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장. 공터 (2/4) :: “집. 서른다섯 전에 못하면 못 사.”
:: 이렇게 얻은 아버지의 최초 자가... 내가 살던 한옥.
:: 이 개는 머리가 천재적으로 좋아서 동네 주민에겐 짖지 않았다.
:: 그리고 구름은 솟구쳐 여름날에 구름을 만든다.
아버지의 첫 번째 자가, 아름답게 낡아빠진 한옥집, 소격동 102-1번지는 번지수부터 좋았다. 소격동 전셋집 112번지도 그러했는데, 나는 이 씨였고, 모두 숫자 2가 들어 있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전화번호도 지역번호 02였고, 다음이 723-xxxx였다. 7 다음에 2였던 것이다. 이런 숫자의 구성들도 당시의 내 세계를 좀 더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다.
아버지는 원래 화장실 청소부였다. 대전 역전시장 공판장에서 화장실 청소를 하고 돈을 벌었다. 학력은 국민학교 중퇴였고 10대 후반부터는 검정고시 준비하면서 청소를 했다.
책상 하나를 계산대 삼고는 검정고시 책을 펴 읽고 돈을 받았다. 화장실 운영권은 할아버지가 갖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원래 공판장 노무자였는데, 거대한 쌀가마니가 쓰러지는 사고에, 공판장 측에서 배려 차원으로 운영권을 준 것이었다. 이때 일로, 조부모는 공판장 앞 노상 점포도 열 수 있었다. 공판장 쪽의 암묵적인 허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는 자전거 보관소 겸 수제비 장사를 한다.
다른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아버지가 다른 차원의 주경야독을 하던 어느 날, 시장에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 아닌가. 그 시장 사람들 중에는 나의 할머니와 외할머니도 있었고 나중에 아버지를 만난 엄마도 있겠다. 아무튼 거기서 장사하던 한 아주머니가 아버지를 기특하게 생각하고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중에 돈 벌면, 집 빨리 사.”
이 분은 나름 고학력자로 전문대를 나온, 당시 이른바 대학물먹은 배우신 분이었다. 그리고 아주머니는 이렇게 덧붙였다.
“집. 서른다섯 전에 못하면 못 사.”
“왜 그렇죠?”
“물가가 계속 오르잖어. 나중에는 못 사.” 아버지는 그 말을 마음에 담았다. 논리적으로 맞다고 생각했다기보다는 그냥 맞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30대 중반이 되자, 아버지는 서두르기 시작했다. 소격동 주변에 집이 하나 나온 것을 알고는 조금 무리를 했다. 사실 구리 우유보급소 시절, 아버진 철산동 아파트를 살까도 했었지만 도중에 그만두었다. “관리비가 무섭다”는 할머니와 엄마의 성화 때문이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아파트는 단독주택과 달리 관리비가 있다는 점은 말이다. 이후 이 아파트는 거칠게 대폭등 한다.
“에이! 그때 엄마랑 할머니가 그래 가지고!”
이 아파트 이야기가 나오면 아버지는 항상 엄마와 할머니에 대한 비난으로 끝맺음했다. 이후 아버지는 남자는 자기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더욱 강하게 한다. 내 생각엔, 그때도 이미 충분했던 것 같지만 말이다.
집을 샀다는 소식에 출석 교회에서는 우리에게 쌀가마를 갖다주기도 했다. 집을 사면 생활이 쪼들린다는 것을 사람들 모두가 두루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까지는 아니지 도로 갖다 드려. 교회 부목사님은 아버지와 같은 대전 한남대 동문이었다. 눈치챘겠지만, 검정고시 후에 아버지는 대학에 진학한다. 결혼도 하고 애도 둔 다음, 이십 대 중반에 진학한 대학이었다.
물가는 계속 오른다라, 그분, 예언자 아닌가. 그건 맞는 말이다. 하지만 반전이 있는 것이, 우리 집 집값은 전혀 오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버지가 매수한 이후부터 아버지가 되팔 때까지 우리 집값은 조금의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사실 미동은 했을 것이다.) 동네가 고도제한에 걸려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일산, 분당 등 이른바 노태우 “200만 호 공급” 때문이기도 했다. 참고로 둔산도 이때의 공급물량이다.
이렇게 얻은 아버지의 최초 자가, 아름다운 우리 집. 내가 살던 한옥은 남쪽으로 열려있는 “ㄷ”자 모양이었다.
우리는 일단 별채로 이사해 들어갔다. 오른편 안채는 이전 세입자가 세를 살고 있었다. 동네 석유 할아버지였는데, 함께 사는 가족은 따로 없었고, 두툼한 손에는 잘고 거친 주름이 빼곡하였다. 얼굴은 구릿빛에 굵고 힘찬 주름이 최대한 깊게 새겨져 있었는데, 두꺼운 뿔테안경도 쓰고 있어 어딘지 점잖은 느낌을 주었다. 실제로도 별로 말이 없으셨다. 나중에는 우리 집을 떠나 팔판동 쪽으로 이사하신다.
가끔 팔판동 쪽 삼청동 길에서 할아버지를 뵐 때가 있었다. 묵직한 검정 자전거로 석유를 나르고 계시는 할아버지. 가변에서 조용히 자전거를 몰던 할아버지는, 자전거가 힘이 부치면, 동면을 뚫고 나온 반달곰처럼 조용히 가슴을 내밀고 안장에서 일어서 페달을 밀었다. 그럼 은행나무 가로수를 따라 자전거가 나아가는 것이다. 자전거가 나아가는 것이다. 여기에 어떤 미학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따로 인사를 하지는 않았다. 귀가 어두우셨기 때문이었다. 안채 할아버지 쪽 TV 볼륨은 거의 항상 최고였었다.
우리 한옥집은 좌우 모두 다 2층 양옥에 면해 있었다. 그래서 외부에 노출되는 우리 집은 놀랍게도 대문뿐이었다. 한마디로 바깥 창문이 없던 집이었지만, 집 앞에는 그래도 공터가 있었다.
이 공터는 3거리의 로터리처럼 생겼었는데, 우리 집 쪽으로 길이 났으면 4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공터의 크기는 주차를 3대 정도를 할 수 있을 정도였고, 주변 2층 담장도 높다란 해서, 아이들은 미니 농구에 주먹 야구나 제기차기, 배드민턴에 축구까지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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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휴일 날 늦잠을 자면, 공터 쪽에서 “개나 고양이- 삽니다! 개나 고양이~ 사요!” 하고 확성기 소리가 들렸다. 무얼까. 고저장단에 귀에 쏙쏙 박히게 하는 목소리의 힘은 말이다. 이 개장수 아저씨를 직접 본 적은 없었다. 마주쳐 본 적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쳐진 귀의 개들이 트럭 위에 갇혀 있는 모습, 그 이미지는 아무래도 조금 슬프게 느껴진다. ‘고양이들은 대체 어떻게 될까’ 하고 궁금했던 적은 있다. 개는 조금 집히는 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아저씨가 등장하면 동네 개들은 어쩐지 좀 조용해진다는 점이다. 순전히 내 기분 탓일까. 동네에는 개가 많았다. 개가 그냥 목줄도 없이 골목을 돌아다니고 전봇대에 쉬를 하고 똥을 싼다. 겨울에도 똥을 싸서 눈이 오면 그 개똥 주위는 그 온도 때문에 따로 구별되어 녹아 있곤 했다. 길 옆에서 행인을 향해 짖고, 주민을 향해 짖고, 나를 향해 짖어대기도 하던 개들. 그런데 그런 개들이 이제 이 개장수에겐 꼼짝 못 하는 거 아닌가. 강약약강, 나에게만은 아주 헐크 호간인 것이다. 이거 차별 아닌가?
나는 개를 무서워하는 편이었지만, 그리고 또 동네 개들이 전부다 별로였지만 호감이 가는 개가 아주 없던 것은 아니었다.
동네에는 메리라는 개가 있었다. 이 개는 머리가 천재적으로 좋아서 동네 주민에겐 짖지를 않았다. 동네 주민인지를 알았던 것이다. 때문에 내가 골목을 지나다녀도 따로 짖거나 하지 않았다. 다른 멍청한 개들은, 대문 안 마당 쪽에서 나를 향해 짖는 것이지만, 이 개는 맑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꼬리만 흔든다.
어른들이 내게 이런 말을 해주기는 했다. 개들은 “눈싸움을 해 이기면 된다”고 말이다. 호오, 혹하겠다. 해서 나는 다른 동네 멍청한 개들을 향해 눈싸움을 걸곤 했다. “개를 오래 쳐다보면 개가 쫄아서 짖지 않는다니까.” 하지만 철제 대문 속 개들을 쳐다봐도 개들은 항상 짖었다. 눈싸움이라. 어른들 말이 맞는 것이었을까? 내 안경 때문이었을까.
기무사 쪽 구멍가게 아저씨가 이 개, 메리의 주인이었다. 가게는 건포도와 꽁치/번데기 같은 통조림만 팔았는데 그마저도 흰 먼지가 수북했다. 거의 폐업 중이나 마찬가지였다. 가게 문 미닫이를 열고 들어가면 평대 상품 위에는 마치 화산재처럼 먼지가 쌓여있었다. 실제로 팔리고 있던 것은 30개 계란 한 판, 몇 층씩 쌓여있단 계란뿐이었다.
아저씨는 항상 옆 골목에서 오토바이를 고치고 있었다. 항상, 볼 때마다 항상 말이다. 오토바이는 운행되는 날보다 고치는 날이 훨씬 많았는데, 오토바이 모양은 특이해서 유난히 작고 빛바랜 흰/녹색이었다.
아저씨는 자녀가 여럿으로 그중에는 보이시한 소녀도 있었다. 나중에는 핸드볼 선수가 되는데, 나는 실수를 할 뻔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전혀 시비 걸지 않았다. 남자였으면 “야 임마” 하고 뭐라고 말도 걸었겠지만, 여자였기 때문에 전혀 말을 걸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오토바이 앞 바닥에 메리를 태우고, 아저씨는 동네를 돌아다녔다. 저속의 오토바이였다. 자녀도 뒤에 태우곤 했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항상 이 장면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똑똑한 개와 오래되고 조그마한 오토바이, 그리고 아버지와 아이의 모습, 그 이미지 말이다.
메리는 어미 개로 암컷이었고 노견이었다. 털이 길었고 야트막한 느낌을 주었다. 주인이 자주 씻기지는 않았지만, 여름날 목욕을 하면 메리는 탬버린처럼 몸을 흔들었다. 물기를 털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자탈춤처럼 덩실덩실, 또 동실동실 털을 들며 걸었다.
골목에는 기와지붕의 그림자가 떨어져 있었다. 그 그림자와 빛 사이를 메리는 조용조용 걸어 다녔다. 개는 나를 보면 꼬리를 흔들었다. ‘먹을 게 있나요’ 하는 느낌보다는 반갑다는 느낌이었다. 좀 더 정확히는, 반갑다는 느낌보다는 ‘너도 거기 있는가’ 하는 느낌이었다. 내가 가끔 먹이를 주면 메리는 먹이를 물고 그늘로 들어가 배를 깔았다. 그러고는 어금니 끝이 보이게 먹이를 씹어 보였다.
개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우리 집은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보면, ‘먹지 말아야 한다’라는 당위에는 어떤 여유가 전제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런 여유는 없었다. 우리 집은 그저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돼지고기도 먹지 않았다. 각각의 이유는 달랐다.
“우리 조상이 개라고요?”
“탈이 나서 그랬겠지, 절대 먹지 말라고.”
아버지의 말이다. 증조할머니가 해준 말이었겠다. 하지만 아버지라고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그냥 옛날 고리짝 허튼 이야기다’ 하고 생각한 아버지는 어떤 기회에 개고기를 몇 점 주어 먹는다. ‘조상이 개라는 게 말이 되는가.’ 하지만 개고기를 먹은 그날 아버지는 심하게 탈이 났다. 몇 점 먹는데, 바로 열이 오르고 입술이 심하게 빨개진 것이다. 너무 영양이 풍부하고 흡수가 너무 잘 되는 통에 간에서 열기운이 뻗혔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탈일 뿐이었다.
“돼지고기를 먹었는데, 입이 돌아가요?”
“입이 뭐야, 넌 유복자 될 뻔했어.”
돼지고기는 그 정도가 아니었다. 면서기로 있던 어느 날, 동네 잔칫집에서 다녀온 아버지는 으슬으슬, 엄청난 한기를 느꼈다. 그리고 곧장 물리적으로 입이 돌아가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할 수는 있었는데, “감사합니다”를 “가암사아하압니이다아”로 말했다. 새우젓도 찍어 먹지 않고 ‘이날 포식이다’ 하고 돼지고기를 왁왁 먹은 탓이었다.
소식을 들은 할머니는 보따리를 이고 부여로 향한다. 대문을 열던 할머니는 아버지를 보고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여~!” 하고는 일단 엄마를 비난한다. 여자를 잘 못 들여 내 아들이 병이 났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얼굴이 새빨게지도록 근처 화장실을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 화장실이 집과 너무 가까워 병이 났다는 것이다. 이후 아버지는 대전으로 나와 병원에 입원을 하지만, 병원도 별 수 없었다. 겨우 외할머니가 추천해 준 한의원에서 약 한 첩을 먹고 - “이게 들지 않으면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 비로소 차도를 보인다. 이때 엄마 배에는 내가 들어 있었다.
아버지의 이 경험 때문에 우리 집은 돼지고기도 먹지 않았다. 냉장고에도 들이지 않았다. “에이- 그래도 다른 사람은 괜찮잖아?” 할 수도 있겠지만 설마 하다가 음식이 섞이기라도 하면 어쩌겠는가.
“한단에 1000원, 한단에 1000원.”
집 앞 공터로 파에 양파에 야채장수의 확성기 트럭이 올 때가 있었다. 트럭 옆을 지날 때면, 정겨운 야채 냄새가 난다. “계란이~ 왔어요, 계란이~ 왔습니다” 하고 루핑을 두른 트럭 계란 차가 올 때도 있었다. 나와 동생은 늦잠을 자고 있겠다. 딸랑딸랑 종소리와 함께 두부 트럭이 올 때도 있었다. 동네의 아이들은 낮잠을 자고 있겠다. 이 모든 것을 띄워놓고 조용히 뒤돌아 보면, 늦잠이나 낮잠을 곁드린 확성기 소리는 어딘지 아득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이 공터에서는 가끔 중고등학교 형들이 담배를 피우기도 했었다.
“야 이 새끼들아!” 그럼 우리 저기 맞은편 감나무 아저씨가 소리를 질렀다. 이 아저씨는 실제 현역 학교 교사였기 때문에, 날라리 형들은 개장수 앞의 개처럼 자동반사적으로 겸손해졌다. 담배를 잽싸게 비벼 끄고는 두 손을 모으는 것이다. 글쎄, 멋부린 머리와 덜렁 걸친 교복에, 가지런히 두 손을 모으고 나란히 줄을 서서 꾸중을 듣고 있는 모습은 어딘지 묘하게 어울리는 것 같다.
맞은편 아저씨는 학생들을 싫어했다. ‘학생이 담배를 피워? 그것도 내 이 공터에서? 내 집 앞에서?!’ 여럿이 몰려다니는 것부터가 이미 아저씨의 중심부를 건드렸다. 거기에는 견고하게 자리 잡은 혐오가 깔려 있었다. 진심을 담아 고이고이 장시간 우려낸 인간 일반에 대한 혐오였다. 굳이 담배나 불량 청소년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이때문에 학생들 특히 날라리 남학생들은, 맞아 마땅하고 미움받아 마땅하고, 귓방맹이에 반쯤 패 죽여도 마땅한 존재가 된다.
각종 트럭 아저씨들은 우리 집 공터 쪽에 차를 대고 주문을 외웠다. 확성기에서는 “누가 왔다”, “이게 얼마다” 하고 노랫가락이 흘러나와 동네를 감싸고 하늘에 퍼진다.
새벽이 지나고, 비가 그치고,
해가 떠서 파란색 하늘에서는 구름이 굴러다닌다.
여름날이고, 어린이는 늦잠을 자고,
확성기 트럭은 동네의 공터에 공터를 돌아다닌다.
그리고 구름은 솟구쳐 여름날의 구름성을 만든다.
내 생각엔, 맑은 날의 확성기 트럭 소리는
확실히 무언가를 고양시키는 것 같다.
공터에서 나는 소리는,
또 그 풍취는,
흥정, 그 깎고 팔고 사고 봉지에 담고,
해서 되는 소리 없는 소리, 그 수선스러움은,
당시 우리 세계의 하늘과 구름과 조율되어 있었다.
낭창낭창 확성기 소리는,
또 한옥 처마를 밟고, 양옥 옥상을 타고,
기와와 골목과 찬거리 봉지와
저기 건너건너 손끝 손끝 걸음걸음은,
당시 우리 동네의 대문과 마당과 조율되어 있었다.
(제3장 2부 끝. 3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