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와이니 Apr 04. 2023

마음이 답답한 날 허브를 심다

페퍼민트, 스피아민트

그 날은 내 직장생활 20년을 통틀어 최악의 날이었다. 중요한 행사가 연달아 두 개 있었는데 첫번째 일부터 예상치 못한 큰 실수로 완전히 잘못되고 나니 두번째 일은 완전히 엉망진창 꼬여버리게 되었다.

모든 분노의 화살을 정면에서 받아야 하는 입장이 되어버린 나. 팀원의 어이없는 실수에 대한 원망에 앞서 미처 세심하게 챙겨보지 못하고 꼼꼼하게 확인하지 않았던 나 자신에 대한 화를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멘탈이 완전 나가버린 상황이었다.


그렇게 오전이 지나고 아이 학교 행사로 미리 반차를 냈었기에 곧바로 퇴근해버렸다. 사실은 학교 일은 둘째치고 1분 1초도 그 공간에서 더 머무르기 힘든 마음이었기에 도망치듯 서둘러 빠져나왔던 것 같다.


학교 행사는 생각보다 일찍 끝났고, 남은 오후 시간을 뭐하며 보낼까 하다가 답답한 마음에 고속도로라도 타야겠다 싶어서 차를 끌고 나왔다. 고속도로를 시원하게 달려 코스트코에 도착. 평일 오후라 꽤 여유로운 쇼핑이었지만 내가 도무지 쇼핑 할 기분이 아닌 상태라서 그랬는지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충 몇 가지 담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 허브들. 허브 6개 세트에 만원이 조금 넘는 착한 가격에 팔고 있었는데 어느새 나도 모르게 화분을 고르고 있었다. 종류가 겹치지 않게 하나씩 골고루. 그렇게 장바구니 두 개 중 하나에는 허브를 담아서 싣고 집으로 왔다.

집에 와서 바로 분갈이를 시작했다. 미리 계획했던 일이 아니었기에 화분도 준비되지 않았지만 겨울에 죽은 식물들을 정리하고 나니 딱 화분 6개가 나왔다. 흙도 미리 준비하지 않아서 이 화분 저 화분에서 조금씩 빌려서 허브 친구들한테 새 집을 마련해 주었다. 역시 머리가 복잡할 때는 몸이 일을 해야한다. 어느 덧 분갈이에 열중하다 보니 쿵쾅거리던 마음도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고 초록색 잎사귀들을 바라보다 보니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허브(Herb)는 풍미가 있거나 향이 나는 식물로, 음식의 맛을 내기 위해 조미료로 사용되거나 요리에 고명을 얻는 용도로 사용하고 차를 만들어 먹기도 한다. 허브 라는 이름은 라틴어 '허바(Herba)에서 유래되었는데 '푸른 풀' 이라는 뜻이다. 과거에는 주로 약초나 관상용으로 사용되었지만, 현재는 식용으로서의 가치 및 활용도도 높아지고 있다.


현재 세계적으로 약용과 식용으로 사용되는 허브류(향신료)는 약 140여 가지로 알려져 있다고 하는데 로즈마리, 애플민트, 바질 뿐 아니라 고수, 딜, 오레가노, 넛멕 등이 모두 허브라고 한다. 향신료로 더욱 익숙한 재료들이다. 나는 허브잎을 주로 요리할 때 장식으로 활용하는데 이번에는 다양한 종류를 장만했으니 차도 끓여 보고 요리에도 보다 다양하게 활용해 보고 싶다.

그렇게 완성된 허브 화분들. 일렬로 줄지워 세워놓으니 이렇게 뿌듯할 수가. 분갈이를 하며 찾는 마음의 안정이라니. 이 날의 이야기를 들은 지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며. 어떻게 술도 아니고 분갈이로 속풀이를 하냐며 신기하게 생각했지만, 물론 흙과 함께 속상한 마음도 차곡차곡 묻고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나가서 시원하게 맥주 한잔 마시고 들어왔다.

오늘 나에게 마음의 안정과 위로를 준 예쁜 초록이 새식구들. 시원한 향으로 기분을 산뜻하게 해주는 아이들. 따뜻한 봄 햇살 아래 파릇파릇 잘 자라 주기를.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과 관심을 듬뿍 주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