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우연한 계기로 알게 된 영국인 동료가 있다. 어디서 왔냐고 묻길래 한국인이라고 했더니 대뜸 김치 얘기를 꺼낸다. 최근 들어 미국과 영국에서 김치가 인기 상승 중이라 그러려니 했는데, 이어지는 얘기에 입이 떡 벌어졌다. 이 친구는 직접 김치를 만들어 먹는단다. 한국에 가봤냐고 물었더니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단다. 그런데 어떻게 김치를 만들기까지 할 정도가 되었냐고 물었더니, 원래 건강식에 관심이 많은데, 우연히 갔던 한국음식점에서 김치를 처음 먹어 보고는 사랑에 빠져서, 김치 레시피를 구글로 검색해 제대로 발효까지 해서 먹는단다.
십여 년 전만 해도 한국 바깥에 사는 전 세계인 중 한국 출신이나 일본 출신을 제외하고는 김치가 뭔지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여기에서 이 얘기를 하지 않고 지나갈 수가 없다. 김치더러 썩은 야채라며 나에게 모욕감을 흠뻑 안겨 주었던 하우스메이트 매튜 얘기다.
호주 유학 중 현지 학생 매튜와 방 두 개짜리 집에서 함께 생활했는데, 이런 경우 침실만 따로 쓰고 다른 공간은 모두 함께 사용한다. 따라서 하나 있는 냉장고도 함께 사용한다.
당시 나는 막 요리에 빠져들고 있을 때였고 김치 또한 직접 만들어 먹었다. 실온에서 발효 후 냉장고에 넣어두고 오래 먹는 김치. 오래 둘수록 시어져 더 맛있어지는 김치. 냉장고를 열 때마다 더욱 시어져 가는 김치 냄새에 행복해하던 어느 날, 매튜가 심각한 목소리로 “냉장고에 상한 음식이 있는 것 같지 않아?”라고 물었다. 매튜는 냉장고 전체에 퍼져 있는 김치 냄새를 두고 나름 돌려 말하느라 이렇게 얘기한 것이었을 텐데, 당시 나는 숨겨진 뜻을 읽지 못하고 순진무구하게 “아니, 난 모르겠는데?”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매튜가 안 되겠는지 정색하며 직접적으로 말하기를, 저 냄새나는 썩은 야채가 냉장고 안 모든 음식에 영향을 주고 있으니 당장 꺼내서 버리란다. 김치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저런 무식한 발언으로 감히 내 김치에 모욕감을 준 매튜에게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나와, 이미 썩은 야채 냄새로 기분이 상해 있던 매튜는 그 날 저녁 몇 시간 동안 언쟁을 벌였다. 매튜는 김치가 어떤 과정에 의해 치즈처럼 발효가 되는 건지, 단지 썩는 것이 아니라 유산균에 의해 제대로 발효가 되는 과정을 화학적으로 이해를 해야 김치를 인정하고 냉장고에 두도록 동의하겠단다. 당시 나는 김치의 발효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지 못했고, 김치의 발효에 대한 내용이 영어로 쓰인 것을 찾을 수가 없어 설득하기를 포기했다. 그때의 억울한 심정이란.
현재로 돌아와, 비한국인에게 김치는 이제 더 이상 생소한 썩은 야채가 아니다. 한국인이 굳이 나서서 설명해 주지 않아도, 이미 다수의 매체를 통해 섹시하고 트렌디한 건강식으로 잘 알려져 있다. 언제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영화배우 휴 잭맨이 어느 요리 프로에 나와 한국의 김치를 아주 좋아한다며 김치 핫도그를 만든 적이 있는데, 어쩌면 휴 잭맨 덕분에 김치가 미국인들 사이에서 더 빨리 알려졌는지도. 이제 영미계에서는 김치를 모르면 촌스러운 사람으로 여겨질 정도가 되었다.
김치 얘기가 나왔으니 한국음식 얘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인의 자랑스러운 김치는 이제 세계적으로 어느 정도 알려졌는데, 그렇다면 한국음식은 어떨까?
현재 직장에서 다양한 국적 출신의 동료들과 음식 얘기를 하다 보면 그들에게 있어 한국음식은 Korean BBQ이다.
미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중국음식 먹을까?”라고 묻는 장면이 나오면, 으레 다음 장면은 서투른 젓가락질로 종이 박스에 담긴 볶음면을 먹는 (혹은 먹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씬이 등장한다. 그들에게 있어 ‘중국음식’은 원하는 고기와 야채를 넣은 볶음면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 “한국음식 먹을까?”라는 말은, 상 위에서 굽는 고기구이를 먹으러 가자는 뜻이다.
이렇게 ‘한국음식’을 먹으러 가게 되면, 고기를 굽고 먹으면서 자연스레 한국음식에 대한 얘기를 하게 되는데, 나는 이 때다 하고 한국음식의 종류가 얼마나 다양한지에 대한 열변을 토한다.
아무 기교 없이 그저 불 위에 구워 상추에 싸 먹는 고기구이도 물론 훌륭하지만, 없던 시절 배를 채우려다 발견하게 된 수많은 채소음식, 몸의 면역력을 기르고 병을 치료하는데 쓰이다 음식이 된 뿌리음식, 혐오스러워 부자들은 먹지 않던 부위로 만들어진 음식 등, 셀 수도 없이 많은 요리들이 한국음식을 구성하고 있다는 얘기를 하느라, 한입 가득 넣고 먹어야 하는 상추쌈을 제대로 먹지 못할 때가 많다.
십여 년 이상 직업과 관심사를 통해 다양한 국적의 음식을 접하고 깨달은 바가 있다면, 한국음식은 전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건강한 음식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한국음식이라 함은, 밥, 국, 반찬을 기본으로 한 전통식을 뜻한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여행을 해본 적이 있는 외국인들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음식이 뭐냐고 물으면, 대다수는 ‘반찬’이라고 얘기한다.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가짓수는 물론, 무료로 무한정 제공되며, 심지어 맛도 있고, 원치 않은 반찬은 먹지 않아도 되며, 그들의 문화에선 전혀 볼 수 없는 이국적인 모양새까지.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시각, 청각, 미각, 후각을 만족시키고 게다가 건강하기까지 한 한국 밥상이 전 세계에 ‘한국음식’으로 제대로 알려지는 날이 얼른 오길 바란다.
그때까지 나는, 열심히 요리해 인스타에 올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