬았다. 직설법이 아닌 반어법을 선택했기에 극의 시원함은 두 배였다.


https://gallery.v.daum.net/p/viewer/1008/N09WU4wdrd


p.s. 개인적 느낌을 더하자면, 극 중 극의 내용에는 배리 매닐로우의 코파카바나라는 노래가 잘 맞는다는 생각이었다. 특히 위의 장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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