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를 하기 시작한 지 14년이 되었다.
사진을 공부하고 세상을 렌즈를 통해 보기 시작한 지도 14년이 되었다.
이 모두가 14년 전 호주 유학생활 중 시작되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아니, 달라졌다기보다 넓어졌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음식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서울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외국음식은 미국에서 건너온 햄버거와 피자, 패밀리 레스토랑의 화히타, 파스타 정도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매우 한국화 된 반만 외국음식이었다. 제대로 된, 나름 ‘정통’ 외국음식을 맛볼 수 있었던 곳들도 있었지만, 이들은 관심을 가지고 보물찾기 하듯 열심히 찾아야 할 만큼 손에 꼽았다.
호주로 떠나기 전까지 서울에서 먹어본 외국음식 중 가장 이국적인 것을 꼽는다면, 인스타그램이나 트립어드바이저를 모르던 그 시절,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경로를 통해 열심히 검색한 끝에 찾아냈던 치즈 퐁듀였다. 내 몸이 유제품을 싫어한다는 것도 모른 채 맛있게 많이 먹고 심하게 탈이 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정도의 경험을 가진 채 호주에서 만난 음식 세계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심지어 시드니나 멜버른도 아닌 저 멀리 태즈메니아에서 말이다.
당시 그곳에선, 생전 처음 들어본 ‘레바논’이라는 나라의 음식점이 인기 상승 중이었고, 내가 알던 전형적인 ‘서양 음식’이 아닌 것 같은 ‘후무스’, ‘짜지키’ 같은 이국적인 음식들을 현지 슈퍼마켓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호주인들 사이에서는 이미 현지 음식이 되어버린 이탈리아의 피자와 파스타를 넘어 다른 유럽국들의 음식이 유행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말 새벽 한두 시가량이 되면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다 ‘기로스’를 사러 오는 젊은이들로 그리스식 패스트푸드점들이 붐비기 시작하고, 친구들과 함께 집에서 술판을 벌일 때면 나초칩과 함께 후무스와 짜지키 같은 다양한 ‘Dip’들이 등장한다.
나의 음식 세계가 넓어지면서 자연스레 따라온 것은 요리에 대한 관심이었다.
호주에서 처음으로 머물게 되었던 집에 도착했던 날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의 집에서 한동안 하숙을 했는데, 첫날 집 구경을 하던 중 커다란 오븐이 붙어있는 주방을 보고 첫눈에 사랑에 빠져버렸다.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은, ‘빵을 직접 만들 수 있겠구나!’였다.
요리를 하기 시작하니, 자연스레 각종 요리책들이 눈에 들기 시작했다. 수업이 끝나면 학교 도서관으로 직행했는데, 주로 요리책 코너에서 시간을 보냈다. 집에 오면 음식 관련 TV 프로그램을 틀어두고 요리를 했다. 이때 ‘마스터셰프’라는 프로그램을 처음 접했고, 영국 셰프 제이미 올리버와 고든 램지를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내 생애 처음으로 구입했던 요리책은 제이미의 책도, 고든의 책도 아니다. 시드니의 아침식사 카페로 알려지기 시작한 호주 셰프 빌 그레인저의 요리책이다. 빌 그레인저는 당시 점점 세련되어지던 호주의 음식문화를 선구했던 셰프로, 현재 여러 국가에 카페를 보유하고 있다. 그의 요리책을 하나 구입해 매일 다른 요리를 하나씩 시도하다 보니, 욕심이 생겨 그의 다른 책도 하나씩 사들이게 되었고, 결국 엄청나게 두껍고 무거운 네 권의 빌 그레인저 요리책은 호주를 거쳐 한국, 프랑스, 영국까지 나와 함께 이동했다.
음식과 요리에 푹 빠져 지낸 지난 14년을 돌아보니, 내 경험치에 따라 요리를 하는 이유가 달라진 것이 보인다.
처음에는 신세계에 빠져 모든 것이 신기해 닥치는 대로 다 건드렸다. 국적에 상관없이 요리책을 보고 맛있어 보이는 모든 요리를 시도했다.
그러다 당시 공부 중이었던 사진을 적용하니, 요리책에 나오는 것과 같은 이미지를 건지기 위해 푸드스타일링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나는 요리에 있어 미각보다 시각에 더 중점을 두었고, “음식은 눈으로 먼저 먹는 거야”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그렇게 요리를 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자연스레 내 요리인생의 일부가 된 것이 있다면, 내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어줄 사람이 없으면 이 모든 게 무의미하다는 것이었다. 침샘을 자극하는 비주얼의 엄청 맛있는 음식을 해놓고 이것을 혼자 먹어야 한다고 생각해보라. 과연 이 음식이 맛있을까. 내가 무슨 음식평론가도 아니고. 요리책을 내려고 멋져 보이는 요리에 돈과 시간을 쓰는 것도 아닌데.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역시 음식도 사람이 중심이다. 모든 음식과 요리와 식사에 이야기가 있는 이유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고, 여느 요리와 식사 시간이 아름답게 혹은 나쁘게 기억되는 이유 또한 이 음식을 둘러싼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과의 관계에 따른다.
그런 이유로, 나의 지난 14년 요리인생 중 가장 풍족하고 요리가 즐거웠던 때는 프랑스에서 살던 때이다.
잘 알려져 있듯 프랑스 사람들에게 요리와 음식은 인생에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따라서 가족과 친구를 집으로 초대해 멀티 코스 점심식사를 해 먹는데 하루의 반을 보내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다.
프랑스에서 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어느 일요일 점심 친구네 부모님 집으로 초대를 받았다. 초대 시간인 낮 12시에 맞춰 도착하니, 커다란 체리나무가 한가운데 우뚝 자리한 정원으로 안내를 받았다. 식사 전에 정원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 아페리티프(Apéritif)를 한단다. 말 그대로 옮기자면 ‘식전주’인데, 초대받은 손님들이 모두 도착하길 기다리는 동안 먼저 도착한 손님들과 담소를 나누는 시간이자, 독주를 조금 마시면서 입맛을 돋워주는 시간이기도 하고, 동시에 요리를 하는 집주인에게 식사 준비를 마무리할 기회를 주는 시간이기도 하다. 또한 잘 모르는 사람끼리 대화를 나누면서 식사 전 친분을 쌓기도 한다.
이렇게 한 시간 가량 아페리티프 시간을 보낸 후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 식사를 시작했다. 전채요리와 본요리, 치즈와 샐러드, 디저트, 커피까지 모두 끝내고 나니, 저녁 6시가 되었다. 저녁 먹을 시간이다.
아무리 멀티 코스라지만 점심 먹는데 6시간을 보내다니.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대화’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밥 먹을 때 대화를 하지 않고 우선 열심히 그리고 빨리 먹은 후 커피를 마시면서 대화를 하지만, 프랑스 사람들은 식전주부터 커피까지 모든 과정에 대화가 없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대화가 없는 상태가 몇 초간 지속되면 분위기가 차가운 것으로 여겨져 모두가 불안해하기 때문에, 누구든 말을 하고 대화가 지속된다. 이걸 보면, 사실 프랑스 사람들에게 음식은 삶의 중심이라기보다, 사람 간의 관계를 원활하게 지속하기 위한 수단이다.
내 지난 14년을 풍족하게 해 준 음식과 요리는, 사람이 더해지면서 나날이 더욱 맛깔스러워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