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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상이 Apr 27. 2024

젊었던 내 엄마

   

 “니 엄마 계모재?”

 “뭐?”

 “니 엄마 계모 아니냐고.”

 “울 엄마가 왜 계몬데? 니 내한테 한번 죽어볼래?”

 “아니……그게 그렇다 아이가. 밭에서 일하는데 누가 니네 엄마처럼 예쁘게 화장하고 다니냐고. 말이 안 되잖아.”

 “…….”

 친구의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맞다. 엄마는 다른 엄마들에 비해 젊었고, 예쁘게 화장을 했고, 꾸미기를 좋아했다. 친구들의 부모보다 나이가 젊은 건 아니지만 그들 부모는 따가운 햇살에 살이 검어지고 허름한 옷을 입으니 더 남루해 보였다. 


 친구들의 질투 섞인 말에 당황했다. ‘정말 엄마는 새엄마인가? 내가 첫째인데 새엄마가 될 수 있나?’ 


 그때부터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엄마의 모든 행동을 살피고 유심히 관찰했다. 


 엄마는 피부가 맑고 고왔다. 밭에 나갈 때 꼭 화장을 하고 챙이 넓은 모자를 썼다. 음식을 맛있게 잘했다. 그때는 흔하지 않았던 과일과 야채가 섞인 샐러드를 만들어 주었고, 모양이나 맛이 좋은 튀김도 반찬으로 올라왔다.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동네는 시골이었다. 논과 밭과 과수원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주축이었다. 우리 역시 논과 밭과 산이 있었다. 아버지는 경찰공무원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출퇴근을 했다.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가 아파서 아버지와 엄마가 두 분을 모시고 살았다. 아버지는 장남이 아니었다. 셋째였다. 고모가 있고, 큰아버지가 계셨지만 할아버지는 아버지와 뜻이 잘 맞았단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말하기 전에 행동하는 영리한 아이였기에 꾸중 없이 자랐지만 큰아버지는 약하고 기운이 없어서 늘 할아버지의 눈치에서 자유롭지 못하셨단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서로 잘 맞는 사람이 있고 늘 삐걱거리고 불협화음이 발생하는 이가 있기도 한다. 


 큰아버지는 독립을 하면서 멀리 가셨다. 아마 할아버지의 강한 기운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내 아버지도 그러하고, 두 명의 삼촌 역시 할아버지를 닮아 자기 고집이 강하고 에너지가 보통이 아니다. 아버지는 병약한 할아버지를 모시면서 삼촌들까지 책임져야 했기에 경찰공무원도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때의 아버지는 자신이 꾸리고 있는 가족 보다 두 동생이 먼저였다. 


 엄마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면서 삼촌들의 뒷바라지까지 했다. 할아버지는 무섭고 목소리가 크고 화를 잘 내는 분이셨지만 내 기억에 있는 할아버지는 늘 방에 누워 계셨다. 친구들과 마당에서 놀다 보면 소란스러울 때가 있다. 그럴 때 할아버지는 방문을 벌컥 열고 소리를 지르셨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모를 정도로 컸다. 할아버지의 고함소리에 친구들은 후다닥 도망가기 바빴다. 그러고 얼마 있으면 할머니와 엄마는 밭에서 돌아왔다.


 엄마가 젊고 멋진 건 자식 된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다. 그러나 친구의 말을 들은 이후 내 마음에 생긴 의심이 나를 힘들게 했다.

 ‘왜 엄마는 다른 엄마랑 다르지? 진짜 새엄마라서 그런가? 나는 그럼 어떻게 된 거지?’ 

 온갖 의문들이 생겼다.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까. 어떻게 확인해야 할까. 


 그렇게 고민의 시간이 지나다가 어느 날, 엄마랑 둘이 밭으로 가게 되었다. 지금은 어느 정도 돌려서 말할 수 있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돌려서 말하는 걸 하지 못했다. 한참을 뜸 들이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물었다. 


 “엄마, 엄마는 계모야?”


 내 질문에 엄마는 아마 엄청 놀랐을 것이다. 그 질문을 던지고 나는 울고 있었다. 그 말을 하는 내가 속상하고 미웠기 때문이다. 왜 그 순간에 눈물이 났는지 그건 나도 모른다. 엄마에게 물어 놓고 울고 있는 딸을 보는 엄마의 기분이 어땠을까. 엄마는 울고 있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그때 알았다. 친구들의 질투였음을.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부모님이 학교에 오시는 일들이 가끔 있었다. 학부모 상담일 때도 있었고 공납금을 내러 올 때도 있었다. 그럴 때 엄마는 고운 한복을 입고 오셨다. 나는 그런 엄마가 좋았다. 눈부시게 환한 모습이 좋았다. 엄마는 교무실에 얼마간 있다가 나를 보러 잠시 교실에 왔다가 가셨다. 


 나는 엄마와 죽이 잘 맞는 편이었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나 친구들 간의 일을 빠짐없이 말하고 의논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친구들(남학생)과 편지를 주고받을 때도 궁금해하는 엄마에게 보여 줄 정도였다. 편지를 본 엄마는 “얘는 편지를 잘 쓰기도 하지만 글씨가 어찌 이리 멋있니?” 하면서 칭찬을 했었다. 어떤 남자를 사귀고 걔가 어떤 점에서는 어떤지까지 시시콜콜하게 말하는 사이였다. 대학생이 되었을 때 어설픈 연애를 하면서 헤어질 때 제대로 된 작별인사 없이 잠수를 타면 엄마는 그러지 말라고 했었다. 그때는 뭘 잘 몰라서 어떤 식으로 이별해야 하는지를 몰랐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철이 없었다. 내 행동으로 인해 상처를 받았을 그들에게 미안하다. 


 오늘은 주저리주저리 엄마에 대한 기억을 토해내고 있다. 그게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엄마가 아프다. 회복이 느려지고 있다. 아픈 엄마는 원래 내 엄마가 아닌 것만 같다. 곁에서 엄마를 돌보고 있는 아버지 역시 힘들어하신다. 


 어느 순간부터 엄마는 여러 가지 병으로 골골했다. 아주 심각한 상태는 많지 않았다. 원래 그런 말이 있지 않는가. 골골하는 사람이 오히려 더 오래 산다고. 어쩌면 지금의 위기를 잘 이겨내고 힘을 낼 수도 있다.

 “아이고 그때 내가 와 그랬을까.” 할 수도 있다. 그러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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