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텔카스텐으로 본 목적과 삶의 응집성
제가 목적이라는 키워드로 책을 쓰고있는데요. 하나는 이원론의 관점에서 풀어낸 책이고, 다른 하나는 다원론의 관점에서 풀어낸 책입니다. 다원론의 관점은 형이상학을, 이원론의 관점은 형이하학을 기준으로 작성해봤습니다. 마지막 실천적 접근은 이런 지식들을 활용하여 실생활에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에 관해 적어보려고 준비중에 있습니다. 출간은 시리즈가 완성되고 충분히 퇴고 한 이후에 고민해 볼 생각입니다.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작동하지 않는 세컨드 브레인』을 쓰면서 촉발됐습니다. 6장에 철학이야기를 꺼냈는데, 가장 중요한 내용인데, 아무리 가공해도 쉽게 전달하기가 어렵고 오히려 그 의미가 온전히 전달되지 않아, 정보를 넓게 전달하는데 실패했다는 판단이 들어서입니다. 목적이라는 키워드에 담긴 맥락이 방대하기 때문이라는걸 알게되고, 차라리 더 확장시켜서 써봐야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책 한권에 담아내려고 했는데, 한권의 초안을 작성하니 담아내지 못한 시선들이 생겨 두권이 되고, 두권이 세권짜리 시리즈로 기획되더군요.
어쨋든, 한 커뮤니티에 목적의 중요성을 다루게 되었는데, 일원론이 이원론으로 흐르는 채팅이 보여, 다원론에 대한 사유로 확장하기 좋은 시점이라 판단해서 이런 글을 채팅에 올렸습니다.
목적은 경계를 중심으로 생성된다.
가장 작은 경계의 목적성은 즉흥적이다.
목적은 중력처럼 운동하는자의 방향성을 인접성에 따라
때로는 미세하게 때로는 강력하게 조정해나간다.
세상은 수많은 경계들의 집합이고,
목적은 경계의 수만큼 생성되므로, 모든 목적은 복합적이고 중첩되어있다.
가장 작은 경계부터 가장 넓은 경계의 목적성이 가리키는 방향성이
서로 엇갈리면 갈등과 정치 분쟁이 발생하고,
목적성의 정렬될 때 시너지와 협업이 발생한다.
그럴싸한 단어조합으로 자기중심적인 글
이라는 무례한 평가가 날라왔어요. 네 이해됩니다. 철학적 사유가 그렇게 시작될 때가 있습니다. 이 평가를 받은 이 문장들은, 사실 제가 오랫동안 숙고해온 두 권의 책 초안의 핵심 논리를 압축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처음 접하는 이에게는 마치 AI의 할루시네이션처럼 낯설고 모호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점, 충분히 이해합니다. 얼마전에 제가 올렸던 인공지능의 학습방법과 할루시네이션에 관한 글 패턴, 인식, 창조의 재발견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있었어요. AI의 할루시는 욕하지만 어린아이의 할루시는 풍부한 상상력이라고 칭찬한다고요. 철학적 추상성과 학습의 패턴도 확장 할 얘기가 잔뜩 있지만 다음에 기회가 되면 적어보겠습니다.
아이의 창의성에는 칭찬하면서 철학적 사유를 보면 혐오가 나타나는 분들이 종종 있죠. 철학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어려운 말이 보이면 있어보인다고, 있어보이기 위해 그렇게 글을 쓴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럴때 딱 맞는 표현이 있죠. 오해와 편견.
오늘은 이 그럴싸한 조합의 글이 어디까지 도달하는지에 관해, 철학적 사유의 힘에 대해 "제텔카스텐으로 보는 삶이 어떻게 엮여나가는지"을 보여드리고자 글을 적어봅니다. 끝까지 따라 나가신다면, 메모가 모여 글이 되는 것 처럼, 우리의 삶의 조각들이 어떤 원리로 시스템을 만들 수 있는지, 어떻게 프로세스를 창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철학적 단초를 얻으실 수 있을겁니다.
혹시 '멍 때리기'가 취미이신 분 계신가요? 가끔은 아무 목적 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도 좋지만, 신기하게도 우리는 결국 다시 "자, 이제 뭘 좀 해볼까?" 하며 무언가를 향해 일어서곤 합니다. 대체 왜 그럴까요? 왜 인간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원하고,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려는 존재일까요? 오늘 이야기는 바로 이 '목적'이라는, 우리 삶의 보이지 않는 동력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합니다.
인간이 목적을 추구하는 이유는 다양하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 매슬로우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와 안전의 욕구를 넘어 소속감과 애정, 존중의 욕구를 느끼고, 궁극적으로는 자아실현을 향해 나아가려는 경향성을 지닙니다. 단순히 생존하는 것을 넘어, 성장하고 발전하며 자신의 잠재력을 펼치려는 이 근원적인 욕구가 바로 모든 목적의 시작점일지도 모릅니다. 즉, 어떤 형태로든 '더 나은 상태', '의미 있는 상태'를 추구하려는 단일한(일원론적인) 내적 동기가 우리 안에 꿈틀대고 있는 것이죠.
조직행동론의 여러 이론들도 이러한 목적의 힘을 뒷받침합니다. 로크의 '목표 설정 이론'에 따르면, 막연한 바람보다는 구체적이고 도전적인 목표가 있을 때 우리는 더욱 강력한 동기를 부여받고 높은 성과를 낼 수 있다고 합니다. 또 브룸의 '기대 이론'은 우리의 노력이 성과로 이어지고(기대감), 그 성과가 원하는 보상으로 연결될 것이라는(수단성) 믿음, 그리고 그 보상이 얼마나 매력적인가(유의성)에 따라 행동의 방향과 강도가 결정된다고 설명합니다. 스스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믿음, 즉 반두라가 말한 '자기 효능감' 역시 실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이 모든 이론들은 결국 인간이 어떤 목적을 설정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려는 강력한 경향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목적'의 힘, 특히 ‘간절한 바람’의 힘을 극단적으로 강조했던 흐름은 곳곳에 있습니다. 배우 짐 캐리 다들 아시죠? 마스크나 에이스벤츄라는 정말 명작이었는데.. 그는 무명 시절, 자신의 성공을 간절히 바라며 1,000만 달러를 받는 배우가 되겠다는 내용의 수표를 직접 발행해서 항상 지갑에 넣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는 그 수표를 보면서 자신의 꿈을 시각화하고 끊임없이 동기 부여를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또 10여 년 전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시크릿'과 같은 자기계발론이 있었습니다.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는 매혹적인 메시지는, 강력한 의도와 목적성만 있다면 원하는 모든 것을 현실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수많은 사람에게 심어주었습니다. 이는 어찌 보면 "강렬한 단일 목적(의도)이 현실을 창조한다"는, 모든 것을 '나'의 의지로 귀결시키려는 단순하면서도 매력적인 일원론적 세계관의 한 단면이었습니다. 그 당시 많은 이들이 이 메시지에 열광했던 이유는 아마도 복잡한 세상사에 대한 명쾌한 해답처럼 보였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그 뜨거웠던 '시크릿'의 환상에서 조금씩 깨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강렬하게 원하고 생생하게 상상하는 것만으로는 모든 것이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냉정한 현실의 벽을 마주하게 된 것이죠. "나 자신이 살기를 희망하는" 그 일차원적이고 어쩌면 이기적일 수 있는 바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삶의 복잡다단함 속에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단순한 일원론의 세계를 넘어 새로운 관점의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단순히 '원하는 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의지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현실의 조건', '타인의 존재', '나의 구체적인 노력',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외부 환경의 영향' 등, 나와 분리된 또 다른 요소들이 있음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와 '나 아닌 것', '나의 바람'과 '세상의 이치', '이상'과 '현실'이라는 이원론적 구도가 우리 앞에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나'의 의도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현실의 복잡성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목적을 설정하고 추구해나가야 할까요? 단순한 바람을 넘어, 현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목적을 다듬고 실현해나가는 지혜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다음 장에서는 이러한 이원론적 관점에서 목적을 어떻게 바라보고 다룰 수 있는지 더 깊이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혹시 '머릿속 계획은 완벽했는데!'라며 좌절한 경험, 있으신가요? 그게 바로 우리의 이상과 냉정한 현실의 첫 데이트(?)가 삐걱거린 순간일지도 모릅니다. 섹션 1에서 우리는 '시크릿'과 같은 단순한 바람만으로는 현실의 벽을 넘기 어렵다는 것을 이야기하며, '나'와 '나 아닌 것'이라는 이원론적 구도가 등장함을 확인했습니다. 이번 섹션에서는 이처럼 두 가지 상반된 요소 사이에서 목적을 어떻게 조율하고 나아갈 수 있는지, 그 이원론적 풍경을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가장 먼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조직이나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을 살펴보면 이 이원론적 고민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과거 많은 기업들은 '워터폴(Waterfall)' 방식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마치 폭포수처럼 위에서 아래로, 한 단계가 완벽히 끝나야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방식이죠. 이는 장기적이고 거대한 청사진(숲)을 먼저 그리고, 그에 따라 세부 계획을 순차적으로 실행하는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모든 것을 예측하고 통제하려는 접근 방식은, 요즘처럼 변화가 빠르고 불확실성이 높은 시대에는 종종 큰 실패의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한번 방향을 잘못 잡으면 되돌리기 어렵고, 막대한 자원과 시간을 낭비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최근(?)에는 '애자일(Agile)' 방식이나 '린 스타트업(Lean Startup)' 기법이 훨씬 더 교과서처럼 활용됩니다. 이 방식들은 일단 작게 시작해서(나무), 시장의 반응을 빠르게 살피고, 그 피드백을 통해 계속해서 방향을 수정해나갑니다. 당장의 현장성과 과정 속에서의 학습을 중시하며, 큰 실패를 막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죠. 이는 마치 '원대한 목표(숲)'와 '지금 당장의 현실(나무)'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끊임없이 저울질하며 최적의 균형점을 찾아가려는 노력과 같습니다. 장기적인 비전과 단기적인 생존, 이상적인 계획과 현실적인 실행 사이의 이분법적 줄다리기가 바로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개인의 삶에서도 이러한 이원론적 조율은 필수적입니다. '10년 뒤 나는 어떤 모습일까?'라는 장기적인 꿈(숲)도 중요하지만, 그 꿈을 향해 '오늘 하루 무엇을 해야 할까?'(나무)를 구체적으로 설정하고 실천하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이 둘 사이의 균형을 잃으면, 꿈은 그저 허황된 망상이 되거나, 반대로 일상의 작은 일들에만 매몰되어 큰 방향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원론적 관점에서 과정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비유가 바로 '산을 오르는 것'입니다. 정상이라는 먼 목표 지점(결과)만 바라보고 걷는다면 오르는 과정은 고되고 지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발밑의 작은 들꽃,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 함께 땀 흘리는 동료들과의 대화처럼 오르는 '과정' 자체의 풍경을 즐긴다면, 등산은 훨씬 더 즐겁고 의미 있는 경험이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산을 오르는 비유'가 왜 이원론적 사유에 잘 들어맞는지 이해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등산로는 이미 정해져 있고(목표의 명확성), 안전하게 정상에 도달한다는 '사회적으로 합의된 목적성'이 존재합니다. 정해진 등산로를 벗어나면 위험에 처할 수 있구요. 즉, '정상 정복'이라는 큰 목표와 '안전하고 즐거운 등반 과정'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비교적 명확하게 구분되고 조율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이는 다음에 이야기할, 길이 여러 갈래이거나 심지어 목적지조차 불분명한 다원론적 표류와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이 등산처럼 명확한 길과 단 하나의 정상만을 향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 최종 목적지가 무엇인지조차 모호할 때가 더 많습니다. 이처럼 단순한 '나와 세상', '이상과 현실', '나무와 숲'이라는 이분법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상황들이 우리 앞에 놓여있습니다. 나무를 보는지, 숲을 보는지로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이원론에서 더 나가면 뭐가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이제 우리는 더 넓고 복잡한 세계, 바로 다원론의 세계로 나아가려 합니다.
혹시 '카멜레온'처럼 만나는 사람마다 내 모습이 조금씩 달라지는 걸 느끼시나요? 그렇다면 축하드립니다, 당신은 이미 다원론적 존재의 특성을 경험하고 계신 겁니다! 앞선 섹션에서 우리는 '내 안의 이상 vs. 세상의 현실'이라는 이원론적 구도를 살펴보며, 이것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세상의 복잡성을 마주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넓고 다채로운 세계, 바로 '목적의 다원론'으로 함께 나아가려 합니다. 군집과 경계의 문제, 목적성을 다원론적으로 접근시킨다면 세계에 대한 이미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다원론적 세계로 들어서는 입구에서, 우리는 빅터 프랭클의 깊은 통찰과 다시 한번 마주하게 됩니다. 그가 "죽음의 수용소"에서 발견한 생존의 비밀은 단순히 '살고 싶다'는 강렬한 일차원적 욕망을 넘어선 곳에 있었습니다. 프랭클은 "그곳에서 살아남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에 대해 그저 나 자신이 살기를 희망할 뿐만 아니라, 지켜야 할 가족이 있다던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던지, 삶에 의미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살아남았다"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나 자신이 살기를 희망하는 일차원적 목적성을 빈곤하다고 말해요." 이 '빈곤함'은 단순히 목적의 개수가 적다는 의미를 넘어, 다양한 관계와 의미의 '경계'와 충분히 연결되지 못한, 고립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목표가 많다는 것을 넘어, "목적의 중첩된 레이어의 정도가 다르다" 는 점에서 그 본질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풍요로운 목적성이 한 개인의 삶에서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며 시련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단단함을 부여하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다산 정약용입니다.
다산의 삶이 유배라는 극한의 어려움 속에서도 그토록 풍요롭고 생산적일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목적이 결코 단일하거나 고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동물로서, "자기 혼자서 정체성을 가지지는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어떤 관계 속에서 어떤 정체성을 가지게 되고, 그렇게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다산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한 명의 학자이자, 아버지였으며, 스승이었고, 동료였으며, 나아가 국가와 백성을 염려하는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는 개인적인 학문 탐구의 경계를 넘어, 가족을 향한 사랑과 교육의 경계, 제자들을 양성하는 스승의 경계, 동료 학자들과 교류하는 지식인 공동체의 경계, 그리고 무엇보다도 백성들의 고된 삶을 목도하며 그들의 삶을 개선하고자 했던 애민의 경계, 나아가 조선이라는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고 개혁을 꿈꿨던 경세가의 경계에 깊이 발을 담그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관계 맺는, 다양한 경계를 가진 관계망의 무수한 중첩이" 다산의 삶의 의미를 빚어냈고, 그의 사상과 저술 활동에 깊이를 더하지 않았을까요? 바로 이 '중첩된 레이어', '무수한 중첩' 속에서 다산의 '풍요로운 목적성'이 발현되었으며, 이는 그 어떤 시련에도 쉽게 꺾이지 않는 강인한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원론의 가장 근본적인 원리와 마주하게 됩니다. "목적은 경계를 중심으로 생성된다." 고 표현했습니다.(들뢰즈의 의미화의 체제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풍요로운 목적성'과 '중첩된 레이어'는 이 명제를 통해 더욱 명확하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경계'는 나와 타인, 나와 내가 맡은 과업, 나의 다양한 역할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그어지고, 허물어지고, 또 새롭게 설정됩니다. "가장 작은 경계의 목적성은 즉흥적이다"라고 표현했어요. 개인적이고 순간적인 욕구(예: '지금 당장 커피가 마시고 싶다')에서 비롯된 단순한 목적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 경계가 가족, 직장, 사회로 확장되고, 여러 경계들이 서로 겹쳐지면서 목적 또한 점점 더 복잡하고 다층적인 양상을 띠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은 수많은 경계들의 집합이고, 목적은 경계의 수만큼 생성되므로, 모든 목적은 복합적이고 중첩되어있다." 는 결론에 이릅니다. 이는 단지 사회 현상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한 사람의 내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정신만 해도, 의식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마치 하나의 정체성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에 따라 여러 정체성을 가지는 것처럼, 사람 자신도 내부에 수많은 목적성들을 달리 가지고 있습니다. 아침에는 자녀를 챙기는 부모였다가, 직장에서는 프로젝트를 이끄는 리더가 되고, 저녁에는 친구들과 고민을 나누는 조언자가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는 수많은 '나'와 그에 따른 다양한 목적들이 공존하며, 이것들은 때로 중첩되어있고, 정치적으로 분열하며 종합되어 어떤 경향성을 가지고 선택됩니다.
이러한 목적의 다원성은 왜 현대 사회가 명쾌한 단일의 절대 법률이나 절대 윤리를 갖기 어려운지, 왜 분쟁과 갈등이 끊이지 않으며 이상적인 이데아의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는지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군집이 가진 목적성이 군집의 경계성이 만들어내는 목적성의 다양성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또한, 우리가 나누는 소통이 왜 참된 올바름으로 나아가지 않고, 늘 정치적인지에 대한 이유는 애초에 우리가 참여한 집단이라는 게 늘 움직이고 유동적인 관계를 토대로 복잡하고 다차원적인 경계를 만들어내기 때문이고 그만큼 다양한 방향성들이 이리저리 출몰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각자의 경계와 그로 인해 파생된 목적들이 서로 충돌하고 경쟁하며 때로는 협력하는 역동적인 과정,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의 본질적인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다원적 목적들이 어떻게 긍정적으로 정렬되어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로 '애플'을 들 수 있습니다. 애플은 디자인, 인문학, 기술이라는 서로 다른 '경계'의 가치들을 절묘하게 융합했습니다. 그리고 아이폰과 앱스토어라는 생태계를 통해, 개인 사용자부터 수많은 개발자와 기업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무수한 주체들의 '다원적 목적'(정보 검색, 창작, 소통, 엔터테인먼트, 업무 효율화 등)을 하나의 플랫폼 안에서 포괄하고 정렬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과거 피처폰이 주로 통화와 문자라는 비교적 단일한 목적을 수행했다면, 아이폰은 사용자에게 수많은 목적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그야말로 다목적 기기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애플 혁신의 핵심 동력이었습니다.
다원론적 관점은 이처럼 복잡한 세상과 우리 내면을 억지로 단순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이해하며, 다양한 가치와 목적들을 수용할 수 있는 넓은 시야를 제공합니다. 하지만 이 수많은 목적들이 그저 흩어져 있기만 한다면, 우리는 혼란 속에서 길을 잃고 에너지만 소모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다채로운 목적들을 어떻게 조화롭게 '통합'하고, 의미 있는 방향으로 '설계'해나갈 수 있을까요? 다음 장에서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함께 모색해 보겠습니다.
혹시 머릿속에 아이디어는 백만 개인데, 정작 뭐부터 해야 할지 몰라 결국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한 채 하루를 보낸 경험, 있으신가요? 혹은 수많은 목표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에너지만 소모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신 적은 없으신지요? 앞선 섹션에서 우리는 세상과 우리 내면이 실로 다양한 목적들로 가득 찬 다원적인 공간임을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이 다채로운 구슬들이 그저 흩어져 있기만 한다면, 아름다운 목걸이가 될 수 없듯이, 우리의 삶 역시 혼란 속에서 방향을 잃기 쉽습니다. 이제 이 흩어진 구슬들을 지혜롭게 꿰어 의미 있는 작품으로 만들어낼 '설계자 마인드셋'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앞서 우리는 목적이라는 이 방향성에 대해 일원론을 지나 이원론에 도달했고, 그걸 넘어 다원론으로 진입했습니다. 목적이 다양하고 복합적이라면, 목적 또한 어떻게 결합되고 패키징 모듈화되고 조직되는 건 아닐까요? 제텔카스텐이 메모를 보아 노트를 만들고, 노트를 모아 한편의 블로그 글을 만들고 그걸 모아 한편의 책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처럼요.
목적하면 목표 그리고 '할 일 관리'와 바로 직결됩니다. 우리가 투두리스트를 사용할 때를 떠올려보죠. 처음에는 그저 해야 할 일들을 단순하게 나열하는 것에서 시작하지만(나무), 좀 더 나아가면 이 작은 과제들을 더 큰 목표(숲)와 연결하고, 장기적인 비전 아래 하위 목표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해요. 할일을 단순히 많이 쌓는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고싶은 일들을 모두 적어내는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목적성이 경계성에서 비롯된다고 했죠? 우리가 참여한 맥락 경계가 다채로워질수록, 접속하는 관계망이 복잡해질 수록 뭔가를 하고싶은 욕망도 다채로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 많은 참여 맥락을 줄이고, 한정된 맥락 안에서 관심사를 넓히며, 의식적으로 탐색하고, 구조화하며,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통합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조직'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설계자 마인드셋'의 핵심입니다. 이는 나무와 숲을 보는 것을 넘어, 여러 산맥이 이어지는 거대한 지도를 그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개별 목적들을 더 큰 그림 안에서 재배치하고 연결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설계의 시작입니다.
앞서 경계는 윤리와 규칙을 만들고, 그것이 잘 작동할 때 조직과 커뮤니티가 분쟁을 일으키지 않고 "목적이 정렬될 때 시너지와 협업이 발생한다"고 말했습니다. 목적의 정렬성은 이번 섹션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렬되지 않은 목적은 갈등과 분쟁 정치로 번지고, 소통을 통해 정렬하는 과정이 요구됩니다. 즉, 목적성의 비 정렬성은 그 자체로 노동력이 요구되는 것과 같아요.
이러한 '목적의 조직화'는 제텔카스텐(Zettelkasten)이라는 지식 관리 시스템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습니다. 왜 우리 제텔카스텐의 수많은 메모들이 자동으로 뭉쳐서 책이 나오지 않는걸까요? 그 이유는 명확합니다. 각각의 메모, 즉 개별적인 아이디어나 정보 조각들이 서로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흩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각각의 메모들이 가진 목적성의 방향이 무수하기 때문에 좀처럼 자동화돼서 결합되지 않는거죠. 방향성이 다른 메모를 하나의 목적으로 엮어내는 그 자체가 노동이 요구되는거에요. 우리의 초보적인 할일관리가 처음 시도한 버킷리스트처럼 사방으로 뻗어져 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응집성'입니다. "응집성있는 메모처럼 응집성있는 목적성들이 체계적으로 융합되야합니다." 만약 정렬되거나 정제되지 않은 뻗어져 나가는 감정에 따라, 혹은 순간적인 공명에 의해 수집된 정렬되지 않은 메모들(목적들)은 그저 끝없는 노동만을 요구할 뿐입니다. 방향을 수정하는 일은 결코 쉽지않습니다.
사유를 창조하는 것은, 사유의 장으로 끈임없이 들어가는 과정이고, 사유를 딜리버리하는것은 사유의 장에서 다른 사람들이 가진 보편적 관념으로 끊임없이 나아가는 과정이죠. 파인만이 제대로 안다는 것은 어린아이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설명해야한다고 말하면서, 어떤 기자가 왜에 대한 질문을 할때는 왜라는 질문이 왜 어려운지 다층적으로 이야기하죠. 딜리버리는 생산만큼이나 중요하고 또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진정한 지식 창조, 혹은 의미 있는 삶의 설계는 이러한 흩어진 요소들을 하나의 일관된 방향으로 엮어내는 '설계자'의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가능해집니다. 이는 위에서 아래로(탑다운) 혹은 아래에서 위로(바텀업) 조직과정이 뒤엉켜있습니다. 여기에는 현재의 상황과 미래의 목적성을 고려한 '시간'의 축이 결합됩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볼까요? 목적성은 경계에서 비롯된다고 했습니다 타인이 개입된다는 겁니다. 그 말은 목적성은 다른 누군가에게 가치를 전달할 수 있을 때 의미가 될 수 있다는 말과 같아요. 나아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주고받는 '가치'와 '의미'까지 모두 통합적으로 고려되어야 합니다. 타인과의 기여를 주고 받는 소통의 장은, 비즈니스에서 쉽게 드러납니다. 이것이 바로 "나 혼자 작동하는게 아니라, 관계 위에서 작동해야 한다는 것"이라는 '작동하는 세컨드 브레인'의 핵심 메시지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의 글쓰기는 그냥 한편의 글을 작성하는 것을 넘어 누군가에게 적합한 가치를 제공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하며, 더 나아가 비즈니스로 나아갈 수도 있게 됩니다. 메모 노트 시간 관계 방향과 목적들의 다발이 응집되고 실체화되는 강력한 연합의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조금 말장난을 해보자면, Zettel(메모)kasten(상자)에서 확장시켜, 삶이라는 Fragment(조각)kasten(상자)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철학적 사유를 통해 목적성을 해체하고, 제텔카스텐의 원리를 목적의 파편에 적용시켜 삶이라는 거대한 체계-인생의 부분들이 조합되고 조립되는 경험을 나눠보았습니다. 결국 우리는 흩어진 목적의 조각들을 모아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가는 '설계자', 혹은 다양한 악기들의 소리를 조화롭게 이끄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의미와 생산성을 경험하고, 삶이라는 복잡한 교향곡을 아름답게 연주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한마디, 그리고 철학적 사유가 우리에게 주는 궁극적인 힘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 긴 여정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나이키의 슬로건 기억하시죠? JUST DO IT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거지
대가들의 말에는 비슷한 대답들이 종종 나옵니다. 그냥.
수학을 잘하는 학생과 못하는 학생이 문제풀이 할 때 활성 뇌지도를 영상촬영하면, 오히려 수학을 못하는 학생들의 뇌 지도가 더 많은 영역을 활성화시키고 문제풀이에 임하게 되는 반면, 문제 보고 곧바로 풀이하는 학생은 더 작은 영역을 활성화시키면서 빠르게 풀어나갑니다. 문제상황의 이해와 목표설정 풀이전략 가설설정 수립 시행의 모든 단계가 명확하게 학습해온 대로의 '프로세스'가 진행됩니다. 반면 수학을 못하는 학생은, 명확한 목표설정에 도달하지 못하고 자신의 기억 전반의 공간에서 방황하는건 아닐까요?
잘 만들어진 목적 시간 작업 관계의 패키지 위에서 우리는 수학을 잘하는 학생처럼 안정적인 전략의 프로세스 위에 올라탑니다. 반면 늘 즉각적으로 판단하는 행위는 수학풀이를 잘 못하는 학생처럼 그때 그때 즉흥적으로 매번 기억을 소환하고 연결가능성의 바다에서 헤메이진 않나요?
설계자가 되어보셔야만, 기획과 시간, 그리고 지식이 한데 모여서 하나의 작품을 그려나갈 DNA를 만들어낸다고 봅니다. 우리가 일원론에서 시작해 이원론을 거쳐 다원론의 복잡성을 이해하고, 마침내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설계자의 시각을 갖추게 될 때, 비로소 질적인 도약과 남다른 생산성,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3년간 열개이상의 볼트를 만들고 다듬어가면서 시행착오 끝에 본격적인 생산성 향상을 몸소 경험했습니다. 수많은 재료들이 한데 어우러져 응집되고 통합된 목적성은 우리 지식관리 뿐만 아니라 삶에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우리 내면에 잘 짜인 거대한 패키지, 시스템이 형성되면, 더 이상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머뭇거리지 않게 됩니다. 마치 물이 자연스럽게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행동은 그저 자연스럽게 흘러갑니다. 오늘 학습한 새로운 개념이 빈약한 연결을 만들면 금방 까먹지만, 무수히 응집된 연결을 만들어내면, 까먹고 싶어도 머릿속에서 자꾸 떠오르는것과 마찬가지에요. 잘 통합된 목적성 통합된 시간 통합된 메모들은 하나의 프로세스 위에서 작동하고 우리의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 잡아, 의식적인 노력 없이도 의도한 방향으로 이끌고 필요한 행동을 촉발시킵니다.
그렇다면 이 긴 여정을 통해 우리가 함께 탐색해 온 '철학적 사유'의 진정한 힘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첫째,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뜨게 하는 것입니다. 단순하게만 보였던 현상들 이면에 숨겨진 복잡한 경계와 다층적인 목적들을 발견하고, 일원론, 이원론, 다원론이라는 다양한 렌즈를 통해 세상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둘째, 흩어진 점들을 연결하는 능력입니다.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던 개별적인 목적, 아이디어, 경험들을 하나의 의미 있는 전체로 통합하고 조직하여 강력한 시너지를 만들어내는 힘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궁극적으로 우리를 행동하게 만드는 동력입니다. 이 모든 사유의 과정은 우리에게 명확한 방향성과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제공하며, 주저 없이 실천으로 나아가도록 등을 떠밀어 줍니다.
압축된 철학적 사유를 풀어쓴 글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렵고 추상적으로 느껴지실 수 있어요. 천천히 시간을 들여 읽어보신다면 철학적 사유가 만들어내는 개념적 시선과 해체 전복을 체험하고, 인식의 전환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뷰를 통해 상상할 수 없던 것을 상상하실 수 있을겁니다. 이제는 여러분 각자의 삶을 해석하고 변화시키는 의미 있는 도구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당신의 삶이라는 아름다운 교향곡을 멋지게 지휘해나가시기를 응원합니다.
우연히 본 영상에 목적의 정렬성의 예시로 적합한 영상이 있어 남깁니다.
https://www.youtube.com/shorts/MaaNvZvH4aw
https://www.youtube.com/watch?v=G--iDYWeV2c&ab_channel=BZCF%7C%EB%B9%84%EC%A6%88%EA%B9%8C%ED%8E%98https://www.youtube.com/shorts/MaaNvZvH4aw